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그녀와 잔느는 내 팔을 잡고 드레스를 벗겨 주었다. 그러고는 어디선가 가져온 또 다른 드레스를 보여 주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시작했다.
“이 옷의 포인트는 허리에 묶는 보라색 리본이랍니다. 리본의 양 끝에 달려 있는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다프네 님을 더욱 빛나게 해 줄 거예요.”
“가슴 부근에 달린 프릴이 각도마다 다른 빛깔로 반짝이네요. 신기해요.”
그 말들을 듣고 보니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나 정말 이런 거 입고 다녀도 되는 거야? 갑작스럽게 신분이 높아졌다고 하나 내 알맹이는 여전히 변한 것 하나 없었다.
대체 이런 일상에 어떻게 적응하라는 건지. 그냥 혼자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침대에 엎드려 로맨스 소설이나 읽고 싶은데.
“옷이 크지는 않으신가요?”
“…꽉 끼는 것 같은데요.”
“어머, 딱 보기 좋은 사이즈랍니다.”
마담 로비아는 보라색 리본이 달린 새하얀 드레스를 내게 입혀 준 뒤, 화장대 앞에 앉혀 머리를 빗겨 주고 입술을 붉은 색깔로 물들여 주었다.
꽃 모양의 보석이 달린 머리 장식을 하고,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힌 목걸이와 귀걸이를 걸고, 중간중간에 잔느의 과장된 감탄 세례를 받고.
거기에 이따금씩 잘 알지도 못하는 레리와 루카의 근황을 전해 듣고.
그러다 보니 거울 앞에는 갈색 머리를 땋아 올린, 신부 같은 모습을 한 내가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매일 저녁마다 이렇게 꾸며야 하는 건 아니겠죠?”
“다프네 님이 원하신다면 가능하답니다. 선대 왕비께서도 그렇게 하셨고요.”
“아, 아니에요. 이런 건 특별한 날에만 하는 걸로 해요.”
잔뜩 힘을 주어 꾸민 모습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나중에 씻고 화장도 지워야 하는 게 너무 귀찮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자, 마담 로비아가 허리를 숙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자리를 옮기실까요? 폐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복도를 걸으며 오늘 있을 파티에 올 손님들에 대해 전해 들었다.
사실 파티라고는 해도 전국의 귀족들이 몰려오는 대단한 무도회 같은 것은 아니었고, 간단하게 황도에 사는 유력 인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인사를 나누는 정도인 듯했다.
물론 그 간단하다는 기준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테지만 말이다. 애초에 이렇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만 봐도 그렇다.
“다들 알음알음으로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아마 폐하께서 오늘 다프네 님과의 사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실 것 같아요.”
“어…. 반발이 심하지는 않을까요?”
“글쎄요,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가 괜히 난감한 질문을 한 탓인지 마담 로비아의 미소가 약간 흐려졌다. 측근이 될지도 모르는 그녀이니만큼 듣기 좋은 소리를 줄줄 늘어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반응이 오히려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폐하와 다프네 님의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어요. 그분이 당신에게 가진 특별한 감정을 누구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요.”
“혹시 두려우신가요?”
“네. 아무래도요. 폐하를 노리는 분들이 분명 많을 텐데, 그들의 눈에는 제가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눈엣가시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말씀하시는 도중에 죄송하지만.”
마담 로비아가 민망한 듯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그게, 그러니까.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사실 그분을 넘보는 가문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아, 그래요?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왜지? 아셰라드렌이 그렇게 잘생기고 젊은데.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강한 남자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프리지어도 아셰라드렌을 원하길래 나는 당연히 그가 만인의 연인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사람이 동물로 변하는 걸…. 음, 그것도 남편이 될 이가요. 그런 걸 쉽게 받아들이는 분들은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우스테 후작가의 프리지어 양을 보고 다들 신기하다고 수군거린 적도 있었답니다.”
남들이 아셰라드렌을 두고 그런 식으로 인식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늑대로 변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지? 나는 아셰라드렌이 나만 해치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이제는 어렵다고는 하나,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귀엽고 깜찍한 강아지처럼 변신하곤 했었는데.
