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심지어 그 누군가는 나무를 쿵쿵 발로 차며 세나를 위협했다. 저러다간 우리 애가 떨어져 다칠 것 같았다.
“그만 해요. 세나를 괴롭히지 말라고요.”
나는 나무 뒤로 돌아가 강하게 말했다. 자칫 잘못했다 세나가 황성에 오자마자 앓아눕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더니 열불이 났던 것이다.
“뭐야. 난 괴롭히려고 한 게 아니라….”
그러자 상대방이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연갈색 피부와 어우러지는 오렌지빛 눈동자가 끔뻑거렸다.
“아.”
그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누구인지 알아본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여자가 돌아왔군.”
“…….”
“왜 그렇게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그보다 저 녀석은 당신의 고양이인가?”
나는 아셰라드렌의 곁에서 그에게 친한 척 굴던 모르기니아의 대공을 기억하고 있다. 더불어 나를 업신여기던 눈빛마저도.
그러니 어떻게 호의적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대공은 지금도 속으로 나를 비웃고 있을지도 몰랐다.
“…맞아요. 제가 키우는 아이인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사라졌어요.”
나는 마지못해 답하며 세나를 올려다보았다.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간 고양이는 정작 내려오는 방법을 깨닫지 못해 바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고민하는 사이 예니체 경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정말요? 조심하셔야 해요.”
“네, 그러니 다프네 양은 잠시 제 검을 맡아 주십시오.”
기사가 허리춤에 달고 있던 묵직한 검을 칼집과 함께 내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가볍게 뛰어올라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점은 세나가 예니체 경을 반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햐악!”
예니체 경은 고양이가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 나뭇잎들을 헤쳤다. 그러자 그 소리에 놀란 세나가 몸을 움찔거리며 돌아보더니, 예니체 경을 보자마자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괘, 괜찮으세요?”
“…네, 그런데 저를 너무 싫어하네요.”
시무룩한 목소리가 나무 위에서 들려왔다. 예니체 경은 새끼 늑대로 변했던 아셰라드렌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했었는데, 세나마저 그를 좋아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어려우면 그냥 내려오세요. 예니체 경이 더 다치겠어요.”
어쩌면 좋지. 세나는 킬라하 마을에서 살았을 때도 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고양이라, 나무를 타는 방법 같은 건 당연히 알고 있지 않았다.
사다리를 구해 오는 편이 좋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게 세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기사 양반은 그만 내려오라고. 이번엔 내가 가도록 하지.”
“그러다 세나한테 다치신다 해도 저는 책임 못 져요.”
모르기니아의 대공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예니체 경을 향해 손짓했다. 아니, 그런데 이 양반은 본인의 공국이나 다스릴 것이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담.
나는 그가 왠지 재수 없기도 하고 아니꼽게 느껴지기도 해서,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셰라드렌과는 다른 느낌으로 엄청난 미남인 그가 킬킬거리며 시원스레 웃었다.
“불필요한 걱정이군. 나는 동물들에게 인기가 많아.”
“…아, 네. 그러신 줄도 모르고.”
“사실인데. 폐하께서도 첫눈에 나를 보자마자 곧잘 따르시지 않았나. 기억 안 나?”
그래, 기억난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셰라드렌이 대공을 우상처럼 우러러보는 듯해서 얼마나 아니꼬웠던지.
결국 예니체 경은 광대뼈와 손등에 한 차례씩 발톱 자국이 생긴 채로 돌아와야 했다. 울적해진 그가 내 곁으로 다가오자, 대공은 손바닥을 가볍게 비비며 나무를 타고 올랐다.
“높은 데 있는 게 무서워서, 저를 공격한 거겠죠…?”
얼굴에 난 상처가 따가웠던지 예니체 경이 인상을 찡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세나는 새롭게 저를 향해 다가간 모르기니아 대공을 보고도 하악질을 하지 않아, 예니체 경을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봐, 고양이를 잡았어.”
심지어 대공은 당당하게 제 품으로 쏙 들어온 세나를 자랑하기까지 했다. 잠시 후 바닥에 착지한 그가 세나의 턱을 간질여 주었다.
“순하고 얌전한 녀석이로군. 기다렸다는 듯 내게 안겨 오던데.”
“감사해요. 이제 제게 돌려주세요.”
“하지만 고양이는 내가 좋은 모양인데.”
짜증 나게 하지 말고 꺼지라고 하고 싶었으나 세나가 대공에게 안겨 골골대기까지 하는 터라, 나는 뭐라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얼른 세나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망설이는 나를 보던 대공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고 싶은 말도 못 하면 이런 데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
“…네?”
“그냥 그렇다고.”
