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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18)화 (115/123)

118화

그날 밤, 나는 잠옷 위로 얇은 숄 하나만 걸친 채 침실을 나섰다. 디트리히는 이미 한참도 전에 재워 두었다.

“다프….”

“쉬이, 아기님이 깨어나면 불러 주세요.”

문밖에 서 있는 시르시안에게 부탁한 뒤, 아셰라드렌의 침실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이었다. 그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셰.”

남자는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인기척을 느끼고도 아는 체는 하지 않으면서.

그쯤에서부터 나는 그가 얼마나 화가 단단히 났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과연 내 설득이 통할는지 모르겠다. 아셰라드렌은 고집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아셰. 무시할 거예요?”

나는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가 그렇게나 내게 강요해 왔던 과거의 애칭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으려 했다. 나는 온종일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느라 푸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좋아요, 그럼.”

“…….”

“폐하.”

아셰라드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한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침대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어두운 오렌지빛 촛불 색으로 물든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기다란 속눈썹, 높게 솟아오른 콧대와 꽉 다물린 매끄러운 입술.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디트리히를 닮은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거기서 해.”

나와 거리를 두려 들다니,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불만스레 입술을 비죽이다 말고 입을 열었다.

“먼저 폐하의 어머니께서 겪으신 사고에 대해 유감을….”

“내 어머니가 아니야. 난 그런 거 없어.”

“…알겠어요. 그냥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어차피 이건 예의상 한 말에 불과했다. 나 역시도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본 적도 없는 데다, 제 아들을 오랜 시간 감금시켰던 왕과 왕비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 유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질 뿐.

“아기님이 불쌍해요.”

“그래서?”

“아기님을 이름 없는 성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당분간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해.”

무너진 성을 복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황성의 증축 또한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황실은 더 많은 일꾼을 고용할 예정일 테고.

혹시 저 서류의 내용이 그런 부분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딱 잘라 답하는 아셰라드렌 때문에 조금 민망해졌다.

“그러면, 그동안은 아기님을 제가….”

“하.”

서류 뭉치가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미 예상했을 그였음에도, 직접적으로 얘기를 듣게 되니 더 이상은 분노를 참지 못한 것 같았다.

아셰라드렌이 신경질적으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 와중에도 그는 내게 시선 한 번 주질 않아, 나는 초조하게 손끝으로 숄을 만지작거렸다.

“그 애새끼를 돌볼 사람은 이 성에 넘쳐나도록 많아. 굳이 네가 데리고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제대로 된 보모를 찾아 주실 건가요? 그렇다면 아무 말 안 할게요. 하지만 혹시나 이상한 곳에 넘겨져서 학대라도 당한다면….”

“그 또한 그 녀석의 운명이겠지.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테고.”

그렇게 말하고 그는 뒤늦게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뭘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아직 말 한마디조차 못 하는 어린 아기를 향한 불쾌함이 공기 중에도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대 왕과 왕비가 아셰라드렌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 낸 아기. 디트리히는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앞의 남자에게 거슬리는 존재였다.

“아, 제발. 아셰.”

하지만 디트리히 스스로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다.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을 그 아기를 생각하면, 나는 자꾸만 나를 보자마자 펑! 하고 변해 버렸던 작고 보드라운 털 뭉치가 연상됐다.

그렇기에 더욱이 디트리히를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아셰라드렌이 원해서 동물의 형상을 하고 태어난 것이 아니듯, 디트리히 또한 원해서 아셰라드렌을 위협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진 서류들을 피해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아셰라드렌을 바라보았다.

“부탁이에요. 당신 동생이잖아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얼마나 당신을 닮았는지….”

“애새끼도 나처럼 짐승으로 변하기라도 한다나? 그랬다면 죽은 왕비의 정신 상태가 볼 만했겠는데.”

“아니, 진짜 왜 이렇게 비딱해요? 난 아셰를 이렇게 못난 말만 하는 남자로 키운 적이 없는데?”

“…키우긴 뭘 키우….”

