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아, 안녕하세요. 공녀님. 여기는 어쩐 일로….”
아. 또 시작이다. 이런 상황.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팔자에도 없던 공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셰라드렌이 방긋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주방에서 짧게나마 일했던 시절, 나와 친하게 지냈던 젤라마저 이제는 나를 불편해하는 것 같다. 젤라는 이런 누추한 곳은 공녀님께서 오실 만한 곳이 아니라는 둥, 좀 심하다 싶을 만큼 손사래를 쳐 댔다.
“그럼 자리를 옮기자. 잠깐 나갔다 와도… 괜찮겠지?”
주방은 언제나 분주한 곳이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오고 가는 피해 조심스레 물었다. 젤라는 보란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다른 분도 아닌 공녀님 지시인데요.”
“저기, 젤라. 그만….”
황성으로 돌아온 지 오늘로 이틀째. 아셰라드렌은 그간 밀려 있던 공무로 인해 얼굴을 볼 틈도 거의 없었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황후로 삼을 생각이라면, 지금쯤 나는 황족이 되기 위한 예절 교육이라도 받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아셰라드렌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심지어 그에게 나의 부족함에 대한 언질을 한 귀족들도 따로 없는 모양인지, 나는 공녀의 신분을 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있었다.
…뭐, 딱히 황후가 되겠다는 야심 같은 건 없으니 난 아무래도 좋았지만.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전에도 폐하랑 어떤 사이였는지 말하지 않아서, 그것도 미안하고.”
“아이고, 공녀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저 같은 것에서 사과하실 이유는 없어요.”
“아, 진짜로 그만.”
젤라가 언제 돌아가야 할지 모르니 나는 그녀와 주방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서 산책했다. 이틀 전에 아셰라드렌이 대놓고 내게 애정을 표현한 이후로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 할까 봐 먼 산을 보거나 차마 나를 못 본 체하던 귀족들을 지나치고, 어느덧 인적이 없는 길로 나아갈 무렵이었다.
마침내 젤라가 입을 가리며 낄낄 웃었다.
“알겠어, 알겠어. 되게 멋쩍어하네. 너 그래서야 폐하랑 결혼할 수 있겠어?”
“그런 건 모르겠고. 아, 젤라. 이 편안한 대화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왜, 다들 너한테 어떻게 대하길래?”
“네가 주방에서 날 부른 것처럼.”
젤라는 나올 때 슬쩍 했다며 주먹만 한 사과 두 알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손으로 대충 껍질을 훔친 뒤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우리 여기 나무 뒤에 숨어서 얘기할래? 혹시 누가 보면 너나 나나 별로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데.”
“그러자. 그동안 잘 지냈어?”
“나야 뭐 똑같지. 네가 사라진 뒤로 동기 애들이 너에 대해 물어봐서 좀 성가셨던 것 빼고는.”
“미안해, 괜히 너를….”
“됐으니까 땅굴 파고 들어가지 마. 나도 네가 반가운 건 마찬가지니까.”
젤라와 나는 나무 뒤에 쪼그려 앉아 잠시 말없이 사과를 먹었다. 음식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했던 이틀 전의 식사 자리와 달리, 탐스럽게 익은 사과는 아주 달콤했다.
나는 과즙이 손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있잖아.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여기 예전에 실비아가…. 그렇게 됐던 나무랑 비슷하지 않니?”
“그런가? 솔직히 기억도 안 나. 불쌍한 애라는 건 알지만 황성에서 죽어 나가는 메이드가 어디 한둘이니.”
“실비아 말고도 더 있었다는 소리야?”
처음 듣는 얘기인데. 더 말해 보라는 듯 젤라를 닦달했다. 그녀는 거의 다 먹은 사과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답했다.
“아니, 왜. 그런 애들 많잖아. 근사한 귀족의 첩이 되어 보겠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한 뒤로 쫓겨나고.”
“모, 몰랐어. 너도 알다시피 난 황성에 들어온 후에는 바로 이름 없는 성으로 갔으니까.”
“바보. 아, 공녀님께 바보는 좀 그런가.”
“그만하라니까?”
잊을 만하면 그녀는 ‘공녀님, 공녀님’ 하며 나를 놀려 댔다.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쓸어내리던 나는 과즙에 젖어 진득한 손가락을 보고 멈칫했다.
“네가 주방으로 근무지를 옮겼을 땐, 난 사실 실비아도 그런 애들 중 하나인 줄 알았어. 주변에선 레티스 공주님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다고 했지만….”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봤으니까. 실비아가 한밤중에, 아니다. 새벽인가? 몰래 나가서 어떤 남자랑 딱 달라붙어 있는걸.”
