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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01)화 (100/123)

101화

그런 말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해도 되는 건가?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나를 찾아온 건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새삼 남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가 놀랍기도 했다.

차마 기사들이 있는 데서 아셰라드렌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어, 나는 잡은 손을 당겨 그를 뱃머리 쪽으로 끌고 갔다.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는 황후가 되겠다는 생각 같은 거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지금부터 하면 되지.”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지 말아요. 세상 모두가 반발할 거예요.”

어두운 가운데 아셰라드렌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내 손가락 마디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러고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내가 그러지 못하게 할 테니까.”

“당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아마 맞을걸. 반신이라고들 하던데.”

그 말을 듣고 되려 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러시겠지. 틈만 나면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변신하시는데.

나는 선선하게 부는 밤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들었다. 희끄무레한 안개와 구름 사이로 상앗빛에 가까운 초승달이 보일 듯 말 듯 하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망망대해였다. 내 옆에 반신이 있다면, 바다 밑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아름다운 인어 같은 것이 나타나 나를 바닷속 왕국으로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어. 별 쓸데없는 상상을 펼치고 있으려니 아셰라드렌이 뒤에서 나를 안아 왔다.

“상태는 좀 어때. 숙취라면서.”

“괜찮아지고 있어요. 그치만 이렇게 자꾸 달라붙어 있으면 다시 나빠질 것 같아요.”

“그거 착각이야. 방에선 나를 그렇게 더듬어 대더니.”

아셰라드렌은 몇 번이고 나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그건 술기운에…! 나는 그에게 반발해 입을 열려다 이내 포기했다.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보는 눈이 많았다.

저 기사들은 고작 메이드 하나를 데려오기 위해 훈련을 하고 서임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들 속으로 나를 얼마나 고깝게 여길까?

아셰라드렌은 이런 점에서 정말이지 배려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난, 황후는커녕 고작해야 그의 정부 정도나 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만 들어가죠. 바람이 차네요.”

“벌써?”

“속이 많이 나아졌어요. 어차피 여기 있어 봤자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래, 구경을 하려거든 차라리 낮에 하는 게 낫지. …이름 없는 성에 있었을 때만 해도 난, 내가 이렇게 자유로이 살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

문득 그는 심연을 닮아 있는 시커먼 바다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역시 밤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나 보다.

아셰라드렌도 이따금씩 이름 없는 성의 추억을 상기한다는 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황제가 된 지금의 삶에 너무도 만족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참, 귀여우신 분이었는데.”

나는 과거로 돌아왔던 첫날, 나를 보자마자 엉덩방아를 찧으며 손바닥만 한 강아지로 변해 버렸던 그를 떠올렸다.

그때는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나는 그 조그만 강아지를 품에 안고 얼마나 행복해했었는지.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은 귀엽지 않다는 뜻인가?”

“…그 말투를 봐요. 대체 어디가 귀여운가.”

“…치.”

아셰라드렌은 내 뺨에 얼굴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지금 이 모습, 기사들이 저를 보는 것도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애교를 부려 대는 그는, 누가 봐도 내게 단단히 빠져 있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가. 괜히 나만 우리의 관계와 이 상황에 불안을 느끼는 건가. 나는 아셰라드렌의 얼굴을 밀어내며 어서 방으로 돌아가자고 종용했다.

그러자 그는 뺨에 입술을 깊게 누른 뒤, 웃으며 잡은 손을 선뜻 이끌었다. 여전히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

나는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제 짐은 어디에 있어요?”

방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여태껏 잊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좀처럼 잠들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밤을 지새우려면 로맨스 소설이 필요했다.

“모르겠네. 우스테 경이 가지고 있던가? 지금이라도 불러 줘?”

“아니에요. 지금쯤 쉬고 있을 텐데. 내일 아침에 가져다달라고 해도….”

“왜 우스테 경한테는 친절하지? 나한테는 쉴 새 없이 틱틱거려 놓고.”

나는 고개를 돌려 아셰라드렌과의 대화를 차단했다. 침대 한가운데 세나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었다.

“비켜, 아가. 거기 누나 자리란 말이야.”

“야앙.”

“알았어. 그럼 같이 누울까?”

세나가 눈을 반쯤 뜨고 뭐라고 앙알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띠어졌다. 바깥바람이고 자시고, 객실 밖은 어딜 가도 기사들이 깔려 있어 심기가 불편해질 뿐이었다.

