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래서 나는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려 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문밖에는 이미 아셰라드렌이 대기시켜 놓은 젤라가 예니체 경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오늘부터 공녀님을 모시게 된 젤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젤라는 짙은 녹색의 단정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하루 만에 머리를 다듬었는지 곱슬머리가 차분해 보였고, 드레스와 같은 색상의 공단 머리띠를 한 채였다.
문을 닫고 들어온 그녀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이라니. 아주 짜릿한데?”
“옷은 어디서 구했어?”
“몰라. 방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수염 난 아저씨가 와서 전해 주던걸?”
젤라를 보고 있자니 이래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뛸 듯이 기뻤다. 이제 프리지어를 봐도 지적을 당하지는 않겠지 싶어서.
아셰라드렌 굉장하네. 지나가듯이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로 젤라를 내 시녀로 만들어 줄 줄이야. 주변에서 뭐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모르겠다.
“잘됐다. 앞으로 같이 아침도 먹고…. 아, 오늘도 주방에 가 볼까 해. 어제 마담 린다를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지 뭐. 다들 날 보면 깜짝 놀라 쓰러질 듯.”
나는 종을 울려 젤라와 내 몫의 아침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옆에서 연신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간다며 감탄했다.
식사가 오기 전까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젤라가 내 초록색 눈에 어울릴 것 같다며 광택이 도는 노란색 드레스를 가져다주었다.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가씨?”
“아, 됐다고.”
“한쪽으로 풍성하게 땋아서 내릴까? 다프네는 운도 좋지. 내가 머리 손질을 좀 할 줄 아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아침부터 기운이 넘쳐 나는군. 우리는 꼭 소꿉놀이 같지 않냐며 화장대 앞에서 깔깔 웃어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더불어 식사를 가져왔다는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왔다.
“일단 먹고 하자.”
“안 돼, 안 돼. 기다려. 끝에만 조금 더 말면 된단 말야.”
“그래도 배가 고픈….”
“들어가겠습니다.”
트레이를 끌고 온 메이드를 보았을 때 나는 잠깐 흠칫했다. 며칠간 내 단장을 도와주었던 잔느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나와 젤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식사는… 어디에서….”
잔느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잔느에게 드레스를 선물해 주지도 않았지. 나는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뜨끔했다.
어제 아셰라드렌이 젤라를 제외하고도 친한 친구가 있냐고 물었을 때, 굳이 잔느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이미 잔느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결과, 젤라는 버젓이 귀족 신분이 되어 내 곁에 서 있을 수 있게 되었고, 잔느는 여전히 메이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아셰라드렌이 설마 진짜로 젤라에게 작위를 줄 줄은 몰랐다는 말은, 지금 꺼내 봤자 변명이 될 게 뻔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잔느의 시선을 피했다.
“조, 좋은 아침이야.”
“…응, 그런데….”
잔느가 젤라의 드레스 차림을 쳐다보며 뜸을 들였다. 젤라는 내 머리 손질을 마무리한 뒤 잔느가 가져온 트레이를 살폈다.
“우와, 맛있겠다. 이거 마담 린다가 직접 만든 라즈베리 잼이잖아?”
그러다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들고 나와 잔느를 살폈다.
“왜 그래? 뭐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잔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느는 급히 접시를 탁자에 옮겼다. 그러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빈 트레이 손잡이를 쥐었다.
“식사가 끝나시면 다시 종을 울려 주세요.”
“저기 있잖아, 잔느.”
분명 내 말을 들었을 텐데도, 그녀는 재빠르게 트레이를 끌고 사라졌다.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잔느가 내 옷을 갈아입혀 줄 때마다 화려한 드레스 천 자락을 부러운 듯 매만지던 모습을 몇 번이고 본 기억이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혹시 둘이 아는 사이야?”
“응? 응. 실비아랑 나랑 잔느랑… 셋이 나란히 황성에 들어왔었거든.”
“그럼 꽤 친하겠… 아, 설마. 쟤 방금 나보고 질투 나서 저러는 거야?”
“…내 생각엔 그래. 이게 참, 뭐라고 하기 애매한데.”
아직 식사를 하지도 않았는데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아셰라드렌에게 잔느도 내 시녀로 삼게 해 달라고 부탁해 봐야 하나.
