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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12)화 (111/123)

112화

나는 프리지어가 왜 나를 호숫가로 데려가나 고민했다. 그 고민에 대한 답은 햇살에 반짝이는 물 근처에 다다랐을 때 알 수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단정한 입매로 말한 시르시안이 불쑥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이런 게 당연한 거예요.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근처에 있는 남성분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세요.”

프리지어는 눈만 내려 시르시안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가 손수건에 물을 적시는 것과 물기를 짜내는 것, 그리고 다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미는 것까지도 철저하게.

“제가 다프네 양의 손을 깨끗하게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시르시안이 물었다. 괜찮다고 거절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살며시 끈적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작은 미소를 지은 그가 내 손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황성을 떠나기 전처럼 행동하는 건 곤란해요. 반발하는 이들이 많다고는 해도 당신은 이제 귀족입니다. 다프네 양이 혼자 말괄량이처럼 쏘다니다 남의 눈에 띄게 된다면, 그게 전부 폐하의 평판에 영향을 줄 거예요.”

프리지어는 나와 시르시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유일하게 내게 귀족 된 자의 도리를 알려 주는 사람이었다.

“…감사해요.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못했어요. 앞으로는 호위 기사분을 대동하면 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얌전히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거겠지만요.”

다만 그녀가 나를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내가 아무런 의지도 없는 인형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지 않나. 나는 깨끗해진 손을 다른 손으로 쓸어 보며 프리지어를 쳐다봤다.

“제가 영 반갑지 않으신 건 알겠어요. 하지만 알아서 할게요. 프리지어 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이요.”

“글쎄요…. 다프네 양이 황성으로 온 것 자체가 내게 누가 되는 일인데.”

“제가 원해서 돌아온 게 아니에요. 분노의 방향은 제가 아니라 폐하께 향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러니 탓하려거든 나를 강제로 데려온 아셰라드렌을 탓해야지. 왜 아무런 힘도 없는 내게 화풀이를 한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토해 냈다. 프리지어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난 폐하께도 이미 화가 많이 난 상태예요. 어쩌겠어요, 아직까지도 사랑, 사랑. 어리숙한 말씀만 늘어놓으시는 분인데.”

그녀의 마지막 문장은 꼭 혼잣말처럼 느껴졌다. 프리지어의 시선이 나를 비껴가 호숫가를 향했다.

“이 시간부터는 우스테 경이 당신을 호위하게 될 거예요. 예전처럼 예니체 경과 교대하게 될 테니 그사이에 사라지는 일은 없도록 해요.”

나보고는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더니. 나는 몸을 돌리는 프리지어를 향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본인은 괜찮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프리지어는 나와 시르시안을 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제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함께하도록 하지요.”

“아뇨, 별로….”

프리지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시르시안은 입을 열었다. 배가 다른 누이에게 완전히 잡혀 사는 모양새였다.

나는 잠깐 숲을 거닐다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실내에만 있기에는 햇볕이 너무 좋았다.

“꼴사납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까? 제가 누님이 하라는 대로만 움직이는 모습이.”

“솔직히 별생각 없었어요. 프리지어 님 같은 분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명령하는 게 익숙한 분이신 것 같으니까요.”

“실로 그렇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시는 분이지요.”

길을 걸으며 시르시안은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그게 뭐. 사실 내 속마음은 그런 식이었지만, 그가 씁쓸하게 웃는 탓에 곧이곧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이런저런 일을 많이 시키나 본데…. 남매 사이라는 게 원래 그런가. 나는 형제가 없어서 모르겠다.

“레티스 공주님의 시녀로 오랫동안 계셨잖아요. 게으르신 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셨을까요?”

초록색 나뭇잎들이 빽빽했다. 거대한 황성의 한 모서리에는 인부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 벽돌 같은 것을 나르는 데 한창이었다.

다들 저렇게 성실하게 사는데, 내가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산책이나 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불편하듯 갑작스럽게 주어진 이 고귀한 신분도 내게는 영 갑갑했다.