그런데도 그에게 거부감을 느낀다는 말인가? …그게 보통의 반응인 건가?
아니, 그렇다면 난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가?
“저, 마담 로비아. 이런 말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제가 괜히 심하게 긴장을 하고 있었나 싶기도 하네요. 평민인 제가 폐하와 맺어지는 걸, 다들 안 좋게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좋게 보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에요. 왕족은 왕족들끼리, 아니면 고위급 귀족들과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아직도 뿌리 깊게 박혀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공식적으로나마 타국의 공녀가 되었으니, 내 신분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뒤에서는 웃고 떠들어 댈 수도 있겠지만.
다만 마담 로비아는 시시때때로 짐승으로 변하고는 하는 황제와 맺어진다는 걸 기이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여유가 없으니 이 정도까지만 알려 드릴게요. 실례합니다, 르테미아 공작가의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나를 바라볼까? 궁금했다. 작년에는 없던 르반 홀이라는 장소에 다다른 나는 마담 로비아가 시종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시종은 나를 보며 고개를 숙이더니, 커다란 목소리로 홀 내부를 향해 외쳤다.
“다프네 르테미아 공녀 드십니다!”
…세상에, 이렇게 멋쩍을 수가 있나. 하루아침에 생겨난 내 성이며 신분이 모두 아셰라드렌이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 텐데.
하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나는 마담 로비아의 안내를 받으며 뻣뻣하게 홀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소설 속에서나 나오던 눈부시게 빛나는 샹들리에, 곳곳에 세워진 대리석 기둥, 번쩍이는 옷을 입고 있는 다양한 연령대의 귀족들….
그러나 마담 로비아가 미리 언질해 준 것처럼 홀 안이 꽉 차도록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내 존재가 더욱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숨을 참았다. 때마침 샴페인 잔을 들고 대화를 나누는 프리지어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아셰라드렌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잘 어울려. 꼭 신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뒤늦게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딱 그랬다.
“그으런가요? 예쁜 옷을 준비해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와 그의 대화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곧바로 얼굴에 열이 몰렸다. 저렇게 잘난 남자를 노리는 이들이 별로 없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에게 너를 소개해 주고 싶었어. 우선은… 모르기니아의 대공인 칼릭스.”
아셰라드렌은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으며 말했다. 모르기니아의 대공은 낮에 봤던 편한 차림과는 달리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내게 인사해 왔다.
“반갑습니다, 르테미아 공녀.”
“아…. 네.”
그 모습을 본 아셰라드렌이 이번에는 우스테 후작과 프리지어를 소개했다. 그다음에는 슈니트 백작 부부와 라키른 백작 부부 및 그들의 딸과 아들, 케네틸 남작 부인과….
또 누구더라. 아셰라드렌은 얼굴도 이름도 못 외울 수많은 귀족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주고받게 했다. 그러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나를 가로로 아주 길게 이어진 식탁에 앉혔다.
“미안, 할 게 너무 많지.”
“아니에요. 대충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는 식탁의 중간에 앉아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 그의 옆에는 모르기니아의 대공과 우스테 후작이, 그리고 내 옆에는 프리지어와 슈니트 백작 부인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그런데 프리지어가 이렇게 가까워서야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나는 차라리 르반 홀 내부에 울려 퍼지는 우아한 음악 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입맛이 없어? 목이 마르진 않나?”
식탁 밑으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였다. 시종들이 나르는 요리가 기다란 식탁 위에 가득히 채워지고, 나와 아셰라드렌을 중심으로 하여 양옆으로 이어진 자리에 앉은 귀족들은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어 댔다.
아셰라드렌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알아본 듯했다. 그가 걱정스럽게 물으며 복숭아주스 한 잔을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아직 부부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챙기십니까? 르테미아 공녀는 참 행복하겠습니다.”
그러자 노릇하게 구워진 빵을 손끝으로 조각내고 있던 모르기니아 대공, 칼릭스가 넉살 좋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때였다. 프리지어가 나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요. 보기 좋은 모습이에요.”
아, 다시 한번 가시방석이었다. 르반 홀에 모인 이들 중 프리지어가 원하는 자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