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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06)화 (105/123)

106화

아셰라드렌과 함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조심스레 그를 호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야겠네.”

“또 언제 오세요?”

“…왜? 벌써 내가 보고 싶은가?”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남자는 기쁜 티를 채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황성은 내게 심히 낯선 장소가 되어 있었다.

“금방 올게. 기다리고 있어.”

그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내 뺨을 감싸 쥐고 키스를 퍼부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만지는 게 당연한 사이가 됐더라. 숨이 가빠 오는 가운데 나는 아셰라드렌의 옷깃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쉬운 기색을 뚝뚝 흘리며 내게서 떨어져 나왔다.

“다녀올게.”

몸을 일으킨 그가 차가운 바닥에 오래 있지 말라는 말을 남긴 후 자리를 떴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정말로 사랑받고 있구나.

따끈하게 열이 오른 뺨을 만지작거리며, 이번 황성 생활은 저번과는 다를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괴로우리만치 불편한 건 마찬가지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확실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프리지어에게 겁을 먹고 숨어 있을 필요 따위는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셰라드렌과 나만큼 인연이 깊은 사람도 없을 텐데. 여태까지 내가 너무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이십니까?”

용기가 난 김에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복도에 서 있던 예니체 경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셰라드렌과 둘이서 내 신변을 지키기로 정해 놓기라도 한 건가.

나는 아직은 영 어색한 예니체 경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직 세나를 돌려받지 못해서요. …제 까만 고양이 말이에요.”

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오는 동안, 세나는 내가 아니라 잔느와 함께 있었다. 작은 케이지 안에 갇혀 있던 고양이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어서 빨리 내가 새로 갖게 된 방의 푹신한 침대에서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아, 그 귀여운….”

예니체 경의 까만 눈이 순간 반짝였다. 이름 없는 성에서 자그마한 강아지로 변했던 아셰라드렌을 발견했을 때와 겹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열정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짐마차들은 황성의 뒤뜰에 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가면 세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뒤뜰이라는 곳이 어디쯤에 있을지….”

아까 프리지어와 복도를 걸었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내가 없던 사이 황성의 구조가 여기저기 꽤나 바뀌어 있었다.

아셰라드렌이 쓰는 침실은 선대 왕이 쓰던 침실이 아니었고, 그가 예전에 이름 없는 성에서 나와 머물렀던 공간은 아예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어쩌면 당분간은 헤매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커다란 예니체 경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모셔다드리죠.”

“…….”

“다프네 양만 괜찮으시다면요.”

예니체 경이 선뜻 제안했다. 그러다 곧바로 내 눈치를 보긴 했지만.

우리 사이의 앙금은 아직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서먹하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요. 부탁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죠.”

담담한 대답에 예니체 경이 놀란 얼굴을 했다. 당연히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 세나를 되찾아 오는 게 급했으니까. 그러니 그가 작년에 나를 속이고, 아셰라드렌의 명령을 따랐던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할 마음 같은 건 딱히 없었다.

“폐하께서 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라고 하셨나요?”

“…아, 아뇨. 그저 다프네 양을 지키려는 목적뿐입니다.”

“예니체 경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사실 거짓말이고 약간의 분풀이 정도는 하고 싶었다. 예니체 경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자, 내 걸음걸이는 한결 경쾌해졌다.

이 정도는 심술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절대로 일부러 그러려던 건….”

“됐어요, 이제 와서.”

“하지만 제대로 사과해야 합니다. 저는 다프네 양의 믿음을 배신했으니까요.”

예니체 경은 아예 걸음을 멈추기까지 하면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죄송합니다.”

“됐다니까 그러네. 알았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나는 얼른 세나를 찾으러 가자며 그를 닦달했다. 사실 예니체 경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나라도 메이드보다는 왕자였던 아셰라드렌의 명령을 따랐을 것 같기는 했다.

어쩔 수 없는 거지. 씁쓸하긴 하지만 그게 현실 아니던가.

“여기서 밖으로 나가면 뒤뜰입니다.”

황성의 구조가 꼭 미로 같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하는 예니체 경을 따라가다 짐가방을 들고 나르는 일꾼 여럿을 지나쳤다.

