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셰라드렌은 순순했다. 말하기가 무섭게 단추를 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랬다.
그러나 그는 붉어진 귀와 눈꼬리, 약간 거칠어진 듯한 숨소리를 미처 숨기지는 못했다.
뼈마디가 불거져 나온 남자다운 손가락이 세 번째 단추에서 멈칫거렸다.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은빛 속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설마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나는 그의 손을 치우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살갗도 조금씩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기어코 단추를 모두 풀어내자,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이며, 숨을 크게 들이키느라 부풀어오른 매끄러운 가슴팍이 내 시선을 빼앗았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역시 아름다운 몸이었다. 갸날픈 부위는 단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이름없는 성에서 봤을 때는 마냥 늘씬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몸이 꽤 두꺼워져 있다.
그런데도 지방 같은 것은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오로지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듯한 남자다운 몸이다.
“남자인데도 가슴이 크네요.”
“…별로 잘 모르겠는데.”
“아까 옷을 입고 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단추가 터지는 건 아닌가 자꾸 신경이 쓰이던데.”
“그 정도는 아니야. …으.”
생크림을 닮은 것은 오히려 그의 가슴이었다. 나는 살며시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자그마한 연분홍색 과일 같은 것에 손끝이 스쳤을 때, 아셰라드렌은 허리에 바짝 힘을 주며 어딘가 아픈 듯한 소리를 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도 뛰고 있다. 나는 탄탄한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 잠시 그 소리에 집중했다.
“이러다 터지겠어요.”
“맞아. 어떻게 좀 해 줘.”
“어떻게 해 줘요? …이렇게?”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근육의 결을 따라 갈라진 옆구리를 타고 조금 더 내려가, 골반 뼈를 툭 건드렸다.
아셰라드렌이 숨을 급히 들이쉬며 내 등허리와 한쪽 허벅지를 감싸듯 안았다. 서로의 몸이 꼭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아까부터 배어나오던 땀이 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진작에 술을 먹일 걸 그랬어.”
고개를 숙여 빗장뼈를 입술로 훑어내린 그가 중얼거렸다. 더운 숨이 피부에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나는 남자의 골반을 매만지던 손을 좀 더 옆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어깨를 비틀어 아셰라드렌의 입술을 밀어냈다.
“가만히 있으라고. 날 만지라고 한 적은 없잖아요.”
은빛 눈썹이 위로 솟았다 내려갔다. 아셰라드렌은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납작한 배의 아랫부분을 손끝으로 긁고, 맞닿은 몸을 살짝 들었다 다시 앉았다.
아셰라드렌이 양손으로 소파를 강하게 쥐었다.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은 그가 허리를 움찔거리며 뒤로 물렸다.
열이 잔뜩 몰린 머릿속이 뜨거웠다. 소파를 잡은 남자의 손등에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언제까지?”
“뭐가요.”
“언제까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퉁명스러운 대답에 남자가 한쪽 눈을 일그러뜨렸다. 아셰라드렌은 하얗고 붉었다. 벌어진 입술은 꼭 조금 전에 마신 와인의 색을 닮아 있었다.
“글쎄요, 설마 이 정도도 못 참는 건….”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 나는 그 기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분명 킬라하 마을까지 나를 찾아온 그가 부담스럽고 싫었는데.
아니, 싫기만 했던가. 사실은 반갑고 기쁘기도 했다. 어차피 이제는 아셰라드렌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도 없어. 우리를 갈라놓을 미래는 사라졌고, 그는 나를 운명의 반려라 여기고 있다.
이 이상 내가 그를 밀어내야 할 이유는….
“…참을게. 그러니까, 얼른.”
새빨간 입술을 벌려 내게 부탁해 오는 아셰라드렌은 조급했다. 커다란 손이 아직까지도 아랫배에 닿아 있는 내 손을 잡아챘다.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확실했다. 나는 그의 손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아셰라드렌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강렬한 시선에 온몸이 욱씬거리는 듯했다. 눈을 내리깔고,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치우려고 할 때였다.
펑!
“…뭐예요?”
구름 같은 연기에 눈을 감았다 떴다. 소파를 무너뜨릴 듯 육중한 무게의 늑대가 내 밑에 깔려 있었다. 새까만 코를 가진 하얀 털복숭이 짐승이 주둥이를 떼었다.
“끼잉.”
“말할 줄 알잖아요.”
