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98)화 (97/123)

98화

침대에 다다른 그가 몸을 돌려 나를 껴안았다. 단단하고 묵직한 체구에서는 바닷바람을 오래 맞기라도 한 듯 소금 같은 냄새가 났다.

“좋아해, 다프네. 보고 싶었어.”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닐 테지. 나는 몸을 빳빳하게 굳히며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셰라드렌은 내 등을 쓸어내리며 어떻게든 나와 더 가까이 붙으려고 했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는 걸 알아. 당연히 화가 나겠지. 하지만 네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거다.”

“그걸… 변명이라고.”

“네가 두려워하던 미래는 이제 없어. 내가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또 나를 떠나려 했지?”

“…왕성에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가 실비아를 잃고, 남들의 눈총에 괴로워하던 시절, 아셰라드렌은 그에게 기대를 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행복했겠지.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데. 하지만 나는 외로웠다. 내가 왕성에 남아 있던 이유는 아셰라드렌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는 딱히 내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아 보여서.

이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에요.”

“만들어 줄게.”

“제발, 그냥 나를 놓아주면 안 되나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다프네가 알려 줬잖아. 운명의 반려라는 거.”

그가 나를 떼어 놓고 말했다. 아셰라드렌은 침대에 먼저 앉아 제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연인처럼 바짝 붙어 앉길 원하는 듯했다.

나는 그런 그를 못 본 체하고 물었다.

“그래서요?”

“그게 너야. 나의 반려.”

“…대체 뭘 근거로.”

“내가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근거로.”

남자가 불쑥 앞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아 제 앞에 앉혔다. 나는 그에게 닿지 않으려 등허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가 짜증스러운 숨을 뱉어 내더니 아예 나를 안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바르작대지도 못하게 긴 다리로 나를 꽁꽁 묶어 버리기까지 하면서.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제 더는 놓칠 일 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당신의 반려였다면, 내가 떠났을 때 당신은 이미….”

“죽었어야 했다고? 죽지는 않았지만, 죽을 만큼 힘들기는 했어.”

나는 킬라하 마을에서 갑자기 코피를 흘려 대던 그를 떠올렸다. 아셰라드렌은 정말로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건가? 그저 유년 시절에 대한 집착인 게 아니라?

나는 아셰라드렌이 미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비록 나를 붙잡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이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해도, 그가 불행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정말로 내가 필요해요?”

“여태까지 한 얘기를 뭐로 들은 거야.”

등 뒤에 있던 그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움찔 어깨를 떨며 애꿎은 이불을 세게 그러쥐었다.

“사과해요. 왕성에서 나를 홀로 내버려 둔 것, 멋대로 나를 쫓아온 것, 할머니를… 이용해서까지 나를 속여 먹은 것도.”

“미안해.”

“…열받아.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라는 게 아니라고요.”

이 한마디로 화해를 하기엔 내가 받은 상처들이 너무 크고 깊다. 나는 허리에 얹혀 있는 그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 냈다.

아셰라드렌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가 싶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까칠하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아.”

“으, 왜 이래요.”

“다프네가 나를 자꾸 자극하잖아. 안 그래도 참기 힘들었는데.”

객실 문을 향해 모로 누워 있던 내 위로 아셰라드렌이 올라탔다. 무겁다고 불평할까 싶던 찰나에 고개가 천장으로 돌아갔다.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지분거리고, 안달이 난 듯 쇄골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려 댔다.

남자와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열감이 퍼져 나갔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상대방의 귀에도 다 들릴까 싶었다.

싫은데, 난 그가 너무 미운데.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아셰라드렌을 밀어내기가 어려워서.

“싫어?”

“…….”

“난, 다프네를 자세히 보고 싶은데.”

“뭐, 뭘 보겠다는.”

“어린애도 아니고, 뭘 그런 걸 묻지.”

남자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여전히 어두운 방 안에서, 그가 내 앞섶에 달려 있던 단추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끈적한 시선과는 다르게 서툰 손길이었다.

손가락이 몇 번이고 빗나가 맨살을 더듬기도 했고, 그에게 단 한 번도 닿은 적 없던 부위를 스치기도 했다.

숨이 가빠져 왔다. 몸 한가운데에서 불이 지펴지는 듯했다. 더워, 숨 막혀. 킬라하 마을에서도 만져진 적 없던 부분들을 보랏빛 눈동자가 노골적으로 훑어 내리고 있었다.

“예뻐. 다프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부끄러우니까 그만 말해요.”

