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결국 그날 밤, 아셰라드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싫었던 나는 짐가방에서 로맨스 소설을 펼쳐 들었다.
“…후.”
시간을 죽이고 싶을 때는 언제나 독서가 최고라고 생각했건만. 그러나 집중이 좀처럼 되질 않았다.
한밤중에 나는 책을 덮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아셰라드렌이 신경 쓰인 탓이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아직도 화가 났는지.
그리고 어째서 내게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지….
“그러니까, 뭐야. 나를 강제로 취할 수도 있는 건데 참고 있다는 뜻?!”
아셰라드렌의 본성이 그렇게 오만하고 사나운 줄은 몰랐다. 황제가 되면 무서울 게 없어지는 건가?! 그런 자리에 올라 보질 않아서 그의 심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겠다.
넓은 침대 위를 세나와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고민했지만 해답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새벽이 될 무렵, 마침내 나는 피곤함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아셰라드렌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내 일과는 자연스레 식사를 가져온 잔느와 수다를 떠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속 좁은 남자 같으니라고. 먼저 문을 잠가 나를 감금 시킨 건 본인이면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잔느의 목소리가 어느새부턴가 막을 씌운 듯 멀게 느껴졌다. 나는 점점 혼자만의 생각으로 빠져들어 갔다.
‘아셰라드렌을 보지 못한 지가 벌써 이틀인지, 사흘인지.’
방 안에 갇혀만 있으려니 시간 감각도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식사를 충분히 먹지 못하고 잔느를 돌려보냈다. 꼭 우리 속에서 키워지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할 때쯤, 나는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을 했다. 페터와 할머니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들과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결이 찰랑거렸다. 울적하다. 즐겁지 않다. 나는 계속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가.
한참을 물에 있다, 몸을 닦고 헐렁한 실내용 원피스로 갈아입었을 때였다. 욕실 밖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아직 잔느가 오려면 한참 멀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뒤로 하고 문을 열었다. 벽 사이로 고개를 내밀자, 침대에 걸터앉아 세나를 쓰다듬고 있는 아셰라드렌이 보였다.
“…으.”
그리고 그런 그를 보자마자, 나는 수건을 내던지고 달려 나갔다. 정말이지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안도감이 나를 에워쌌다.
아셰라드렌의 앞에 다가선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못 됐어, 진짜….”
그러자 그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허물없이 무너진 몸이 남자의 허벅다리에 안착했다. 등허리를 팔로 감싼 그가 상체를 내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마에 닿는 숨결을 깨닫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셰라드렌이 곧바로 내 입술을 찾았다.
다짜고짜 혀부터 섞는 것이 민망하고 당혹스러우면서도 내심 기뻤다. 이렇게 점점 나는 그를 의지하게 되는 걸까.
그럼에도 입천장을 훑고 지나가는 혀가 달았다. 깊숙하게 파고드느라 뺨을 간질이는 은빛 머리칼이 좋았다.
이번 기회로 나는 알았다. 아셰라드렌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그는 완전한 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존재에 가까웠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시골에 꽁꽁 숨어 살던 나를 이다지도 쉽게 찾아내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 와중에 내가 성질을 부리는 게 싫었는지 이제는 아예 나를 조련하려 하고….
“…그동안 왜 안 왔어요?!”
입술이 잠깐 떨어진 틈을 타 물었다. 물기 어린 남자의 입술이 붉고 도톰했다. 유혹적인 얼굴이었다.
“바빴어.”
“갑자기요?”
“또 싸우자는 거라면….”
“아니요, 그런 게 아니예요.”
웃음기가 거의 없는 내 표정을 멋대로 해석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일어날 기색을 보이는 아셰라드렌의 옷깃을 다급하게 붙들었다.
그러고는 차마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치지 못하고 웅얼댔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잔느랑 다시 만나게 해 줘서.”
“…응.”
“우린 언제쯤 레르베 라예트의 땅을 밟나요?”
“아마 내일 아침에는 항구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급했다. 망망대해에 홀로 갇혀 있는 건 유쾌하지 못했다.
아셰라드렌이 금방이라도 일어설까 싶어, 나는 은근히 그의 어깨를 잡아 뒤쪽으로 밀었다. 의외로 그는 순순히 풀썩 드러누워 주었다.
하지만 뭘 하는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뺨이나 귀를 붉히지도 않았다.
