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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15)화 (112/123)

115화

“…물론 그럴 의무는 없지요. 그저 제안을 드린 것뿐인데, 그렇게 공격적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네요.”

“아, 그러세요? 별로 제안처럼 들리지는 않던데?”

“내 말투가 좀 고압적인 데가 있기는 합니다. 용서하세요.”

프리지어의 사과는 사과가 아니었다. 그녀는 재밌다는 듯 젤라를 향해 웃음 지었다.

“새로 사귄 친구가 꽤 씩씩하군요, 다프네 양.”

“…네, 젤라가 좀 그런 구석이 있기는 하죠.”

“티 파티에 얼굴 한 번 내민 적 없으신 분이 언제 이런 멋진 분을 알게 되셨을까 궁금하네요.”

“티 파티 같은 게 있었는지 몰랐는데요.”

“어머나, 얼마나 자주 열리는데요. 오늘도 마찬가지고요.”

프리지어가 나를 쏙 빼놓고 열심히 사교계 친목을 쌓는다는 건 잘 알겠다. 솔직히 그런 데는 가 봤자 비웃음을 사기만 할 게 뻔하니 별로 내키지도 않았다만.

“다음에 한번 초대하지요. 거기 계신 친구분도 같이 와 주었으면 좋겠네요.”

“일정이 맞으면 생각해 볼게요. 말씀은 고맙지만요.”

젤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프리지어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럼 이만.”

프리지어가 고개를 비딱하게 까딱이며 우리를 지나쳐 갔다. 나는 그녀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크게 숨을 뱉어 냈다. 젤라가 쯧쯧 혀를 찼다.

“쟤는 왜 지가 황성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거야? 난 무슨, 여기가 쟤네 집인 줄 알았네.”

“아, 젤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들으라고 해! 폐하께서 누구를 황후로 들이시려는지는 주방 천장에 사는 생쥐도 알 텐데.”

이래서 젤라가 좋다니까. 다음에 티 파티에 가게 되면 둘이서 깽판이라도 쳐 버려? 상상만 해도 즐겁다. 현실의 난 소심해서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았지만.

“저도 젤라 양에게 동의합니다. 가끔 보면 프리지어 양은 도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어요.”

젤라와 팔짱을 끼고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예니체 경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그러자 젤라는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물었다.

“둘이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인가 봐요? 그러고 보니 전에도 주방에서 왔었어. 그렇죠?”

“그렇습니다. 다프네 양이 그쪽으로 소속을 옮긴 걸 알고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전 그때 기사님이 틀림없이 다프네를 좋아해서 왔다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라이벌이 하필이면….”

그녀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황제라는 뜻이었다. 예니체 경은 깜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다프네 양과 이름 없는 성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뿐….”

“저도 이제는 알아요. 그런 것치고는 둘이 그렇게 친해 보이지는 않아서, 좀 안타깝긴 하지만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프네 양과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렇게 말하고 예니체 경은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를 조용히 외면해 버렸다. 예니체 경이 검고 짙은 눈썹을 추욱 늘어뜨렸다. 어쨌거나 그는 아셰라드렌과 결탁해 나를 속인 전적이 있었으니.

“다프네 양….”

젤라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덧 우리는 주방 근처까지 다다라 있었다. 아무래도 젤라가 예니체 경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네. 나는 끝까지 예니체 경을 무시하며 포대 자루를 들고 지나다니는 일꾼들을 바라보았다.

“어, 뭐야. 젤라 너!”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그들 중 하나가 젤라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젤라는 보란 듯이 머리를 휘날리며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젤라 님이시겠지.”

“얘기하고 올래? 난 마담 린다에게 가 볼게.”

마담 린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뿌옇게 솟아오른 증기 사이에서 뒤집개를 들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젤라와 끼고 있던 팔짱을 푼 후, 예니체 경을 데리고 마담에게 향했다.

“어디서 탄내가 솔솔 풍긴다 했더니만 너로구나! 계란 하나 제대로 굽질 못해서 어찌하려고!”

“히잉, 마담이 자꾸 옆에서 뭐라고 하시니까 긴장해서 그런 거라고요.”

