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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09)화 (108/123)

109화

하지만 계속해서 그녀에게 위축되어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프리지어를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고마워요. 주스가 참 맛이 좋아요. 프리지어 양도 마셔 보시겠어요?”

프리지어가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호칭의 변화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우스테 경은 보이지 않네요. 일이 바쁘신가요?”

나는 아무런 말이 없는 그녀에게 물었다. 시르시안이 사생아인 것은 알았지만, 그는 엄연히 나와 같이 입양된 귀족이었다.

여기에 있는 모두와 그렇듯이 시르시안과 나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 떠나 그는 유일하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 아들은 오늘 저희 우스테 가문의 영지인 루가티에 급히 내려갔습니다, 공녀님.”

“아… 그런가요?”

내 궁금증을 풀어 준 이는 프리지어의 아버지인 우스테 후작이었다. 혹시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좀 더 묻고 싶었으나, 아셰라드렌이 어린애처럼 입술을 비죽 내민 채 턱을 괴고 있어 포기했다.

나를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더니만, 남들과 고작 몇 마디 나누었다고 저렇게 불만스러워하다니. 나는 한숨을 쉬며 복숭아주스를 홀짝거렸다.

그러다 프리지어를 사이에 두고 앉은 슈니트 백작 부인과 눈이 마주쳐,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는 찰나였다. 아셰라드렌이 내 손을 식탁 아래로 덥석 잡아 내리며 투덜거렸다.

“다프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똑똑하게 알려 주고 싶어서 만든 시간인데.”

“네?”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 걸 보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네.”

철부지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는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여 왔다. 그러고는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술에 진하게 입맞춤을 한 뒤 떨어졌다.

“어서 먹어. 오래 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셰라드렌이 붉은 립스틱이 묻은 제 입가를 쓸며 웃었다. 누구보다도 잘난 얼굴이었고, 심장이 멋대로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입을 맞추다니. 게다가 이들은 나를 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을 텐데,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것처럼 말하기까지 하고.

“다, 다프네 공녀님. 황도까지 오시는 길이 힘겹지는 않으셨나요?”

“폐하께서 최고로 좋은 마차를 태워 드렸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라키른 부인?”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내게 꽤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던 귀족들이 급히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얼굴도장을 찍어야 할 것처럼 열심히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그들의 대화를 받아 주느라 정신없이 바빠졌고, 이내 수저를 내려놓았다.

옆에 있던 프리지어만이 아주 느릿한 속도로 조금씩 고기를 썰어 입에 가져갔을 뿐이었다. 나도 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만 쉬어야겠다.”

난데없이 라키른 백작 부인의 딸과 고양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아셰라드렌이 의자를 드르륵 끌며 일어나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르반 홀에 들어선 지 약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황제는 완전히 제멋대로였다. 그에게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어허. 다들 아쉬워하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심지어 공녀는 메인 요리를 입에 대지도 못했습니다.”

아니다. 감히 황제에게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자가 이 자리에 있긴 있었다. 모르기니아의 대공은 아셰라드렌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그를 말렸다.

둘이 엄청 친한 모양이네. 한눈에 봐도 알겠다. 그렇다고 해서 아셰라드렌이 대공의 말을 들을 리는 없지만.

“내가 알아서 하지. 오늘은 모두 다프네를 보기 위해 모여 줘서 고마웠네.”

그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한 뒤, 나를 데리고 홀을 나섰다.

…훌륭한 황제인 줄 알았는데. 방금 일로 나는 크게 당황했다. 아셰라드렌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것 같았다.

고작 1년 만에 속성으로 교육을 받고 강제로 어른이 된 탓인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왕국을 제국으로 만들어 낸 업적은 분명 대단한 것일 테지만,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제 어머니와 동생을 유폐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마 그뿐만이 아닐 테지. 안 봐도 뻔했다. 레르베 라예트의 황권은 아직까지 안정적이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은빛 후추를 닮은 별들이 창밖에 가득했다. 말없이 복도를 걷고 있자니 아셰라드렌이 나를 돌아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황제인데….

“폐하는 질투가 너무 심하신 것 같아요.”