레르베 라예트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방에서만 지내야지. 좀 많이 답답하겠지만, 나는 아셰라드렌과 달라 남들의 이목을 무시하지 못한다.

왕성에서 그렇게나 괴로웠던 것도 다 그 때문이지 않았나. 나는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과 수선거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대단한 위인은 되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네?”

아셰라드렌을 내버려 두고 세나의 옆에 가서 앉는데, 그가 성큼 다가와 바닥에 주저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손길은 자연스럽게 구두를 신은 내 발을 향해 있다. 그는 내 신발을 벗겨 주고는, 곧바로 침대에 올라와 나를 끌어안았다.

“표정이 어두워. 돌아가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나는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몸은 단단하고 듬직했지만, 남들이 보는 그는 메이드 하나에 미쳐 국정을 버려두고 온 암군에 가까웠다.

“…어때요, 왕성은?”

“뭐가?”

“그러니까, 지금은 어떤 곳이냐는 거예요. 다들 당신을 어려워하나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왕성에 사는 쥐새끼조차 내가 메이드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이제 와서 공녀가 되었느니 뭐니 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일까?

공식적인 신분이 바뀌었다 해도 내 출신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공작 영애가 되었다고 한들, 그걸 반기는 자는 여기 내 옆에 있는 아셰라드렌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은, 이제 그곳은 왕성이 아니야.”

아셰라드렌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워 설명을 시작했다. 바람에 엉킨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려가면서.

“레르베 라예트는 제국이 되었고, 따라서 왕성은 황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귀족들 몇몇이 시끄럽게 굴길래 증축도 시작했어. 황제가 사는 공간이 이렇게 좁아서야 되겠냐면서.”

“별로, 좁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가 내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웃었다. 참기가 어려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틈을 놓치지 않고 그가 입술을 겹쳐 왔다.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내가 뱉어 낸 숨을 삼켜 낸 그가 물기 어린 입술의 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귀찮고 성가시니까, 원하는 대로 하라고 내버려 뒀어. 그리고 또… 음, 별로 말해 줄 게 없는데. 규모가 커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어서.”

“…황제가 되셨으니까, 이제 교육을 받지는 않나요?”

“응. 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마담 지르젤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마담 지르젤은 왕성에서 처음 만난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친절할 수는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를 경멸하는 사람을 만난 건 또 난생처음이라, 그 충격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었다.

“누구? 아아, 그 회초리. 내가 실권을 잡자마자 내쫓았는데.”

실권이라니, 그런 어려운 단어를 아셰라드렌의 입에서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나는 아셰라드렌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식으로 해도 괜찮아요? 혹시 폭군이라고, 뒤에서 험담을 듣고 있는 건 아니겠죠?”

“맞는데. 가끔 듣기는 해.”

“이 사람이….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도 지지 기반이 약한데.”

“걱정해 주는 거야? 기분 좋다.”

황제가 되었어도 본성은 바뀌지 않았나 보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머릿속에 나밖에 없는 백치처럼 구는 걸 보면.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는 남자의 뺨을 꼬집었다.

그러자 그가 눈썹을 모으며 억울해했다.

“모두가 다 그러는 건 아니야. 소수라고. 아직도 나를 괴물이라고 떠들어 대는 놈들이 좀 있기는 한데, 내가 괴물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걸.”

“괴물이라는 말…. 싫어했으면서.”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아무렇지 않아졌어. 아무튼, 괴물이 되어 전쟁터를 누비다 보면 꼭 개미를 밟는 듯한 기분이 들더군. 세스나의 마지막 황제를 죽일 때도 그랬어.”

아셰라드렌은 자신이 대체 어떤 인물을 죽였는지 알까? 리카르도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소설 속에선 고작 몇 줄의 문장만으로 등장했던 게 전부였던 그가, 남주인공의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그런데 다프네, 그거 알아?”

“네? 뭘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운명이야. 그자를 죽였을 때, 나는 깨달았어.”

“무슨, 남의 나라 황제를 살해한 소감을 지금 나한테….”

이 정도면 확실한 폭군이다. 레티스는 살인마를 끔찍이 싫어했었는데, 난 아셰라드렌을 보고도 혐오스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문제가 좀 있는 건가. 나는 말끝을 흐리며 아셰라드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내 뺨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보랏빛 눈동자를 감았다 떴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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