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아무튼 그렇다고. 이제 그만 자자.”
“실컷 궁금하게 해 놓고 뭘 자요. 대체 뭘 깨달았는데?”
나는 상체를 번쩍 일으키고 물었다. 그러자 아셰라드렌이 나를 다시 눕히더니 이번에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말하면, 믿어? 살인 소감은 듣고 싶지 않다며.”
“…됐어요, 잘 거예요.”
그와 나 사이에 딱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바로 이 불통이었다. 하지만 굳이 말해 주지 않는 것을 따져 묻기도 뭣하다.
언젠간 알려 주겠지. 아니면 내가 잊어버리던가.
나는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잠에 드는 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헉!”
숨이 막혀 눈을 떴다. 세나가 내 가슴 위에서 나를 잔뜩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 고양이는 배가 고플 때마다 나를 괴롭히더라. 나는 끙끙거리며 세나를 밀어내고 앉았다.
“뭐야, 없잖아.”
분명 어젯밤까지는 옆에 있었는데. 나는 아셰라드렌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다 침대에서 내려왔다.
또 잊어버리기 전에 시르시안에게서 짐가방을 받아 와야 했다. 밖에는 예니체 경이 있을 테니 그에게 부탁하는 편이 좋을까.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문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데, 덜컥.
“…….”
덜컥, 덜컥.
몇 번을 힘주어 잡아 봐도 객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문을 쿵쿵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예니체 경. 문이 잠겨 있는데요!”
그러나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게 뭐지.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하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세나가 얼른 밥을 달라며 앙알앙알 나를 졸라댔다.
“일어났네. 늦게 왔다 간 큰일 날 뻔했군.”
생각에 잠겨 멍하니 세나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약 10여 분 후, 아셰라드렌이 은색 쟁반에 그릇 여러 개를 담아 나타났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쏘아붙이듯 물었다.
“문이 잠겨 있던데요? 설마 일부러 그런 거예요?”
“아, 그거. 내가 없는 사이에 네가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바다 한가운데서 그게 무슨….”
“먹고 있어. 가방도 가져올게.”
아셰라드렌은 음식들을 내려놓은 뒤 다시 밖으로 나갔다. 화가 나서 거들떠도 보기 싫었지만,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빵을 뜯어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세나를 위해 준비된 듯한 간을 하지 않은 생선 요리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야앙.”
세나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여 생선을 먹었다. 그러는 사이 아셰라드렌이 내 짐가방과 함께 돌아왔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붙어 앉으려고 들었다. 그 모습을 참다못한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성질을 부렸다.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뭐가?”
아셰라드렌은 햄을 넣은 샌드위치를 집으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화가 난 건지, 조금도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폐하가 대단하신 분인 건 알겠는데요, 나까지 멋대로 대하진 말라고요. 정말로 내 사랑을 바라는 거라면….”
“하.”
헛웃음을 뱉어 낸 그가 내 말을 잘랐다. 나를 돌아보는 남자의 눈빛이 어두웠다.
“그거 알아, 다프네? 사랑이 꼭 쌍방일 필요는 없어.”
“뭐, 뭐라고요? 지금 그게….”
“내가 너를 취한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야. 먼 옛날의 내 선조가 그랬듯이.”
나는 건국왕 기르시와 그의 반려에 대한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영원히 왕을 돌아보지 않았던, 그와 맺어지길 끝까지 거부했던 망국의 공주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는, 나와 아셰라드렌은, 다행히도 서로를 향한 감정이 같은 것이라 믿었는데.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의 무게가 무겁고 어두웠다.
말과는 달리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위협이자 경고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난폭한 사람으로 만든 걸까.
울적해진 나는 식사를 포기하고 세나를 안아 들었다. 상황을 모르는 고양이는 부른 배가 만족스러운 듯 갸르릉대기 바빴다.
아셰라드렌은 더 이상 입맛이 없는지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점심나절이 되어 객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잔느였다.
“…말도 안 돼.”
마치 아주 높은 분을 대하듯 눈을 내리깐 잔느를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이름 없는 성에서 아셰라드렌이 변신하는 걸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쳤던 나의 친구.
나는 그날 이후로 잔느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우리의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시, 식사를 마치고 나시면, 다시 불러 주세요. …고, 공녀님.”
“그러지 마. 잔느, 너 내가 누군지 알잖아.”
잔느는 아침에 내가 먹었던 식기들을 치우고 새로운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렇게 할 때까지 그녀는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잔느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몇 번이고 물었다 놓는 입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정갈하게 내려놓은 뒤, 잔느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 다프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사람 얘기는 됐어. 우리 둘이 할 얘기가 많잖아?”