마을에서 봤던 작은 덩치가 아니었다. 내 손바닥만 한 쫑긋한 귀를 가진 늠름한 늑대, 털이 보드랍고 따끈따끈한 아셰라드렌은 사람일 때와는 달리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긴장해서.”
그를 따라 덩달아 바닥으로 떨어진 나는 슬쩍 내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며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적극적이던 주제에, 정작 이렇게 분위기가 고조되던 순간에 변신해 버리다니.
“이렇게 커다란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셰라드렌의 털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면 이름 없는 성에서도 이런 식으로 갑자기 변해 버리고는 했었지.
그때 그 귀여웠던 새끼강아지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건가? 나는 과거의 그를 그리워하며 빳빳하게 솟은 늑대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으, 거긴 민감한데.”
“아, 미안해요. 늑대일 때도 그럴 수 있는지 몰랐어요.”
아셰라드렌은 두툼한 앞발을 모아 그 위에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보다 네 고양이 좀 봐. 갑자기 난리가 났는데.”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세나가 먼발치에 서서 털을 바짝 부풀리고 있었다. 놀란 듯 커다래진 동공에 옆으로 휘어진 귀, 세나는 난생처음 본 무서운 동물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둘이 친하게 지내요. 둘 다 동물이잖아.”
“말은 통하지 않지만.”
“아쉽네요. 이왕이면 그런 능력도 있으면 얼마나 좋아.”
“괴물로 변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
아셰라드렌은 괴물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알면서도 아까 그를 괴물이라 불렀다. 괜히 신경 쓰여 아셰라드렌을 살펴보자,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앞발로 조심스럽게 나를 낚아챘다.
“잠깐 눈 좀 붙여. 술도 깰 겸.”
“하지만 세나가….”
“내일부터 친하게 지낼 테니까.”
바닥은 딱딱했지만 바로 옆에 누운 아셰라드렌은 폭신했다. 게다가 따끈따끈하기까지.
다시는 그와 잠들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술 기운인지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멀쩡한 침대를 두고 바닥에서 뭐하는 거람.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도 나는 유혹적인 아셰라드렌의 품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의식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아셰라드렌은 세나가 그랬던 것처럼 제 커다란 머리를 내게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
“일어났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이불까지 덮고 누워 있었고, 아셰라드렌은 옆에 앉아 세나와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건데. 설마 세나가 아셰라드렌에게 꼬리를 내린 건가?
“…으, 머리가.”
왠지 모를 소외감에 세나를 향해 손을 뻗다, 이내 끙끙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작 두 모금 마신 와인에 숙취를 앓다니, 믿을 수 없었다.
“술에 약한 줄은 몰랐어. 하나 배웠네.”
“바깥 공기를 좀 마셔야겠어요.”
“그래, 같이 가지.”
“아뇨, 혼자.”
나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몸은 찌뿌둥하고 머리는 시큰거렸다. 그리고 아셰라드렌은 옅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혼자는 안 돼. 밖에 예니체 경도 없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설마 바다 한가운데서 뛰어내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예요. 예니체 경은 당신이 없을 때 나를 감시하는 역할이라도 맡았나요?”
아무래도 내 추측이 옳았던 모양이다. 아셰라드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를 다시 침대에 앉힌 뒤 무릎을 꿇고 구두를 신겨 주었다.
“일어나. 나가자면서.”
“나를 믿지 못해서 같이 가는 건지….”
“그럴 리가 있나.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아셰라드렌과 다퉈봤자 승산은 내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가 내민 팔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 봤자 아셰라드렌에게는 별 타격도 없는 것 같았지만.
“좋아, 그럼 손을 잡지.”
“아니, 잠깐…!”
그는 소년처럼 싱그럽게 웃으며 내 손을 낚아채 갔다. 만지지 말라는 말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인 게 분명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셰라드렌에게 이끌려 복도를 지나 갑판으로 나왔을 때, 나는 새삼 그가 이루어낸 것이 무엇인지 자각했다.
한밤 중에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그를 보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왕성을 떠나던 날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그리고 다프네 공녀님. 반갑습니다.”
기사들 중 하나가 나를 기묘한 호칭으로 불렀다. 별로 달갑지만은 않은 신분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러자 아셰라드렌은 이런 내 기분을 안다는 듯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굳이 공녀라는 말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어. 곧 있으면 다프네는 황후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