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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16)화 (113/123)

116화

마담 린다가 예니체 경에게서 아기를 건네받았다. 왕자님이 살아 계셨다고 환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폐하의 동생분이시잖아. 왜 왕자님이라고 부른대?”

“멍청하긴! 폐하께서 이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렇지. 나라를 제국으로 명명하신 뒤에도 왕자님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않으셨어.”

나는 불길을 뒤로하고 서 있는 마담 린다와 예니체 경에게 다가갔다. 아기는 아직까지도 힘차게 울부짖고 있었다.

예니체 경은 옷이 찢어지고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힌 너저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부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세요? 놀랐어요.”

“연기를 조금 마시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는 쉬면 금방 낫습니다. 그보다 아기를 좀 살펴봐 주십시오. 유모와 같이 쓰러져 있었는데….”

“아기님도 멀쩡해 보이는군. 화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아.”

마담 린다가 포대기를 들추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한 내가 한숨을 쉬자, 그녀가 대뜸 내게 아기를 들이밀었다.

“저기 유모도 나오는 것 같은데? 내가 가 볼 테니 아가씨께선 아기님을 좀 안아 주고 있게.”

“어, 저…!”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인지 마담 린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얼떨결에 아기를 받은 나는 자그마한 몸을 토닥여 주며 뒤로 물러났다.

“저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지나다니고 있으니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예니체 경의 제안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서둘러 자리를 옮기고 있는데, 때마침 다른 기사들의 부축을 받고 나온 여자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여자는 끊임없이 기침을 토해 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왕자님은, 왕자님은 어디에…! 쿨럭! 왕비님께서, 그분을 데리고 전하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선왕께선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 않소!”

“그러니까 가족이 모두 모여야 한다고…!”

열을 올리며 잔디를 잡아 쥐던 여자의 눈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의식을 잃은 듯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당황하며 여자를 길게 눕혔다.

마담 린다가 달려가 여자의 뺨을 툭툭 쳤다.

“아기님을 보살펴 주던 유모야. 보아하니 금방 눈을 뜰 것 같지는 않구먼. 의원들은 아직인가?”

“수련 기사를 황성에 보냈으니 금방 올 겁니다. 그나저나 성안을 뒤져 봤지만 왕비님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불을 지른 것이 그분이라며? 그렇다면 아마 지금쯤….”

지금쯤 어떻게 됐다는 걸까. 설마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가.

언젠가 아셰라드렌과 빨래를 하던 이름 없는 성 뒤편의 공터에서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그 정신없는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느새 울음을 멈춘 아기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보라색이네.”

유리구슬처럼 맑고 투명하게 젖어 있는 눈동자였다. 아기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마아…. 우마먀!”

뭐라는 건진 전혀 알 수 없었고 그저 안쓰러워 보였다. 처음 보는 아셰라드렌의 남동생은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이제는 어머니마저 잃고 말았다. 아직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할 시기일 텐데.

아셰라드렌도 이렇게 작은 아기였을 때 이름 없는 성에 유폐되었을 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제 동생에게 그대로 물려주었다.

“디트리히 왕자님이라고 했나요?”

“먀아!”

“다프네 양, 여기서는 그냥 아기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면 디트리히 님이라고 부르든가요. 폐하께서는 이분을 황족으로 인정하지 않으셨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왕자님이라고 부르던데요…?”

“황제 폐하 앞에서는 감히 그렇게 부르지 못할 겁니다.”

어딘가에서 얼굴과 손을 깨끗하게 씻고 온 예니체 경이 아기의 포동포동한 뺨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대었다. 그 역시도 이렇게까지 작은 생물을 대하는 것은 낯설고 미숙해 보였다.

새삼 우리를 보고 벌벌 떨던 하얗고 연약한 강아지가 떠올랐다. 다만 아기는 나와 예니체 경을 사이에 두고도 겁을 먹진 않은 것 같았다.

“으…. 먀아!”

“자꾸 뭐라고 하는 걸까요?”

“글쎄요, 아기를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건 저도 마찬가진데.”