한참을 기다렸던 나는 잔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꺼칠하게 튼 손이 그녀가 그동안 열심히 일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잔느는 그제야 나를 끌어안으며 울먹거렸다.
“…보고 싶었어. 이름 없는 성에 갔을 때, 내가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었는데….”
잔느는 그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내 왔는지 내게 알려 주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 큰 소동이 있었던 그날, 왕성을 빠져나간 잔느는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길로 고향 집에 내려간 그녀는 눈칫밥을 먹으며 쉬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왕성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잔느는 아무 데서나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저가 살던 영지의 성에서 면접을 보았고, 한참을 기다리다 왕성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메이드가 되었다.
“난 거기서 일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 백작의 아들이 자꾸 나한테 추근거렸거든.”
그러던 중, 전쟁이 터졌다. 사표를 내고 다시 왕도로 올라갈까 고민하던 그녀는 꼼짝없이 고향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셰라드렌의 군대가 영지를 지나갔고, 또 우연히 예니체 경이 잔느를 알아보았고.
“…그게 황제 폐하께까지 전해진 모양이더라고. 전쟁이 끝났을 때, 내 앞으로 황성에서 보내온 편지가 한 통 왔어.”
잔느는 볼을 발갛게 붉히며 웃었다. 그 편지 한 통 덕분에 그녀는 다시 황성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면서.
“나는 폐하께서 그렇게 너그러우신 분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분을 보고 까무러쳤던 나를, 다시 황성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시다니 말이야.”
“…신기해라. 그렇게까지 세심한 부분이 있을 줄이야.”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잔느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잘된 일은 없을 것이었다. 세상 어느 나라를 가도 황제가 직접 메이드를 고용시키는 일은 없을 텐데.
내게는 아셰라드렌이 잔느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잔느가 이다음에 뱉어 낸 말이었다.
“네가 황성에 돌아오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하시댔어. 네가 외로워하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시다고.”
그러니까, 아셰라드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고립되어 살아왔다는 걸.
“그럼 황성에 가면, 너랑 나랑 같이 지낼 수 있는 거야?”
“그럴 거야. 비록 앞으로는 내가 너를 공녀님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됐어, 필요 없어. 그딴 호칭.”
“그딴이라니! 넌 이 세상 모든 메이드의 꿈을 이뤄 준 거야.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다니, 정말이지 나는, 부러워서….”
한 번 입을 열면 끊임없이 수다가 이어지는 잔느의 성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나는 아예 잔느와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의 사사로운 근황을 전해 들었다.
더불어 아셰라드렌은 말해 주지 않았던 황성 내부의 분위기까지도.
“사실은, 모두가 프리지어 님이 황후가 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폐하께서 전쟁에 나가시기 전에 망토를 둘러 준 것도 프리지어 님이시거든.”
그리고 그걸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봤어. 잔느가 덧붙여 주었다. 그 말인즉, 내가 황성에 얼굴을 내미는 즉시 엄청난 파란이 예고될 것이란 말이었다.
“다들 나를 싫어하겠네.”
“그건 아니지. 우스테 가문이 기세가 등등한 걸 보기 불편해하는 귀족들도 있으니까.”
“잔느, 너 그런 거 되게 잘 안다.”
“원래 메이드들이 전해 듣고 보는 게 더 많은 법이야. 얘는, 너도 그랬으면서.”
나는 어깨를 찰싹 때리며 웃는 잔느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디 잔느가 이제는 공작 영애가 된 나를 오해하지 않길 바라면서.
다만 나는 메이드 생활을 접은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갔고, 그전까지는 이름 없는 성에서 아셰라드렌과 조용한 나날들을 보내기만 했으니까….
그래서 왕성에 사는 메이드들에 비해 언제나 소식을 늦게 전해 듣기도 했고.
“와, 진짜 맛있었다. 부러워, 다프네. 앞으로는 매일 이렇게 맛있는 음식만 먹겠지.”
식사를 마친 뒤, 잔느는 사과 타르트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어머, 내 정신 좀 봐! 나 너무 오래 있었다.”
하고 벌떡 일어나 식기를 치우고 나갔다. 저녁에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그렇다는 건, 아셰는 밤이 될 때까지 오지 않는다는 뜻….”
잔느를 다시 데려와 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잠시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객실 안에 갇혀 있었다.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면 우리가 서로에게 퍼부은 막말을 사과하고,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