마담 린다는 잔소리를 하느라 바빠 아직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근처에 있던 키친 메이드에게 그녀를 불러와 달라고 부탁했다.

“네,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 어머, 저게 뭐지?”

나를 돌아본 메이드가 씩씩하게 답하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심상치 않은 얼굴이었던 터라, 나는 메이드를 따라 몸을 돌렸다.

저 멀리 새파란 하늘 위로 검은 구름 같은 것이 길게 올라오고 있었다.

“세상에, 저긴 이름 없는 성이 있는 곳인데!”

메이드가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내 눈에도 새까만 연기에 절반 이상이 가려진 높게 솟아오른 성이 들어왔다.

“부, 불이야. 불…!”

일꾼 하나가 오렌지가 잔뜩 든 바구니를 툭 떨어뜨렸다. 나는 멀거니 이름 없는 성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예니체 경에게 입을 열려는 찰나, 키친 메이드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저쪽엔 전 왕비님과 왕자님이 유폐되어 있는데….”

“뭣들 하고 있어! 당장 물을 길어 오지 않고!”

마담 린다가 일꾼들 사이를 뚫고 뛰어나왔다. 안 그래도 소란스럽던 주방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나는 마담 린다의 지시를 듣고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서 예니체 경의 팔을 잡았다.

“저희도 가 봐요! 저기는 우리가 살았던 곳이잖아요.”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이름 없는 성은 예전과 달리 꽤 많은 하인들을 두고 있으니까요.”

나는 젤라를 다시 불러오는 것도 잊고 예니체 경과 급히 숲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고 나타났다.

뒤늦게 화재를 발견한 기사들이며 귀족들이 식겁을 하고 이름 없는 성을 가리켰다.

“역시 저주받은 곳이로군! 왕비님은 무사하실지…!”

“와, 왕자님을 구해야 해! 어서 서둘러 주세요, 기사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숲까지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름 없는 성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연기가 눈과 코로 들어왔다.

어디선가 물에 적신 손수건을 구해 온 예니체 경이 내게 하나를 건넸다. 나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성에 사는 사람들이 위험해요. 예니체 경,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세요!”

“그럴 수는…. 알겠습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다프네 양은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벌써 이름 없는 성에 도착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으므로, 숲에 불이 붙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예니체 경을 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젤라가 숨을 색색 몰아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쩌다가 이런….”

이름 없는 성의 주위는 넓은 공터였다. 마침내 숲길을 모두 빠져나오자, 이미 성을 둘러싸고 있는 귀족들이며 물을 마구 퍼부어 대는 일꾼들이 보였다.

때마침 검댕을 묻힌 메이드들이 하나둘씩 부축을 받아 성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어느 귀족 하나가 그나마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메이드를 붙잡고 소리쳐 물었다.

“와, 왕자께서는? 디트리히 왕자께서는 어디 계시냔 말이다!”

“모, 모르겠어요… 저는 보지 못했는데….”

“불은 대체 누가 낸 거지? 벽난로를 피울 계절은 지난 지 오래지 않나!”

목숨을 구하자마자 혼쭐이 난 메이드가 훌쩍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메이드가 눈을 질끈 감고 고함을 질렀다.

“와, 왕비님께서 장작을 구해 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춥다고! 이름 없는 성이 너무 소름 끼치고 차갑다고! 그다음은 저희도 몰라요!”

“설마 왕비님께서 불을 내셨다는 말이냐? 그럼 왕자님께서는 지금….”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가지고 온 일꾼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누군가 이 소란을 잠재우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외쳤다.

“진정들 하시오. 왕비님께서는 왕자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지. 다들 알고 있지 않소? 왕자님이 태어난 이후로 선왕께서는 유명을 달리하셨고, 왕비님께서는 꼼짝없이 이름 없는 성에 유폐되셨으니까!”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화상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우아앙! 으앙!”

기사들이 뜯어낸 이름 없는 성의 출입구에서 불에 그을린 제복을 입은 예니체 경이 나타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로 몰렸다. 그의 품 안에는 자그마한 아기 하나가 포대기에 싸여 쉴 새 없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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