뭐래. 본인은 태어날 때부터 대공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으니 세상에 겁날 것 하나 없었을 거면서.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대공이 세나를 번쩍 안아 내게 건네주려 했다. 허공에 덜렁 들린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냐앙?”
“이리 와, 아가.”
하지만 대공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우물쭈물 소심하게 움츠리고만 있다 보면 프리지어나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세력들에게 밀려 또다시 예전처럼 고독해질지도 몰랐다.
난 황성에 오자마자 너무 위축되어 조심스럽게 굴고 있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데.
“세나를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래.”
“다음에 뵙지요, 대공.”
“어차피 금방 만나게 될 거야. …음, 다프네 공녀?”
그러니까 나도 저 낯선 호칭에 이제 그만 익숙해져야 한다. 나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며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왠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이 만족한 듯 웃으며 동시에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우와, 새삼 남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어째서 레티스가 그를 그녀만의 새로운 남주인공으로 삼으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요, 예니체 경.”
세나 덕분에 일었던 작은 소동이 끝나고, 나는 예니체 경과 같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세나는 이 공간이 제 것인양 골골대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그나마 다행인가. 미리 준비해 놓은 물그릇에 다가가는 고양이를 확인한 나는 예니체 경에게 당부했다.
“얼굴이랑 손을 꼭 소독하셔야 해요. 혹시 모르잖아요.”
“아, 네. 근무 시간이 끝나면 하겠습니다.”
“…아, 설마 전처럼 낮에는 예니체 경이, 밤에는 우스테 경이 저를 호위해 주시는 건가요?”
다만 전에는 내가 아니라 아셰라드렌에게 그렇게 붙었던 거지만.
“아니요, 밤에는 폐하께서 함께하실 테니 따로 기사를 붙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질이네요.”
“네?”
넓은 침실을 뒤적이자 간단한 소독약이며 연고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 아셰라드렌이 오해하는 건 곤란하고 피곤했으므로, 나는 아예 문밖에서 예니체 경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 후에는 마침내 홀로 침실에 들어와 세나와 둘이서 뒹굴거리며 노닥대는 시간을 즐겼다. 값비싼 구두의 신발 끈을 풀어 사냥놀이를 한다거나,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하는 등.
그렇게 한적한 오후를 보내고 있으려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나는 땅거미가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잔느와 처음 보는 귀부인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들은 치맛자락을 잡고 가볍게 몸을 숙여 내게 인사했다.
“오늘부터 다프네 님의 시중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담 로비아라고 불러 주세요.”
“반갑습니다.”
침대에서 내려와서 맞이했어야 했나. 고개를 숙여야 하나. 나는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내 쪽으로 다가온 마담 로비아는 짙은 금발을 가진 30대 중후반의 미인이었다.
“저희 혹시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요?”
마담 로비아도 그렇고, 아까 세나를 찾으러 갈 때 마주쳤던 귀족 소년도 그렇고. 처음 보는 게 분명한데 왜 이렇게 낯이 익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귀족이라고는 우스테 가문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그 두 사람이 프리지어와 시르시안을 닮은 것도 아니건만.
“눈썰미가 굉장하시네요. 다프네 님은 과거 이름 없는 성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랬지요.”
갑자기 무슨 얘기인가 싶어,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마담 로비아는 부끄럽다는 듯 뺨을 붉혔다.
“제 아이들이 예전에 그곳으로 향한 적이 있습니다. 이름을 들으면 아실까 모르겠지만, 레리와 루카라고… 저와 같은 금발을 가진 쌍둥이들이랍니다.”
“음….”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과거의 어느 날 수풀 사이로 튀어나왔던 예쁘장한 쌍둥이 남매가 떠올랐다.
아셰라드렌을 설득해 성 밖에서 이불 빨래를 하고 있을 때였던가. 아이들에게 지레 겁을 먹은 그가 거대한 늑대로 변신하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었더랬지.
“기억났어요! 아이들은 잘 지내나요?”
“물론이지요. 그날 이후로 참 의젓해졌답니다. 그전까지는 하도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힘든 일도 많았었거든요.”
아이들 얘기부터 시작해서 그런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마담 로비아는 퍽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무사히 돌려보내 주신 데다, 얌전하게 만들어 주기까지 하신 이름 없는 성의 분들에게 언제나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답니다.”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세나의 행방을 물었던 그 소년이 마담 로비아의 아들이었을까?
예전에 만났던 그 싸가지 없는 귀족 소년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긴 했다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마담 로비아.”
“네, 다프네 님. 우선은 저녁에 있을 환영 파티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실까요?”
아, 그렇지. 이런 게 바로 황성 생활이겠지. 벌써부터 긴장된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담 로비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