아셰라드렌이 당황한 듯 인상을 쓰고 더듬거렸다. 주먹만 하던 그 작고 귀여운 생물을 내 품에 안고 책도 읽고, 밥도 먹이고, 심지어 잠까지 재웠었는데 그게 키운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나는 몸을 조금 숙여 그와 상체를 밀착시켰다. 얇은 이불 사이로 심장 고동 소리가 느껴졌다.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나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아기님이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분은 아셰를 제외하고 마지막 하나 남은 황족이에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 그는 유폐된 황자에 불과하다.”

“그래도 황자라고 인정은 하시나 보네요. 맞아요, 아기님은 예전의 아셰와 같은 외롭고 가여운 아이예요.”

“그렇다고 다프네가 그 녀석을 돌볼 이유는 없잖아.”

아셰라드렌이 짜증스레 한숨을 쉬었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침대 위에 올려진 하얀 손등을 감싸 쥐었다.

“아셰는 바쁘니까 모르죠? 솔직히 이 황성에서 나를 반기는 귀족들은 얼마 없어요.”

“그렇다고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자들은….”

“있어요.”

“이름을 말해. 엄벌을 내리겠다.”

“아뇨, 그건 좀 아닌 것 같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폭군이야 뭐야? 멋대로 도망쳤던 메이드를 외국의 공녀 신분으로 둔갑시켜 데려온 걸 어느 귀족이 반기겠냔 말이다.

나 같아도 싫어하지. 그런데 그걸 두고 엄벌을 내리겠다니. 아셰라드렌은 내 편으로는 든든한 남자였지만, 남들에게까지 그런가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제가 아기님을 돌본다면 그나마 제 인상이 좀 좋아지지 않겠어요? 저도 이왕이면 평생 살아야 할 이 황성에서 제 편을 많이 늘리고 싶다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설득이 먹힐지 모르겠다. 나는 귀족들 간의 파벌이니 뭐니,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안 그래도 천한 신분의 연인을 데려옴으로써 평판이 나빠졌을 게 분명한 황제가, 또다시 제 형제를 유폐시켜 쓸데없이 뒷말을 듣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내 속마음을 얘기한다면 아셰라드렌은 분명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내가 은근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나을 듯싶었다.

“…다프네.”

“네?”

“있잖아, 나는 그렇게까지 바보가 아니야.”

“무슨…. 저도 아는데요?”

남자가 자연스럽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아셰라드렌이 내 팔뚝을 부드럽게 쥐었다. 잠시 잠옷 사이로 드러난 내 쇄골 언저리를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떼었다.

“다프네는 애초에 귀족들의 호감을 사고 싶다는 둥,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을 거면서.”

“…왜 그렇게 확신해요? 나도 속으로는….”

“그랬다면 황성을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닐 게 아니라 파티에 참석하고 그치들과 친목을 쌓으려 들었겠지. 다프네는 황후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내 억지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일 뿐.”

진짜로 바보가 아니네. 게다가 사랑에 마냥 눈이 먼 멍청이도 아닌 듯하다. 나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 이판사판이다 싶어 대뜸 아셰라드렌의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보라색 눈이 조금 커졌다. 내가 아예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을 때는 숨소리도 확연하게 거칠어졌다.

“그렇게까지 잘 알면 그냥 허락해 줘요. 이런저런 변명은 늘어놓지 않을게요. 나는 아셰를 닮은 아기님을 데리고 있고 싶단 말이에요.”

“…그 핏덩이가 대체 나랑 어디가 닮았다는 거야?”

나는 남자의 턱선에 입술을 꾹 눌렀다. 팔뚝을 쥐고 있던 손이 멈칫하며 떨어져 나갔다. 그가 내 등을 받쳐 안는 것을 확인한 나는 턱을 살짝 들어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을 찾았다.

“왜 안 닮았겠어요, 형제인데. 우리가 언젠가 아이를 낳는다면… 디트리히 님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어…. 뭐라고?”

“왜요. 나랑 결혼한다면서? 그럼 당연히 아기도 낳겠지.”

“아, 물론. 그렇, 그렇겠지만.”

아셰라드렌의 너른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여 나는 조금 웃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것을 그랬나.

나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지금의 내 방식이 아셰라드렌을 설득하는 데 가장 효과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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