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105)화 (104/123)

105화

“솔직히 말하면 돌아올 줄 알았어요.”

아셰라드렌을 남겨 두고 둘이서 복도를 걸을 때였다. 불편한 침묵에 어쩔 줄 모르겠다 싶을 즈음, 프리지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역시나 이곳에서는 불청객이었다. 프리지어에게서 듣는 존댓말이 너무도 어색했다.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부디 그분이 저를 찾지 않길 바랐는걸요.”

“응, 그랬겠지요.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요?”

나는 조금 놀랐다. 프리지어는 그녀가 보인 기백과는 다르게 꽤나 다정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차가운 미소만을 짓고 있는 고운 얼굴이라.

정말로 내게 화가 난 게 아닌 거 맞나? 나는 말없이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당신이 사라진 후로 황성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답니다. 폐하께서는 쉽게 흥분해서 날뛰시고, 그분을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늑대로 변했다는… 뜻인가요?”

“그래요, 그렇게 커다란 짐승도 늑대라고 불릴 수 있다면 말이지만요.”

하지만 아셰라드렌은 내 앞에서 누군가를 죽인 적은 없는데. 물론 스스로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남들을 상처 입힌 적은 있었으나,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자신도 충격을 받아 움츠러들곤 했었다.

“내 기사 하나도 그런 식으로 죽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폐하를 다시 이름 없는 성에 가두라는 의견들이 참 많았지요.”

빈틈 하나 없는 프리지어의 옆얼굴은 단 한 번도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아셰라드렌의 일화들이었다.

“하나 우리 우스테 가문은 끝까지 폐하를 지지했답니다. 이 놀라운 힘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폐하께서 능력을 제어하실 줄만 알게 된다면, 우리는 엄청난 강대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잖아요. 프리지어 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요.”

“바로 그거야.”

프리지어가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를 뒤따르던 몇몇의 기사들도 멈춰 섰다. 그녀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고,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전쟁도, 우스테의 입김이 없었더라면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

“그런데 폐하께서는, 언제부턴가 너무나 비대해진 우스테 가문을 멀리하려고 하시네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다프네 양? 우리가 이렇게,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고 수그리고 있어야만 할까요?”

이쯤에서 나는 프리지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부터 그녀가 노리던 것은 황후의 자리였다.

아셰라드렌이 그를 저지하려는 세력들을 누르고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우스테 가문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아셰라드렌은 전쟁을 끝내자마자 나를 찾겠답시고 황성을 비워 두었고, 심지어는 이곳의 관리를 프리지어에게 맡겼던 모양인데.

“프리지어 님이 얼마나 참담하실지 상상도 되질 않아요.”

거기다 황제는 이미 옛적에 떠났던 메이드를, 황후로 삼겠다며 데려왔다. 이국의 신분을 사들여 그 메이드를 공작 영애로 둔갑시키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나는 언제 소리소문없이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역시 나는 돌아와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다시 걷도록 하지요. 조금만 더 가면 다프네 양의 방이 나와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프리지어의 지시에 따랐다. 황성의 주인 곁에 있어야 할 이는 명백히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 우리는 섬세한 문양이 조각된 생크림 빛깔의 문 앞에 섰다. 프리지어는 익숙하게 황금으로 덧칠된 문고리를 잡았다.

“여기예요.”

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 역시 금빛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우스테 후작저에서 일했을 적보다도 더 화려한 것 같기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이 방을 써야 할 사람은 프리지어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아셰라드렌의 억지로 인해, 내가 멋대로 튀어나와 그녀의 자리를 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닌지.

“…고마워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물론 그래야지요. 내가 직접 지시를 내려 꾸민 방인데.”

그러니까 레르베 라예트 황성은 이미 프리지어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하나 없는, 그녀만의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이런 곳에서 쭉 지내야 한다면 마음이 편할 날이 없겠지.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프리지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이제 혼자 있어도 될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쉬고 싶어요.”

“…좋아요.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어차피 당분간은 황성에 남아 있을 테니까.”

분명 아셰라드렌은, 프리지어더러 그만 후작저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할 말이었다.

프리지어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 문을 닫고 나갔다. 마침내 혼자가 된 나는 그녀의 지시대로만 꾸며졌을 방을 둘러보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와, 진짜 가시방석이 따로 없네.”