레티스가 황성을 떠났던 그날에 대해서 알 수만 있다면.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내딛다 문득 시르시안을 올려보았다. 막 초목이 우거진 부근을 지나가던 터라 수려한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누님이 게으른 건 아닙니다. 귀찮아하는 것과 게으른 것은 엄연히 달라요. 게다가 누님께선 예전부터 유달리 레티스 공주님을 좋아하셨고…. 흠.”

“그렇다면 공주님께서 그렇게 되신 후에는 상심이 컸겠어요.”

“그랬을 겁니다. 분명히.”

짧은 산책을 마치고 나는 다시 황성으로 향했다. 레티스와 실비아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우선은 젤라가 알려 준 남자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실비아가 밤에 몰래 만나곤 했다던 그 남자. 혹시 그녀에게도 연인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 애는 피골이 상접한 수준으로 말라 있었다. 연애 같은 것에 빠져 있을 만한 모습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갑자기 말이 없어지셨는데.”

묵묵히 걷고 있으려니 시르시안이 물었다. 예니체 경과 함께 주방으로 가는 건 내일이나 되어야 할 듯싶었다. 말수가 적은 그 기사는 이런 식으로 내게 자주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사람이 항상 말을 하지는 않아요, 우스테 경.”

“그거야 그렇지만.”

시르시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뭘 갑자기 저렇게 즐거워하는지 모르겠다. 이해가 가지 않아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출입문 근처에 있었고, 때마침 그곳에서 다른 귀족들과 밖으로 나오는 아셰라드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엇….”

“다프네!”

근 이틀간은 밤에 자기 전에 잠깐 마주하는 게 전부여서 그런가? 나를 보자마자 아셰라드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는 기다란 다리의 보폭도 넓어서, 단 몇 걸음 만에 이미 내 앞에 도착해 있었다.

“뭘 하고 있었어? 간밤에 잠은 푹 잤나?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보지 못하고 나가야 해서 얼마나 아쉬웠던지.”

“엄청 반가워하네요…. 뺨이 다 화끈해질 정도예요.”

“왜 당연한 말을 해? 점심은 아직이겠지? 오늘은 우리 둘이서 조용하게 먹자.”

“그래도 되나요? 저는 상관없지만.”

그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상쾌한 비누 냄새를 맡으며 듬직한 품 안에 안겨 있자니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나 정말로 이 남자를 좋아하나 봐. 원치도 않는 곳에 나를 끌고 온 사람인데도…. 그런데도 그를 보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아까 프리지어를 만나고 와서 그런가.

“음,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폐하, 방금까지 인부들을 보러 가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증축 상황을 살펴보시겠다고….”

나는 아셰라드렌을 쫓아온 귀족들 사이에서 우스테 후작을 보았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아셰라드렌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황제는 나를 놓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오후의 일정으로 미루도록 하지. 경들도 잠시 쉬다 오는 게 어때?”

“그렇게 되면 원래 있던 일정들이….”

“개중 하나 정도는 취소하는 게 좋겠군. 르바페 부인이 신청한 재판을 내일로 미뤄 주게.”

아셰라드렌은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당황한 귀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시르시안이 곧바로 우리의 뒤를 따랐다.

“내 방 안에 있는 작은 정원에서 식사를 하자. 그쪽으로 음식을 가져오라고 해, 우스테 경.”

“네, 폐하.”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 황제의 방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가 문을 열기 전에 조심스레 물었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아까 그분들… 표정이 별로 안 좋던데.”

“그치들은 내가 뭘 해도 그런 얼굴을 하니까 상관없어. 다프네는 전에 내가 사랑받는 황제라고 그랬지? 하지만 모두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랬다. 나는 그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얌전히 아셰라드렌을 따라갔다.

그의 침실에 딸린 발코니는 내 방과 달리 아주 컸다. 작은 정원이라 할 만큼 초록이 무성했고, 봄에 피는 장미며 여러 가지 꽃들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나를 정원 중간에 있는 새하얀 나무 의자에 앉혔다. 산책로보다도 이곳이 더 햇살이 잘 드는 게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프리지어의 동생과 뭘 하고 있었을까.”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그는 내가 잠시 정원을 감상하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 내 시선이 저를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새삼 질투를 안 하나 했어.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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