“잔느도 여기 있을까요? 그 애가 세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내 말을 들은 예니체 경이 먼저 짐마차 근처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낯선 귀부인이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예니체 경이 부인에게 알은체하며 내 상황을 설명했다. 귀부인은 나를 돌아보며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어쩐지 난처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터라,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아까부터 메이드 하나가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닌다 했어요.”

귀부인이 짐마차들이 늘어선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제야 시야에 바닥에 쪼그려 앉아 마차 아래를 들여다보는 잔느가 들어왔다.

“…아, 설마.”

아니겠지. 나는 급히 잔느에게 향했다. 내 그림자가 위로 늘어서는데도 잔느는 깨닫지도 못한 것처럼 보였다.

“저기, 잔느.”

“…응? 악!”

나는 상체를 숙여 잔느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뒤로 주저앉았다.

“다, 다프네… 공녀님.”

보는 눈이 많아서인지 그녀는 낯선 호칭을 붙여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여,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제가 침실로 가려고 했는데요.”

“아직 세나를 보지 못해서… 그런데, 아니지? 설마 세나를 놓친 건 아니겠지?”

“…….”

“잔느.”

“으으. 죄송해요…. 아까 마차에서 내리다 케이지를 한 번 떨어뜨렸는데, 그 짧은 사이에 고양이가 도망가 버려서.”

“아, 제발. 농담이라고 해 줘.”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면서 세나를 키웠는데. 아찔해진 나는 순간적으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도 황성 안에서 놓친 게 다행인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부디 세나가 멀리 가지는 못했기를 바라야 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일꾼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실내로 검은 고양이가 들어가는 건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니체 경이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어 주며 말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짐마차가 수십 대나 늘어서 있을 만큼 황성의 뒤뜰은 넓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한단 말이야? 갑자기 울고 싶어진다.

“그럼 세나는 밖에 있다는 뜻이네요. …담을 넘지는 않았을까요?”

“글쎄요, 검은 고양이를 찾고 있다고 했지요? 여기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봐 드리지요.”

예니체 경의 옆에 있던 귀부인은 잔느에게도 한소리를 했다.

“얘는. 진작에 말했으면 같이 찾았을 거 아니니. 공녀님의 고양이를 잃어버리다니.”

“죄, 죄송해요… 혼이 날까 봐 무서워서.”

“그런 큰일을 저지르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고?”

귀부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매섭게 변하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나는 잔느를 두둔해 줘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지만 그건 아니지.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세나를 놓쳐 버렸는데.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귀부인의 호통을 듣는 잔느를 내버려 두고, 예니체 경과 같이 짐마차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네?”

“여기서 좀 떨어진 거리긴 하지만 근처에 화원이 하나 있긴 합니다. 혹시 모르니 그쪽으로 가 볼까요?”

“…그래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겠죠.”

예니체 경이 울상을 하고 있는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검은 고양이를 보지 못했냐고 물었지만, 대부분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떡하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을 때였다. 예니체 경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귀족 소년 하나를 붙잡고 세나에 대해 질문했다.

“…아, 새까만 고양이? 봤어요. 조금 전에 거인같이 큰 아저씨가 품에 안고 걸어가던데.”

“어, 어느 쪽으로요?”

“그러니까… 저쪽이던가?”

소년이 가리킨 방향은 나와 예니체 경이 향하고 있던 화원이었다. 나는 그에게 인사한 뒤 예니체 경과 뛰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야앙.”

귀여운 세나의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울려 퍼졌다. 예니체 경은 ‘응?’ 하고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저기 있네요.”

“어디요?”

“저기 나뭇가지 위에요.”

나는 예니체 경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나가는 배경처럼 보였던 굵고 커다란 나무 위를 자세히 보자, 풍성한 녹음과 그늘 사이에 숨어 있는 동그랗게 몸을 만 까만 등이 눈에 들어왔다.

“세나…!”

“이봐, 거긴 위험하다니까. 어서 내려오라고!”

반가운 마음에 목청껏 세나를 부르려던 찰나였다. 나무 뒤에서 누군가가 나보다 큰 목소리로 세나를 놀래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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