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보셨어요? 웬 천한 것을 데려와 놓고는…. 남들 보기 무섭지도 않은지 입을 다 맞추고 있네요.”
황제가 사라지자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귀족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모르기니아 대공을 비롯한 소수의 귀족들은 벌써 자리를 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들 너 나 할 것 없이 혀를 차기 시작했다.
“폐하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황권을 단단히 해 줄 귀족 여식을 찾진 않으시고.”
“쉬, 조심하세요. 낳아 준 어머니마저 유폐시킨 분이라고요. 입을 함부로 놀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진 말잔 말이에요.”
한 귀부인의 대담한 언사에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들은 계절이 바뀌기 전, 선왕의 느닷없는 죽음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정정하신 분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나쁘지는 않았다.
흠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의 황제를 태어나게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아주 먼 옛날의 건국 전설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는 치들이었다.
사람이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내 배를 열 달 동안 잔뜩 불쾌하게 불려 놓고,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며 세상에 나온 대를 이을 자식이, 사람도 아닌 피가 묻은 털북숭이 모습을 하고 있다고?
누구라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건국 왕 기르시가 늠름한 늑대로 변해 전장을 휩쓸었다는 얘기는 어릴 적에 유모가 침대맡에서나 해 주는 동화 같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건국 왕 기르시가 늑대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것은 그저 왕권을 빛나 보이게 해 줄 설화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렇게 배웠다. 아셰라드렌이라는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머니께 종종 들어서 폐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분이 진짜로 ‘건국 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이름 없는 성에서 갓 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어디 그분과 시선이라도 마주치신 분 있나요?”
“있을 리가 없죠.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우리 앞에만 서면 벌벌 떨고 움츠러들기 일쑤셨으니까.”
그랬던 황제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사람이 뒤바뀐 듯 확 변했다. 불안정한 시선은 여전했으나 가끔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다면, 귀족들과의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현 황제가 선왕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선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레르베 라예트 왕국은 건국 왕 시대 이후로는 귀족들에게는 세금을 걷은 적이 여태 없었건만. 정말로 본인이 기르시의 환생이라도 된다고 여기는 건지.
“아무튼, 우리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 덕분에 요즘 제 지갑 사정이 말도 아니에요. 세스나 제국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기까지 했는데, 어째서 저는 빈털터리여야만 하나요?”
물론 실제로 손을 쭉쭉 빨고만 있어야 할 정도로 경제 사정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런 살벌한 수준까지 이르렀다면 이미 황성에서 열린 파티에는 참석조차 할 수 없었겠지.
다만 영지민들에게나 매기던 세금을 그들에게도 걷기 시작한 탓에 당혹스러움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아버지 대에서는 돈 걱정 따위를 할 필요도 없이 그 풍요로움을 누렸건만, 왜 작위를 하사받자마자 귀족 또한 세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법이 생겨난 건지 모르겠다.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생각은 모두 비슷했다. 그들은 짐승의 인두겁을 쓰고 먼저 아는 체도 잘 하지 않는 황제가 두려우면서도 아니꼬웠다.
함께 전쟁에 나갔던 몇몇 귀족 출신 기사들은 황제를 아주 우러러보는 것 같았다만…. 글쎄, 우리에게 앗아 간 게 있다면 그만큼 돌려줄 줄도 알아야지!
“폐하께선 이름 없는 성에 있을 적의 영향을 크게 받고 계세요.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고, 사교 생활이라는 건 해 본 적도 없는…. 그러니 우리가 먼저 다가가야 하지 않겠어요?”
말은 아셰라드렌을 안타깝게 여기는 듯했으나 실상은 황제의 사회성이 심히도 부족한 부분을 꼬집는 것이었다. 결혼 적령기를 앞둔 딸을 데리고 입궁했던 귀부인의 입꼬리는 아직까지도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무런 언질도 없이 사라지질 않나, 기껏 모습을 드러내나 싶었더니 웬 주제도 모르는 여자를 옆에 끼고선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시선을 떼지를 않고.