내가 공녀의 신분이 되었다 한들 누가 나를 인정해 줄까. 역시 이건 아셰라드렌의 억지에 불과했다. 나는 카펫 위로 쓰러지듯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페터와 할머니가 있을 킬라하 마을이 어느 때보다도 그리웠다.

“들어갈게.”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아셰라드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나타난 그는 당황한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게 이상해 보였을까. 나는 허둥지둥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셰라드렌이 몸을 숙여 앉아 내 어깨를 잡았다.

“피곤하지.”

“어…. 네.”

나를 다시 눕힌 그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한쪽 팔을 베고 누워 손끝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무심결에 바짝 깎은 손톱으로 눈길이 갔다. 아셰라드렌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바쁘지 않아요?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예요?”

꽤 오랜 시간 황성을 비워 뒀으니 할 일이 쌓여 있을 텐데. 내가 망설이듯 묻자 남자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쁠 예정이야. 그런데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내가요?”

“응. 프리지어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시무룩해 있진 않을까 싶어서.”

정답이었다. 설마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다만 그녀가 해 준 얘기들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아직은 황성이 낯설어서.”

“시간이 지나면 금방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

그리고, 그다음은 뭐지?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려고 했다. 그 순간 따뜻한 입술이 짧게 이마에 붙었다 떨어졌다.

“프리지어가 하는 소리는 신경 쓰지 마. 미안하지만 난 처음부터 너였어.”

“…귀가 되게 밝으신가 보네요.”

“그렇다기보단 대충 예상이 가니까.”

“미안하다는 건 프리지어 님에게 하는 말인가요?”

괜히 희망을 품게 해 놓고, 뒤늦게 나를 데려온 것에 대한 미안함인가?

“아니, 그럴 리가.”

“그러면요?”

아셰라드렌이 내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한 여유로운 행동이라, 오히려 내가 초조해지려고 했다.

“그 여자는 내가 황제가 된 데에는 제 덕이 가장 컸다고 떠들고 다니지. 도움을 아예 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다만, 나는 좀 억울해.”

내가 황성을 떠났던 약 1년 간의 시간에 대해서, 프리지어와 아셰라드렌은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남자는 말했다. 그가 통제력을 잃고 괴물이 되기를 반복했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은 프리지어와 우스테 가문이 아니었다고.

“그치들은 말을 아꼈지. 다른 귀족들이며 내 아버지의 눈치를 봤어. 다프네, 넌 이미 떠난 후였고 누구도 나를 진정시키지 못했으니까, 괜한 짓을 저질렀나 후회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프리지어 님은 끝까지 당신을 믿었다고….”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 당시에 그 여자는 나를 두려워했어.”

둘이 서로 다른 말을 하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는 아셰라드렌에게 집중하기 위해 아예 몸을 그를 향해 돌렸다.

그러자 그가 만족스러운 듯 내게 가까이 다가와 붙었다. 그러면서 머리를 만지작대던 손으로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모르기니아 대공이라고… 알고 있나?”

“왜 모르겠어요.”

레티스가 결혼하려고 했던 상대인데. 그리고 나를 업신여기는 듯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던 이였다. 그 때문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자가 우스테 가문을 두고 비아냥거렸거든. 이제 와서 발을 빼려고 하는 게 우습다고.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멋대로 이용하려 했던 주제에.”

공격성을 드러내던 그에게 다가선 모르기니아의 대공은, 아셰라드렌의 힘으로 강대국을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그 얘기를 듣고 아셰라드렌은 조금씩 이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게 프리지어 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요?”

“프리지어는 내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더니 그때서야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하던데.”

“어…. 그리고 실제로 돕기도 했고요?”

“맞아. 황후 자리를 약속한 적은 맹세코 없다만.”

그러나 프리지어는 기대했던 것이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였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아셰라드렌이 황제가 되는 과정에 우스테 가문이 보탬이 된 것은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어쩌면, 애초부터 목적이었던 황후 자리를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다닌다니까. …세력이 커져서 그런가.”

남자는 한숨을 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봤자 내 반려는 다프네가 될 수밖에 없는데.”

프리지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아주 오랜 옛날부터.

처음부터 그는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