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언제부터 이런 거대한 배를 준비시키고, 마그나 항에서 대기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식당과 연결된 주방에 꽉 들어찬 식재료들이 나를 놀랍게 만들었다.
아셰라드렌은 돈이 넘쳐 나나 봐. 세나에게 먹일 삶은 고깃덩이들을 구해 오면서, 나는 이 배 안이 하나의 작은 나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나야, 이리 온.”
식당과 주방에서도 풋맨이며 일꾼들을 마주쳤고, 객실에 돌아오면서도 예니체 경을 다시 만났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선뜻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어쩌면 아셰라드렌이 미리 뭐라고 해 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나를 있는 듯 없는 듯 어색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예니체 경만큼은 뭔가 망설이는 기색이 보이긴 했다.
“다들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황제가 미쳐 있는 여자치고는 평범하다고?”
나는 작은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으로 고기를 잘게 찢었다. 냄새를 맡고 총총 달려온 세나가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팔에 머리를 계속해서 부딪혔다.
“냐앙. 냥.”
“알겠어, 빨리 달라는 거지?”
세나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평화였다. 나는 조그만 입으로 열심히 고기를 씹어 삼키는 세나를 바라보다 욕실에 들어가 손을 씻었다.
그런 뒤에는 다시 객실로 돌아왔지만, 아셰라드렌은 아직까지 부재중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나.”
어깨를 으쓱이며 객실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사흘간 사용했던 방보다 세 배는 넓어 보이는 공간이었다.
킬라하 마을에 있던 우리 집보다도 더 큰 것 같은데. 그러나 이 삭막한 공간 안에는 고양이가 찹찹 식사를 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세나야, 너 왜 이상한 아저씨를 따라왔어?”
“야앙?”
푹신한 벨벳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물으니 세나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 걸 방해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이라, 나는 간만에 입꼬리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래도 세나와 함께 돌아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인가. 그나저나 페터네 집에서는 고양이가 없어져서 난리가 나지는 않았을까.
“이상한 아저씨라니, 너무해. 난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다고.”
턱을 괸 채 멍하니 세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아셰라드렌이 들어와 입을 비죽거렸다. 그런 그의 양손에는 큼직한 접시 여러 개와 와인 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듣고 있었어요?”
“밖에서 다 들리던데.”
“방음이 별로네요. 부실 공사 아닌가요?”
“내 귀가 유난히 밝은 편이라는 걸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접시에는 파스타며 스테이크, 꽃잎이 뿌려진 디저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굶었던가. 갓 조리된 음식 냄새를 맡으니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예니체 경에게 들었어. 식당에 다녀왔다며.”
“세나가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그거야말로 이상하네. 데려온 뒤로 맛있는 고기만 잔뜩 먹여 줬는데.”
은근슬쩍 말을 놓는데도 그는 괘념치 않아 했다. 눈치채지 않은 건 아닐 텐데. 심지어 오히려 기뻐 보이기도 했다.
난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제멋대로 구는 그를 높은 사람으로 취급해 주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황제랍시고 제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남자를 말이다.
“세나를 데려오려거든, 페터에게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해야 했어요.”
“그 촌놈 어린애한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닌가? 질투가 나려고 하네.”
“…거기서 살 때 저를 얼마나 잘 챙겨 줬는데요. 당신… 아니, 폐하만 아니었어도.”
“난 당신도 아니고, 폐하도 아니야. 아셰, 라고 불러야지.”
아직까지도 호칭 문제 따위에 신경을 쓰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나는 그를 비웃듯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이런 내 행동을 지적하기는커녕, 어디선가 와인 잔 두 개를 가져와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다프네 옆에 앉을래.”
“싫어요.”
“응.”
분명히 싫다고 했을 텐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에 털썩 주저앉는 그를 힐끔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유치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엉덩이를 슬쩍 옮겨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아셰라드렌은 한술 더 뜨는 행각을 보였다. 와인 잔을 내려놓고선 내 옆에 더 달라붙어 앉은 것이다.
“오지 마요.”
“응.”
“오지 말라니까.”
“그러고 있어.”
“전혀 그러고 있지 않잖아요…!”
성질이 나서 몸을 떨며 외쳤다. 졸지에 소파 끄트머리에 앉은 나는 더 이상 옮겨 갈 곳도 없게 되었다.
그냥 일어서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아셰라드렌이 나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에 앉혔다.
“이게 무슨…!”
고개를 돌리자, 뻔뻔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천사 같은 미남이 앉아있다. 남자는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상체를 숙여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그 덕에 내 뺨이 그의 가슴에 눌렸다. 이 와중에 쓸데없이 콧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비누 냄새와 섞인 살냄새는 뭔지.
