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내일 또 와도 될까요?”
“네? 네.”
프리지어는 한참 동안 디트리히와 놀아 주다 일어났다. 앞으로 바빠질 예정이라는 사람치고는 꽤 오랜 시간 내 침실에 머무르는 것 같았지만, 아직 나는 그녀에게 먼저 질문을 할 만큼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다.
“혹시 일정이 안 된다면 시르시안 앞으로 황자님이 쓰실 담요나 먹을 것도 좀 들려 보낼게요.”
“감사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폐하께서 황자님께 많은 걸 해 주실 것 같진 않아서 그래요. 찾아보니 슬슬 이유식을 시작하셔도 좋은 시기인 것 같더라고요.”
그새 아기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본 모양이었다. 나는 어제 젤라에게 부탁해, 동화책과 함께 빌려 달라고 했던 육아 책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탁자에 쌓여 있는 책을 펼쳐 볼 틈이 없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이유식이라니….
“원래 아기는 모두가 함께 키우는 거래요. 저도 그렇게 컸고요.”
내 시선을 눈치챈 듯 프리지어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친절함에 감동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모아서 황자님을 건강하게 길러 내도록 해요, 우리.”
“그래요, 언제든지 방문해 주세요. 아, 그런데 전 왕비님의 장례는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단 말이죠. 최소한의 의식은 치러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하지만 아셰라드렌이 과연 그렇게 할 것인지는, 프리지어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전 왕비에 대한 황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이 나라에 없었다. 그렇지만 성에 유폐시킨 것도 모자라 장례까지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면….
나는 프리지어를 내보내고 축축하게 젖은 장난감 공을 입에 넣으려 하는 디트리히를 말렸다. 호기심이 많을 시기라 그런지 그는 무엇이든 우선 입에 가져가려 했다.
아셰라드렌은 이름 없는 성 같은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 이런 시기를 보냈을까. 나는 디트리히의 얼굴을 닦아 준 뒤 분내가 나는 그의 몸을 안아 들었다.
똑똑
“실례합니다, 다프네 양.”
“네. 말씀하세요.”
문밖에서 예니체 경이 나를 불렀다. 프리지어도 갔는데 어째서 들어오지 않나 싶어 나는 문가로 다가갔다. 예니체 경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모르기니아의 대공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황자님을 보러 오신 거라면, 들어오셔도 된다고….”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외간 여인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못 할 짓이야.”
이미 예니체 경이고 시르시안이고, 디트리히를 보기 위해 침실 안으로 들어온 적이 있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러나 대공은 내 말을 자르고 소리쳤다.
‘뭐야, 어쩌자는 거야. 본인이 침실 앞까지 와 놓고서.’
나는 디트리히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고민하다 문고리를 쥐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 탈출한 황자를 보고 싶어 하는 귀족은 비단 모르기니아 대공뿐만이 아닐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대공. 얼마 만에 뵙는 거죠?”
“전에 함께 만찬을 즐긴 뒤로는 처음이군. 고양이는 잘 있나?”
“아, 세나는….”
고양이는 의외로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한동안은 새로운 공간이 익숙지 않은지 침대 밑에 숨어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만. 주방에서 온 젤라의 간식이며, 디트리히의 등장에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어제부터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관찰하기도 했다.
내 얘기를 들은 대공, 칼릭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또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서… 이분이 바로?”
“어제부로 공식적으로 황자님이라고 불리시게 되었어요.”
나는 금실을 수놓은 천에 감싸인 디트리히를 내보였다. 아기는 칼릭스에게 딱히 관심이 없는지 내 원피스의 앞섶에 달린 리본을 잡아당기기 바빴지만 말이다.