어떻게 생긴 남자였지? 키는 얼마쯤? 그 전에, 실비아에게도 그런 상대가 있었나? 그렇다면 그녀는 내가 상상하던 것처럼 살해당한 게 아니라,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안타까운 결정을 내리고 만 것인가?
찰나에 수많은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실비아와 크게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이 황성에 들어와 입사 교육을 받았던, 이따금씩 마주칠 때면 서로의 근황을 묻는 것이 전부였던 사이.
그러나 그녀와 나는 레티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실비아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실비아는 레티스가 확실히 누군가에 의해 죽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도 한밤중에 밀애를 한다는 건….
“연인 사이가 아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자세히는 모르겠다. 난 남자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젤라는 죽은 동료에 대해 입을 함부로 놀리고 싶지 않다며 잔디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나 또한 그 이상을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그녀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가 또 말리지 못할 사건이 일어나는 건 싫었다. 실비아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할 뿐. 대체 어디서 어떻게, 실비아와 레티스의 죽음에 대해 알아낼 수 있지?
“요즘 일하는 건 좀 어때. 마담 린다는 여전하셔?”
“괜찮아, 그럭저럭. 그리고 마담 린다는 아마 곧 있으면 은퇴하실 거야.”
“…그래? 그러고 보니 아까 주방에서도 못 뵈었지.”
“인수인계하느라 바쁘실걸? 새로운 주방장이 온다더라. 원래는 어디 귀족가에서 작위만 가진 귀족이었다던데.”
새삼 1년 사이에 황성이 안팎으로 많이 바뀌었나 보다. 나는 좀 까칠해도 성실하고 칼같은 마담 린다를 퍽 좋아했었다.
살랑이는 바람에 머리칼이 나부낄 무렵이었다. 잔디밭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젤라가 벌떡 일어났다.
“누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나 그만 가 봐야겠다.”
“시간 내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종종 보러 갈게.”
“공녀님께서는 그 신분에 어울리는 분들과 함께하셔야지요.”
“야, 젤라. 너….”
혀를 샐쭉 내민 젤라가 장난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풀이 묻어난 치맛자락을 털어 내더니 내게 손 인사를 하며 멀어져 갔다.
나는 어떻게 하지? 여기 좀 더 있을까? 어차피 나를 찾을 사람도 없을 테니 상관없지 않나.
멍하니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여기 있었군요. 하여간 말없이 사라지는 데는 전문이라니까요.”
“프리지어 님. 우스테 경.”
화려한 금발을 가진 남매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로 나를.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다 불편했던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깊게 인사하지 마세요. 다프네 양은 일단은 공녀잖아요? 당신이 그렇게 해도 되는 분은 폐하뿐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기억해 둘게요.”
프리지어는 가장 먼저 내가 제일 마음에 걸려 했던 예절 문제를 지적했다. 딱히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기에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녀는 만족한 듯 입꼬리를 미세하게 끌어 올렸다. 황성에 온 뒤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시르시안이 내게 팔을 내밀었다.
“가시죠. 한 시간 전부터는 제가 다프네 양을 호위해야 했는데…. 방에서 사라지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밖에 아무도 없길래.”
“10분만 기다리셨어도 제가 있었을 텐데요.”
금발의 기사가 속상하다는 듯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었고, 금빛 눈동자에는 장난기도 약간이나마 담겨 있었다.
그에 나는 안심하며 그의 팔에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감사하지만 에스코트는 거절할게요. 지금 손에 뭐가 묻어서.”
“근처에 호수가 있어요. 그쪽으로 가도록 하지요.”
‘그냥 방으로 돌아가면 되는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왜냐하면 방금 말을 한 상대가 프리지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는 눈이 있으니 시르시안과 같이 걷도록 하세요. 우리 둘만 나란히 걸으면 다프네 양을 무시하는 그림처럼 보이잖아요?”
시르시안과 프리지어는 이미 가볍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손이….’ 하고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기사의 제복은 더럽혀지라고 있는 거니까. 안 그러니?”
프리지어가 새침하게 물었다. 시르시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활짝 웃음 지었다.
“맞습니다, 누님. 그러니 다프네 양, 얼른.”
그렇게 시르시안은 오른쪽에는 프리지어를, 왼쪽에는 나를 데리고 호숫가로 나아갔다. 가는 동안 먼저 대화를 시작하려고 하는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