나는 끙끙거리며 아셰라드렌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손바닥에 감기는 가슴팍이 말랑하면서도 단단했다. 그러나 조금도, 아주 약간도 밀려나지 않았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여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눈만 들자 보이는 건 툭 튀어나온 울대뼈였다. 저길 한 대 치면 움찔하기라도 할까? 몰래 손날을 목 근처에 가져가려는 찰나였다.
“괜히 힘 빼지 말라니까. 이거나 먹어.”
나이프를 놓은 아셰라드렌이 불쑥 내 턱을 잡아 스테이크 조각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당황한 나는 육즙이 배어 나오는 고기를 씹지도 못하고, 쭉 펴고 있던 손을 내리지도 못했다.
“먹으라고. 이를 움직여서.”
“…….”
“아니면, 내가 씹어서 먹여 줄까?”
저런 징그러운 소리를 하는 게 정말로 아셰라드렌이 맞나. 그러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입 안의 음식물을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드는 것 하나 없는 상황과는 달리, 씹을 때마다 퍼져 나가는 고기의 향은 놀라웠다. 이 남자, 맨날 이런 것만 먹으면서 덩치를 불려댔나 보지?
나는 새하얀 셔츠에 가려진 두꺼운 팔을 노려보며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켰다. 얇은 천 자락 속에 숨겨진 근육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는지는, 이미 킬라하 마을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알아서 먹을게요. 내려 줘요.”
“여기서 먹어. 자꾸 떨어지려고 하면 화낼 거야.”
별로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고집을 부렸다간 또 어린애처럼 받아먹기만 할 게 분명했다.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그가 내미는 포크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예쁘게 썰어 놓은 아스파라거스 한 조각을 집었다. 아셰라드렌이 잘했다는 듯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까 보니까 배가 좀 말랐더라. 다른 데는 그래도 살이 있던데.”
“다, 다른 데라니. 어디가요?”
“말해 줄까? 꼭 생크림 같던데.”
나는 탄탄한 허벅지를 찰싹 때리고 신경질적으로 아스파라거스를 씹었다. 식사가 끝나면 내려 줄까, 허겁지겁 파스타며 고기를 입에 집어넣고 있으려니 그가 뒤에서 작게 웃었다.
참자, 참아야 한다.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던 나는 목이 막혀 컥컥거렸다. 아셰라드렌이 재빨리 새빨간 와인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좀 독할지도 몰라. 괜찮을지 모르겠다.”
“무, 물을 주면 되잖, 아요.”
“물은 여기 없는데. 고양이용밖에.”
그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세나의 물그릇을 가리켰다. 짜증 나, 진짜.
어쩔 수 없이 와인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자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사실 난 술을 별로 즐겨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 살 때는 술을 배급받은 적이 없었다. 킬라하 마을에서는, 페터네 할머니에게 맥주 한 모금 정도를 얻어 마신 것이 전부였다.
“으, 써…. 이런 걸 왜 마시는 건지.”
“술은 기분이 좋아지려고 마시는 거라던데. 어때?”
“…누가 그런 소릴 했어요?”
“밖에 있는 예니체 경이.”
예니체 경은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된 어린애한테 대체 어떤 지식을 가르쳤는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을 때면, 도수가 높은 술로 고통을 잊곤 했다던 로맨스 소설 남주인공의 대사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 예니체 경의 흉터를 봤던 탓인가? 얼굴 위로 열이 몰려, 나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더운 숨을 뱉어 냈다.
“이제 배불러요. 다 먹었으니까 내려 줘요.”
“얼마 먹지도 않아 놓고.”
“알아서 한다고요. 진짜.”
“…지금 성질부리는 건가?”
아셰라드렌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새삼, 분노가 치밀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렇게 잘난 남자가, 그것도 황제가, 심지어는 늑대로 변신하는 능력까지 가진, 초대왕 기르시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사람이, 나를 사랑해서 어디든지 쫓아다닌다니.
내 말 한마디에 전쟁을 일으키고, 이 세계의 주인공을 죽여 버리고, 나를 운명의 반려라 칭하는 데다 이렇게까지 달라붙어 있으려고 하다니.
“…굉장하다, 진짜.”
“그 진짜, 진짜거리는 말투는 술버릇이야? 귀엽다.”
“조용히 좀 해 봐요. 얼굴 감상하잖아.”
물론 목소리마저 감미롭고 듣기 좋긴 하지만. 어쨌든 방해는 방해였다. 아셰라드렌은 놀란 듯 입을 다물고 눈을 끔뻑거렸다.
강압적인 척 굴면서 이럴 때는 또 말을 참 잘 듣지. 나는 남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힘을 주어 눌렀다.
이렇게 뺨이 짓눌리는데도 눈부신 미모는 어딜 가지 않는다니,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하, 짜증 나. 진짜. 열 받으니까 일단 좀 벗어 봐요. 나도 당신을 자세히 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