예니체 경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화재는 거의 다 진압이 되었다지만, 불길이 사그라들면서 생겨나는 연기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 아기를 이름 없는 성 근처에서 계속 데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설이던 나는 예니체 경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역시 같은 고민에 빠져 있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황성으로 데려갈까요?”

“폐하께서 기뻐하시진 않을 텐데요.”

“그렇다고 여기 버려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따로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아기님이 이미 다프네 양에게 안겨 있기도 하고….”

그러니 굳이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와 예니체 경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어쩌지, 어쩌지 하고 중얼대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우리를 따로 말리는 귀족 같은 건 없었다. 모두가 이 아기의 존재를 조심스러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울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씩씩한 아기님이네요.”

“앞으로 더 씩씩해지셔야 할 겁니다. 의지할 데라고는 없으실 테니.”

황성으로 향하는 길, 예니체 경과 나는 몇 번이고 신기하게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보슬보슬한 머리카락은 옅은 금발이었고, 동그랗고 커다란 눈은 아셰라드렌과 같은 보라색이었다.

이 아기는 아셰라드렌처럼 변신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려나. 새삼 궁금했다. 아기와 함께 죽겠다며 성에 불을 지른 전 왕비에 대해서는, 굳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매가 폐하와 닮으신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황성에 도착한 나는 곧장 내 침실로 향했다. 예니체 경은 기사 숙소로 가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돌아오기로 했다.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난감하게 바라보고 있을 즈음 젤라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나를 찾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그녀는 숨을 색색 몰아쉬고 있었다.

“시녀를 따돌리고 돌아다니는 귀족 아가씨가 어디에 있어!”

“미, 미안. 그럴 정신이 없었어.”

“듣자 하니 네가 왕자님을 데려갔다고 하던데…. 아, 그분이셔? 세상에! 진짜 예쁘게 생기셨다!”

한걸음에 침대로 달려온 젤라가 디트리히를 보고 감탄했다. 아기는 인형 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거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사실 지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기님이 배가 고프진 않을까?”

“시종을 불러다 이맘때쯤 아기가 먹을 만한 걸 구해 와 달라고 하자. 아기용 침대도 마련해야겠어.”

“뭐야, 젤라. 왜 이렇게 잘 알아?”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업어 키웠거든. 숨 좀 돌릴까 싶으면 새로운 동생이 태어나는 집안에서 자랐다면 이 정도는 기본이야.”

나는 젤라의 조언을 듣고 곧바로 종을 울렸다. 그러자 잠시 후 잔느가 들어와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설명을 길게 할 틈이 없어 잔느에게 지시를 내린 후, 나와 젤라는 아기 앞에 모여 앉아 숨 막히는 귀여움을 감상했다.

“으먀. 으먀.”

“음? 엄마라고 하는 것 같은데.”

젤라가 입을 막고 중얼거렸다. 아기가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나는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뭐? 진짜로? 하지만 전 왕비께서는 이미….”

“아니! 널 보고 하는 소리잖아.”

“뭔 소리야. 그냥 옹알이하는 거겠지.”

우리가 짤막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잔느가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나타난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우유가 든 젖병이 들려 있었다.

“주방에 갔더니 마담 린다께서 이걸… 준비해 주셨어요.”

“뭐야, 잔느. 갑자기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

민망해하며 웃었지만 잔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게 젖병을 내밀기만 했다. 젤라가 시녀가 되는 걸 본 뒤로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젖병을 젤라에게 건네고 일어났다.

“잠시만, 잔느. 이쪽으로 와 봐.”

그러고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옷장을 한가득 채운 드레스들 중 잔느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고 있는데, 문득 그녀가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연하늘색의 풍성한 드레스를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드레스를 꺼내 잔느에게 안겨 주었다. 그런 다음 부디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고, 젤라가 시녀가 된 건에 관하여 잔느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다.

떨떠름해하며 드레스를 받아 든 잔느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으아아앙!”

디트리히가 목청이 터져라 울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잔느와 나는 동시에 드레스 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풀거리는 치맛자락들 사이로 누군가 침대 근처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드레스 룸에서 뛰어나왔다. 싸늘한 눈초리를 한 아셰라드렌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다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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