“그런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남자라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셰라드렌은 예의 그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그에게 성큼 다가가 커다란 두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부탁이니까, 다음에 이런 자리가 생기면 다시는 나를 이렇게 빨리 끌고 나가지 말아 줘요. 이건 꼭 폐하가… 나를 숨기려는 것만 같잖아요.”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아무도 너를 못 보게… 나만 볼 수 있게.”

그는 나와 맞잡고 있는 양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귓바퀴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불가능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은.”

“하지만 다프네가 먼저 다른 남자 얘기를 꺼내니까….”

진짜 어린애냐고.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혀 잠시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주인공인 파티에서 나를 빼 왔다는 건가?

“…아셰, 대체 여태까지 어떻게 지내 왔는지 모르겠네요. 대공이나 프리지어 양이 이래선 안 된다고 알려 주지 않았나요?”

“방금, 뭐라고?”

“대공이나 프리지어 양이….”

“아니, 그 전에. 내 이름을 불렀잖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흘러나온 애칭에 황제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니, 실제로 기다란 눈꼬리가 삽시간에 젖어 들어갔다.

“한 번만 다시 불러 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해. 내겐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하….”

진짜 어린애냐고. 나는 마담 로비아가 머리를 만져 줬다는 사실도 잊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려다 멈칫했다.

오랜만에 아셰라드렌에게 남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상식을 가르쳐 줄까 했더니만.

“…아셰.”

“응.”

그가 너른 가슴을 들썩이며 답했다. 눈언저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렇게도 좋을까. 그렇다면 지금이 한마디를 하기 딱 좋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뒤에 그건 뭔가요?”

“꼬리.”

“사람이잖아요. 지금은.”

“응.”

그러나 르반 홀을 일찍 떠나온 것에 대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내 시야를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사르르 튀어나와 손목을 간지럽히는 새하얗고 풍성한 털 뭉치.

아셰라드렌은 두툼하고 부드러운 꼬리를 살랑거리며 눈을 접어 웃었다.

“너무 좋아서 그만.”

그리고 이어지는 애교에 결국 나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잘생겼는데 귀엽기까지 하다니. 내가 뭐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제 이름을 불러 줬을 뿐인데.

나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며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여기서 아셰라드렌에게 넘어갔다간 영원히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이다.

“알았어요. 그보다 들어 봐요. 오늘같이 중요한 자리에….”

“좋아해, 다프네. 사랑해. 한 번만 더 내 이름을 불러 주면 안 될까?”

“윽.”

숨이 막혔다. 아셰라드렌이 나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탄탄한 가슴에 부딪힌 코가 얼얼했다. 남자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꼬리는 쉴 새 없이 살랑거리며 내 피부에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나는 아셰라드렌이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진짜 제멋대로야!”

품 안에서 빠져나오려 이리저리 어깨를 비틀어도 소용없었다. 아셰라드렌은 드러난 내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심히 부끄러웠다. 남자의 다리에 눌린 치맛자락이 바스락거렸다.

“한 번만 더. 응?”

“…욕심만 많아 가지고.”

“다프네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아. 오늘 모인 이들의 성의를 무시하지 말라는 거겠지.”

“…….”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랬을까? 순수하게 궁금해져서 빤히 쳐다보자, 아셰라드렌이 초조한 듯 혈색 좋은 입술을 달싹였다.

“다음엔 그렇게 할게. 약속을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알겠어요. …아셰라고 불리는 게 그렇게 좋아요?”

“응, 이제야 다프네가 내 곁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인걸.”

그가 다시금 내게 입을 맞추었다. 문득 머릿속에 어쩌면 이 남자가 그렇게나 빨리 자리를 뜬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셰라드렌은 이제 겨우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혈기 왕성한 남자였고….

모르겠다. 더 이상은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남자의 허리를 껴안아 그에게 바짝 밀착했다. 구두를 신었음에도 고개를 꺾어 키스를 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잠시 입술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아셰라드렌이 내 목 뒤를 받쳐 왔다. 안달이 난 듯 자꾸만 따라붙는 움직임에 숨이 점차 가빠져 왔다.

이 남자가 백치인지, 아니면 백치인 척하는 여우인지.

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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