그리고 난 이렇게 해도 된다고 허락한 적도 없는데. 황제면 다인가. 죄다 제멋대로야. 나는 벌어진 옷자락을 가리려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이 곧바로 손깍지를 끼는 바람에, 이도 저도 못 하는 그림이 되어 버렸다. 붉게 달아오른 귀,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강렬한 눈동자.

아셰라드렌은 고개를 숙여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고는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말캉한 살점을 빨아 당겼다.

“아…!”

“냄새가 좋아. 부드럽고, 말랑하고… 사랑스러워.”

“무거워요. 답답하다고요.”

“…응.”

아셰라드렌의 귀에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는 진득하게 내 살을 빨아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열꽃이 피어나듯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붉은 자국이 생겨 나갔다. 나의 투덜거림을 완벽하게 무시한 그가 아래로, 조금 더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그러다 꽉 묶은 허리끈이 거슬렸는지 리본 사이에 기다란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어차피 갈아입어야 하잖아. 그렇지?”

“아, 아닌데.”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줄게. 음.”

장난스레 웃은 그가 허리끈을 풀었다. 다른 손은 이미 종아리를 덮고 있는 실크 스타킹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스르륵 내려와 내 발목을 감싸 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나는 허리를 들썩거리며 발버둥을 치려 했다.

“폐하,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남자의 손이 다시금 종아리를 타고 슬금슬금 올라올 때였다. 나는 움찔 놀라 정신없이 앞섶을 가렸다.

문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예니체 경의 것이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 살았던 순수한 시절, 우리와 함께했던 검은 머리의 기사님.

“그런데 잠시 나와 확인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마그나 항의 영주가….”

“기다려.”

쯧. 아셰라드렌이 짧게 혀를 차고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올린 그가 아래에 깔려 있던 이불로 나를 꽁꽁 감쌌다.

“다프네도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시 올 테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멋대로 만지기나 하고.”

남자와 거리가 벌어지자 나는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투덜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작게 웃으며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또 입을 맞추려고 하는 건가. 나는 재빨리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아셰라드렌이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놓아주었다.

“다프네는 내가 또 피를 흘렸으면 좋겠나 봐.”

“그게 아니라….”

슬금슬금 이불을 내려 보니 아셰라드렌은 이미 문가로 향하고 있었다. 풀어진 크라바트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그는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희미한 대화 소리. 그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자,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객실 한편에 있던 전신 거울에 다가섰다.

부스스해진 갈색 머리에 턱 아래에서부터 윗배까지 이어진 울긋불긋한 자국들. 나는 그것들을 가리기 위해 다시 허리끈을 묶고 단추를 채워 나갔다.

“냐앙.”

마지막으로 구겨진 치맛자락까지 정리하고 있으려니 세나가 다가와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이건 배가 고프다는 뜻인데, 설마 여태까지 제대로 먹이지 않은 건 아니겠지.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세나를 쓰다듬다 이내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어딘가에 식당이 있겠지. 세나가 먹을 만한 음식을 구해 와야겠다.

“…어?”

세나를 내려놓고 객실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예니체 경을 발견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당연히 그가 아셰라드렌과 함께 어딘가로 간 줄 알았는데.

“오랜만이네요, 다프네 양.”

“그 오랜만이라는 말, 이젠 지겨울 정도네요.”

그리고 사실 그렇게까지 오랜만은 아니잖아. 내가 왕성을 떠날 적에, 예니체 경도 합심해 나를 속였었지.

나는 아셰라드렌을 아직 용서하지 않았듯, 예니체 경에게도 앙금이 남아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 말도 지겨워요.”

나와 시선이 마주친 예니체 경이 난감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얼굴 살이 빠졌는데도 근육은 더 붙었는지 전에 봤을 때보다 묘하게 두꺼워 보였다.

예니체 경 역시 아셰라드렌과 함께 전쟁에 나갔을까. 그러고 보니 제복으로 가려진 목 부근에 전에 본 적 없던 흉터가 하나 늘어나 있었다.

“그… 다쳤어요?”

“네, 전쟁터에서.”

“그러셨구나. 그런데 여기 식당은 어디에 있어요?”

예니체 경의 직업은 기사였다. 부상을 당하는 건 예삿일이겠지. 아셰라드렌에게 고운 말이 나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니체 경에게도 나는 별로 친절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예니체 경은 내 반응에 퍽 당황한 모양이었다. 짙은 눈썹을 일그러뜨린 그가 복도의 왼쪽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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