…그가 나를 목숨줄 정도로만 여기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우물쭈물 망설이던 나는 결국 본심을 토해 내고야 말았다.
“이, 이제 어디 가지 마요.”
“…나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거 아니었나.”
“아니에요. 같이 있어 줘요. 내가 외로워했으면 좋겠어요?”
“글쎄, 어떨까.”
남자의 탄탄한 배에 올라앉았다.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말투만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너무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내 팔목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사실 잘 모르겠어. 네가 외롭다면, 나를 더 찾아 주진 않을까.”
“…….”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 지금은, 너무 나만 너를 원하고 있으니까.”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가 없는 요 며칠간 나는 깨달았다. 아마도 아셰라드렌은 이걸 노린 것일 테다. 일부러 그랬든, 아니든 간에.
“강제로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당신을 알아 달라는 거잖아. 정말 내 마음도 모르고…. 이기적이에요.”
“미안해. 그만큼 다프네가 좋아.”
“좋아한다면서, 나를 이렇게나 오래 버려두고….”
“버려둔 게 아니라… 머리를 좀 식히고 싶어서.”
나는 짜증스레 남자의 손등을 꼬집었다. 그러자 그가 움찔 어깨를 떨더니 단숨에 나를 끌어안아 눕혔다.
따뜻하고 단단한 품이었다. 나는 그가 얄미웠으나, 도저히 품 안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따금씩 혀를 섞었다. 서로를 만지작거리고, 말없이 오랜 시간 서로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해가 졌고, 컴컴한 한밤중이 되었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새로운 태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바다 위를 힘차게 날아오르는 갈매기들. 나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저 멀리 새빨간 지붕이 인상적인 수많은 건물들이 보였다. 육지였다.
“저기, 이제 다 온 거예요?”
“아셰.”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헐벗은 상반신을 일으킨 남자가 여유롭게 하품을 하고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두꺼운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으려니 그가 아아, 하고 성의 없이 아픈 소리를 냈다.
“아직은 아니야. 마차를 타고 꽤 가야 하니까.”
“전에 왕성에서 나올 때는, 하루를 꼬박 달렸더니 항구였어요.”
“…자랑이다. 누가 누굴 오래 버려뒀는지 이제 명확하네.”
“그야 당신이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느라 날 쳐다보지도 않았잖아요.”
난 아직도 그 나날들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는데. 입술을 비죽거리며 힐끔 남자를 쳐다봤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들은 것처럼, 그는 한동안 말없이 눈만 끔뻑거렸다.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미안해. 그걸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는….”
“또 그렇게 해 봐요. 이제는 아예 다른 대륙으로 떠나 버릴 테니.”
“그럴 거면 애초에 다시 데리고 오지도 않았겠지. 나를 또 피 말려 죽게 하려고. 응?”
부드러운 입술이 뺨을 내리눌렀다. 확실히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는 눈에 띄게 생기가 있어 보였다.
나랑 있으면 코피를 흘리는 일도 없는 건가. 신기했다. 운명의 반려라는 건, 신 같이 성스러운 존재가 정해 주는 게 아니구나.
아셰라드렌이 멋대로 반려를 선택하면 그만인가 싶다. 그의 눈에 들게 된다면, 그가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게 반려의 조건이었나 보다.
“알면 잘해요. 다시는 그런 무서운 협박 하지 말고.”
“응. 그럴 생각으로 데려온 건데. 자꾸 혼만 나네.”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그가 내게서 떨어졌다. 아차 싶어 돌아보자, 침대에서 내려가 옷장을 뒤적이는 남자가 보였다.
잠시 후 그는 내가 두 팔을 벌려야만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듯한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선명한 초록색 리본과, 그보다 위에서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내려보는 아셰라드렌.
“열어 봐.”
“아…. 벌써부터 부담스러운데.”
“응,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리본을 풀고 상자 뚜껑을 벗겨 내야 했다. 그러곤 그 안에 놓여 있는, 소매 끝과 가슴 부근에 은실이 놓인 짙은 보라색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드레스와 마주해야만 했다.
“저기.”
“아셰.”
“이걸 입으라는 건, 진짜 조금… 그래요.”
왜냐하면 보라색은 왕족들만이 입을 수 있는 색깔이니까. 그러니 이 드레스를 입고 황성에 간다는 건, 내가 황제의 여자라는 걸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었다.
부끄럽고 쑥스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