대공은 오렌지빛 눈동자를 빛내며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성급히 만져 보려고 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분을 공녀가 직접 돌보기로 결정한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디트리히를 만나게 된 후로 프리지어는 물론이고 대공까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대견하다는 듯 내게 엄지를 치켜올리기까지 했다. 정작 나는 무슨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이내 칼릭스는 ‘잠깐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 들렀을 뿐이네.’ 하고 금방 자리를 피해 주었다. 자신은 그저 황자님께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게 전부라는 말을 남기며.
그렇게 짧은 만남을 끝내고, 나는 예니체 경에게 잠시 쉬어야겠다고 말한 뒤 다시금 침실로 들어왔다.
디트리히는 분홍색 입술로 조그맣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도 몇 번이나 일어나 젖병을 물려 주느라 나도 피곤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세나야, 너도 같이 잘까?”
물론 제멋대로인 고양이가 내가 바라는 것처럼 침대 위에 곧바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세나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탁자 밑에 웅크려 자리를 잡았다.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던 젤라도 푹 쉬라며 내보냈다. 나는 디트리히와 함께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육아에 관한 서적을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
단잠을 즐기던 중, 희미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 부스럭대는 소음이 정신을 일깨웠다. 얼마나 잤을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디트리히는 먼저 깨어나 엉엉 울며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그런 아기가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새 해가 져 버렸는지 실내는 컴컴해져 있었다.
“…젤라?”
잠시 낮잠을 즐기긴 했지만 그래도 벌써 밤이 되었을까. 상체를 일으키며 두리번대는데, 선명치 못한 시야로 누군가 창가를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침실 내부가 어두웠던 것은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사람. 젤라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은데.
“…쯧.”
내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낀 것보다 검은 천을 뒤집어쓴 인영이 나를 돌아보는 것이 더 빨랐다. 목 뒤가 서늘해졌다. 나는 재빨리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디트리히를 껴안았다.
“누, 누구세요?”
“쓸데없이 귀만 밝아선.”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순간 복면에 가려져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나는 황제의 침실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머무르고 있는데, 대체 누가 이 삼엄한 경계를 뚫고 들어왔단 말인가?
“사, 살려 주…!”
“글쎄. 그건 안 되겠는걸?”
남자는 의기양양해 보였다. 그는 날랜 움직임으로 품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냈다.
디트리히를 노리는 건가, 아니면 나를 노리는 건가. 디트리히를 데리고 있기 전까지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니, 역시 저쪽은 황자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나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남자가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어째선지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얌전히 있어. 금방 끝내 줄 테니….”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예니체 경이 있을 텐데.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얼어붙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그러자 남자가 점점 더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단검의 칼날이 반짝 빛났다.
“멈춰라!”
그와 동시에 침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나는 급히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시르시안이 장검을 빼 들고 서 있었다. 남자의 단검이 내 머리맡을 갈랐다.
“이런! 얘기가 다르잖아!”
복면을 쓴 남자가 허둥지둥 침대 헤드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려 했다. 여태까지의 여유는 어디로 간 것인지, 시르시안이 등장하자 그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아무래도 상관없어!”
정체불명의 남자가 머뭇거리는 찰나 시르시안은 어두운 내 침실을 둘러보았다. 그 틈을 타 새로운 단검을 꺼낸 남자가 나를 향해, 아니 정확히는 내 품에 안긴 디트리히를 향해 팔을 휘두르려 했다.
푸욱!
“끄으윽…. 아악! 아아아아악!”
시르시안의 검이 남자의 윗배를 관통했다.
단검을 놓친 남자가 배에 꽂힌 검을 뽑느라 쩔쩔맸다. 그제야 조금씩 굳은 몸이 풀렸다. 나는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와 시르시안을 향해 달려갔다. 남자의 비명에 깨어난 디트리히가 흔들리는 내 품 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아앙! 아아앙!”
“끝장을 내는 게 좋겠습니다. 다프네 양, 물러서 있어요.”
“아니…!”
침실 안이 전체적으로 소란스러웠다. 나는 정신없이 디트리히를 달래며 시르시안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시르시안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남자의 목에 단검을 대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내리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