“어, 어머니…. 그만하세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귀부인의 등쌀에 못 이겨 이 자리에 참석한 아가씨가 조심스레 어머니의 옷깃을 쥐었다. 그녀는 저택에서 출발하기 전, 제 어머니가 귓가에 속삭였던 충격적인 제안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황후가 되고 싶지 않냐니. 황제께서 돌아오셨으니 마침내 성인이 된 네 아름다움을 보여 드리지 않겠냐느니.
상대는 사람인지 동물인지도 모를, 언제 어떻게 위협적으로 나올지조차 알 수 없는 소름 끼치는 생명체인데!
그들의 뇌리에는 1년 전, 황제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를 두고 미친 듯이 난동을 부렸던 집채만 한 짐승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기사 둘이 허리가 부러져 죽고 병사 다섯이 치명상을 입었다. 개중 하나는 영원히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먼저 간 기사들을 따라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를, 어떻게 남편으로 삼지 않겠냐는 소리를 할 수가 있지! 발길질 하나에 기사마저 으스러뜨리는 이를 두고!
“그래요, 마담. 여기 버젓이 황후의 귀감이 되실 아가씨께서 남아 있는데.”
귀부인의 속내를 모르지 않는 한 귀족이 지적하자, 프리지어는 그제야 우아하게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렸다. 그녀는 여태껏 제 몫의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붉은 눈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프리지어는 딸과 함께 앉아 있던 귀부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공작위가 없는 이 나라에서는 후작과 백작들이 큰 권력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저 귀부인께서는 어느 백작가에서 나오셨더라. 아셰라드렌이 이름 없는 성을 나올 수 있도록 도왔고, 심지어는 그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항상 함께해 왔던 그녀는 그저 귀부인이 우습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황후를 선택하실 분은 폐하십니다. 저는 그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없어요.”
프리지어는 눈매를 부드럽게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셰라드렌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확답을 내놓은 적 없었다.
‘힘을 실어 줄 테니 나와 결혼하자. 당신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한 직후 내 목표는 언제나 그것이었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하등 상관없다. 나는 당신과 나의 아이가 당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까무러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프리지어는 끊임없이 아셰라드렌을 설득해 왔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언젠가 한 번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진심을 토해 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뭐, 결혼이 사랑으로 하는 건가.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 온종일 밭만 갈아 대는 평민들도 아니고.
프리지어는 아셰라드렌의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저 모두가 우러러보는 위치에 서고 싶었다.
“그 어리숙한 여자애…. 아, 미안해요.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목 뒤를 잡고 쓰러지려는 선왕을 보고도, 난데없이 세스나 제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던 아셰라드렌의 손을 들어 준 건 우스테 후작가였다.
그가 회의실을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그녀는 흠칫하는 아셰라드렌의 팔짱을 끼고 말을 이었다.
“사랑은 다프네랑 하세요. 나는 황후의 자리만 있으면 되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결혼이라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그런 낭만적인 얘기는 우리 같은 계급에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제가 전에도 말했죠. 우물쭈물 망설이는 티를 내면서 말을 하는 건.”
“…왕족의 위엄이, 떨어진다고.”
아셰라드렌은 프리지어와 그녀의 가문을 배제할 수 없다. 누구 덕분에 그 어두컴컴하고 께름칙한 감옥 같은 곳에서 나왔는데.
누구 덕분에 좋은 옷을 입고, 좌중을 내려다보며, 빈약한 근거로 내세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데.
다프네는 제 주제를 아는 여자다. 프리지어를 보자마자 뒷걸음질 치고 순종하듯 대답만 하는 걸 봐도 그랬다.
문제는 그녀를 공작 영애로 만들기까지 한 아셰라드렌에게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낱 메이드에 불과했던 다프네에게 고개를 먼저 숙이게 만들다니.
“역시, 황후에 가장 걸맞은 분이십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프리지어는 톡 쏘는 탄산으로 가득한 샴페인을 입가에 머금었다. 아셰라드렌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프네와 키스를 하든, 그 이상의 것을 하든.
그녀는 하등 상관없었다.
‘그러니 내가 더는 참아 주기 힘들어지기 전에, 내게 청혼해.’
새빨간 사과를 닮은 두 눈동자가 황제가 사라진 문가에 잠시 머물렀다. 프리지어는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