아니다,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좀 아니었다.
“그러면 그냥 이거나 먹자. 와, 크림 흘러내리는 것 좀 봐.”
젤라가 얼른 앉으라며 나를 소파로 끌고 갔다. 그러나 나는 마음 편히 음식을 넘기진 못했다. 당분간 잔느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빵을 몇 조각 먹고 주스를 마신 뒤, 나는 젤라가 이름 모를 크림을 듬뿍 바른 토스트를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나갈 준비를 마치고 일어섰다.
“어디로 가십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녀 볼까 해서요.”
“함께 가겠습니다.”
오늘따라 약간 쌀쌀한 감이 있어, 얇은 숄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예니체 경은 군말하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젤라가 그를 힐끔대며 샐쭉 웃는 것이 보였다.
“예니체 경, 아침은요?”
“오기 전에 먹었습니다.”
“그래요? 주방에 가서 간식거리를 좀 얻어 볼까 했는데. 경은 별로 배고프지 않겠네요.”
“…전 언제나 배가 고픈데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잔느를 마주한 뒤에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시답잖은 화제를 계속 꺼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맞은편에서는 내 또래로 보이는 귀족 소녀들이 막 입궁한 듯 병아리 떼처럼 몰려다니고 있었다.
오늘 혹시 무슨 날인가? 의문을 던지듯 예니체 경과 젤라를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딱히 아는 건 없어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소녀들을 스쳐 지나갔다. 개중 몇몇과는 눈이 마주쳤지만 누구도 먼저 내게 알은체하는 이는 없었다.
“뭐냐. 다프네, 너도 귀족이면서.”
“글쎄. 저 사람들 눈엔 별로 그렇게 안 보일걸.”
“혹시 괴롭힘당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야, 나한테 그 정도로 관심 있지도 않을 텐데.”
두 명의 보초병이 지키고 있는 문을 나설 즈음이었다. 늑장을 부리다 나오기라도 한 듯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는 프리지어가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또 마주친 거지? 그것도 이 넓은 황성에서.
프리지어를 보자마자 긴장한 탓에 목 뒤가 멋대로 빳빳이 굳었다. 나는 그녀가 방금 지나간 소녀들처럼 차라리 나를 못 본 체하길 바랐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프리지어는 양옆에 또 다른 귀족 소녀들을 낀 채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곧바로 젤라를 향했다.
“못 보던 얼굴이군요.”
“…안녕하세요.”
젤라가 드레스를 잡고 가볍게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보기엔 별로 흠잡을 데 없는 인사였건만, 프리지어는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금빛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지방에서 방금 막 올라왔나요?”
“기젤라입니다. 황성에서 3년 이상 근무해 왔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만 한 나이의 영애가 황성에 그렇게 오래 있었다면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는데.”
프리지어가 빨간 눈으로 젤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햇볕에 탄 그녀의 얼굴, 드레스 자락을 쥔 거칠거칠한 손가락, 우리를 스쳐 지난 귀족들과는 다르게 아직 아무 보석도 달지 않아 밋밋한 목덜미까지.
젤라는 말 한마디 없이 흘러가는 이 기묘한 시간이 영 어색한 듯 한쪽 눈을 약간 찡그렸다. 프리지어는 여전히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을 깨고 싶어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젤라를 가렸다.
“오늘부로 제 시녀가 된 아이예요. 프리지어 님이 그러셨잖아요. 혼자 다니지 말라고.”
“그래, 내가 그랬었죠.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오늘부로’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폐하께서 감사하게도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셨어요.”
프리지어의 앞에서 아셰라드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확실한 설명을 듣기 전까지 그녀가 자리를 뜰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리지어는 설마, 하고 입술을 떼었다.
“귀족이 아니구나. 너.”
“아뇨, 귀족인데요.”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데?”
프리지어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아, 왜 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희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내가 알기로 다프네 양은 딱히 바쁘지 않을 텐데요. 얘기를 좀 들어야겠어요.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요?”
너 아까 그 여자애들이랑 같이 어디 가는 거 아니었니. 대체 어떻게 하면 프리지어를 벗어날 수 있을까? 속으로 이런저런 고민을 해 보던 찰나였다.
젤라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쪽은 꼭 대단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명령을 내리네요. 하지만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