121화
이렇게 가까이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던가.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시르시안이 일어나 나를 잡아당겼다.
“미안합니다. 밖에서 계속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저 사람, 진짜 주, 죽었나요?”
“숨이 끊어진 걸 이미 확인한 후입니다.”
“그, 그렇지만… 죽여 버리면… 누가 보냈는지 알 수가 없게 됐잖아요.”
게다가 대체 어떻게 내 침실에 들어왔는지도 알아낼 수가 없게 됐다.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나는 디트리히를 꼭 껴안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한 군데 달라진 점 하나 없어 보이는데. 설마 창가로 들어왔을까?
하지만 여긴 3층이다. 수상한 암살자가 나타나 창문을 기어오르는 것을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나.
“살려 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이런 놈들은 대게 임무에 실패하게 되면 자결을 하고 마는 법이니까요.”
“아…. 그런 건가요.”
암살자니 뭐니, 그런 것에 대해 내가 아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시르시안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거렸다. 지금은 당장 이 방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아셰… 아니, 폐하께 이 일에 대해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으으, 모르겠다. 저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이해합니다. 근처에 다른 방을 임시 거처로 마련해 달라고 하지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아, 아뇨. 같이 나가요.”
누군지도 모르는 시체 옆에서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시르시안의 옷깃을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세나는 대체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 방에 있을까? 그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저기, 그런데 고양이는….”
“여기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을 시켜 다프네 양에게 데려오라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르시안이 나를 안쓰럽다는 듯 쳐다봤다. 호위가 그로 바뀌었다는 건 이미 저녁이라는 뜻이었다. 예니체 경이 나를 지켜 주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그저 혼란스럽고 두렵기만 했다.
“아래층에 마련된 귀빈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께도 다프네 양이 그쪽에 있다고 말씀드릴게요.”
시르시안은 근처를 지나가던 메이드 여럿에게 무어라 속닥속닥 지시를 내린 후 말했다. 그들은 깜짝 놀라며 내 침실을 바라보기도 하고, 벽에 딱 달라붙어 있던 나를 힐끔 쳐다보다 파드득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나는 시르시안의 안내를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디트리히에겐 아무 일도 없다는 점이었다.
“자, 여기 계세요. 다프네 양의 시녀가 곧 올 겁니다.”
시르시안은 수많은 방들 중에서 촛불이 밝게 켜져 있는 공간으로 나를 안내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고, 사용하지 않는 벽난로는 깨끗한 장작으로 가득 막혀 있는 곳이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알 수 없는 통로를 이용해 나타나, 나와 디트리히를 위협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겨, 경께서도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되나요?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기를 오래 안고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금세 묵직해진 팔이 힘겨워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시르시안의 옷깃을 붙들었다.
“폐하께 직접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려드려야 합니다만….”
“다른 사람을 보내는 건 안 될까요…?”
“업무 중이신 분을 바로 뵐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저나 예니체 경 같은 경우에는, 다프네 양의 호위 기사이기 때문에 그나마 빠르게 폐하를 만나 뵐 수 있거든요.”
시르시안이 난감하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침묵하자, 시르시안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예니체 경도 다시 불러와 달라고 부탁해 놓았습니다. 시녀가 올 때쯤 예니체 경도 같이 나타날 겁니다.”
“아까 그 이상한 남자는 대체 어떻게 제 방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입구는 시르시안이 떡하니 버티고 지키고 있었을 텐데. 나는 얌전하게 안겨 있는 디트리히의 등을 몇 번이고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시르시안은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젤라랑 예니체 경은 언제쯤 오는 거지? 시간이 좀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다프네?”
시곗바늘만 바라보기를 한참, 문을 쾅 열고 나타난 젤라가 시르시안이 보든 말든 나를 꽉 끌어안았다. 놀란 내가 자리에서 튀어 오르는 바람에 디트리히도 덩달아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젤라는 내 상태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의 거친 손바닥이 뺨이며 턱을 감싸 쥐었다.
“어디 봐! 다친 데는 없고?”
“응, 몸은 괜찮아. 그런데 나, 진짜 너무 무서워서….”
“그럴 만도 하지! 세상에, 암살자라니! 내가 황성에서 5년을 넘게 일했지만 그동안 그런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이리저리 내 얼굴을 돌려 본 젤라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뒤늦게야 시르시안을 의식하고 어색하게 거리를 벌렸다.
“…시녀분이 오셨으니 저는 이만 폐하께 다녀오겠습니다.”
“그, 그래요. 감사했….”
“다프네 양! 괜찮으십니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누군가 문을 엄청난 기세로 두드려 대며 소리쳤다. 예니체 경이었다.
시르시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문가로 다가가며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자님도 같이 계신 겁니… 우스테 경?”
“네, 예니체 경. 황자님도 여기 함께하십니다.”
검은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간 예니체 경의 인상은 매섭다. 긴 다리를 성큼 움직여 이쪽으로 다가온 그가 나와 디트리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겁을 먹은 아기가 울상을 지으며 칭얼거렸다. 하여간에 예니체 경은 동물이고 아기들한테 인기가 없었다.
“얼굴이 너무 무서워요. 표정 좀 펴 주세요.”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다프네 양이 겪은 일이 너무….”
젤라와 예니체 경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디트리히를 달래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자 시르시안은 이미 방을 나가고 없었다.
아셰라드렌은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한시라도 빨리 그의 든든한 품에 안겨 위로받고 싶었다.
⋆★⋆
“뭐라고 했는지 다시 말해 봐.”
아셰라드렌이 깃털이 달린 펜을 시르시안에게 집어 던졌다. 쐐액,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얇은 펜에서 이렇게 살벌한 소리가 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시르시안은 따끔거리는 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기다랗게 난 상처 위로 피가 맺혀 나왔다.
“다프네 양의 침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온 아셰라드렌이 순식간에 제 멱살을 잡아 올렸기 때문이다.
매서운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갈겼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시르시안은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 귀족들의 시선을 무시하려 애썼다.
“…가야겠군.”
“하지만 전하, 지금 건은 이제 서명만 남기시면 되는 일이….”
귀족들 중 하나가 아셰라드렌을 말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듯 보였다.
시르시안을 내팽개친 아셰라드렌은 뛰다시피 하여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다프네가 몸을 피한 곳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정신없이 복도를 지나가던 그는 때마침 맞은편 모퉁이에서 새까만 얼굴을 빼꼼 내미는 요물을 발견했다.
“넌 또 왜 여기에 있어.”
다프네가 애지중지하는 고양이였다. 한때는 질투가 나서 내다 버릴까 고민했던 적도 있었건만, 그랬다간 다프네가 다시는 저를 봐 줄 것 같지가 않아 포기했더랬다.
아셰라드렌은 신경질적으로 고양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그녀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방의 문고리를 돌렸다.
“아휴, 귀여우시기도 하지. 직전까지 위험했던 것도 모르고. 그래요, 그래. 황자님은 언제까지나 해맑게 있어 주세요.”
방 안에는 다프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 하나와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예니체 경, 그리고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꺄르르 웃는 저 빌어먹을 애새끼.
“…너만 없었어도.”
다프네가 괴한을 마주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셰라드렌은 속으로 혀를 차며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아직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아기의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곳에 있는 누구보다 먼저 제 존재를 알아챈 듯한 저 망할 놈의 애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