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이러지 말아요. 제발.”
나는 등 뒤의 남자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몸을 비틀었다. 내가 그에게 잡히기까지 마치 모든 것이 정해진 수순인 듯 자연스러웠다.
여기까지 나를 쫓아왔다는 건, 영원히 나를 놓아줄 마음이 없다는 뜻이겠지. 혹시나 하는 희망에 걸었던 내 기대는 파스스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뭘 이러지 마? 다프네, 나를 좀 봐.”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나를 떨게 만들었다. 어쩜 이렇게 제멋대로일 수가 있지. 나는 남자를 무시하고 인파 사이로 걸어오는 할머니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지금 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쩌면 나보다도 더 놀랄지도 모른다.
[할머니! 저 여기에 있….]
“원하신 대로 그 아이를 제 양녀로 삼았습니다. 약속을 지켜 주세요.”
그러나 할머니가 누구보다 유창하게 레르베 라예트의 언어로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내 앞에 선 할머니의 시선은 내가 아닌 곳을 향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또 이렇게 나를 속일 수는 없는 거야.
“물론이다. 부인께서는 이 길로 공작령으로 돌아가 봐. 사랑스러운 손녀가 부인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급히 등을 돌렸다. 내 쪽으로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메이드 중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 입양 서류입니다. 폐하께서 가지고 계시는 게 좋을 듯하여.”
“이건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시르시안이 서류를 건네받기가 무섭게 메이드는 할머니를 쫓아 사라졌다. 뭐지? 이게 뭐지?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나는 허망하게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미안해. 일부러 속인 건 아니야.”
“…….”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너를 내 옆에 두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남자가 또다시 속삭였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나를 잡아 준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더 이상 누구도 너를 함부로 하지 못해. 넌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잖아?”
“…….”
“그러니까 나랑 돌아가자. 응? 다프네.”
미친놈.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귀가 밝은 남자는 그 소리를 용케 알아듣고는 되려 웃음 지었다.
“맞아. 난 너한테 미쳤어.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남자가 나를 돌려세웠다. 초점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 시야에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이 보였다. 아셰라드렌은 미동도 하지 않는 나를 공주님을 대하듯 번쩍 안아 들었다.
“뱃멀미를 따로 하지는 않았지? 레르베 라예트까지 가려면 또 배를 타야 하거든.”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배에 타서 알려 줄게.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에게 안겨 있는 몸을 비틀려 했지만 하찮은 몸부림 따위가 그에게 통할 리는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힘을 빼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지.
아셰라드렌은 행복한 듯 웃고 있었으나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게 뭐야. 머릿속에는 그 한마디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주 많이, 그리고 오래, 다프네를 기다려 줬다고 생각해. 그러니 쓸데없는 반항은 여기서 그만 끝내도록 하자.”
그가 나를 데리고 새로운 배에 올랐다. 갑판 위에는 살이 조금 빠진 듯한 예니체 경이 있었다. 재회는 언제나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니체 경을 본체만체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신이 이런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 정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 생에서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당신에게 정성을 쏟았던가?
그러나 돌아온 대가는 족쇄를 찬 것과도 같은 여생이었다.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를 너무 나쁘게만 보지는 말아. 다프네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는데.”
아셰라드렌이 갑판을 가로질렀다. 양옆으로 서 있는 수많은 기사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인사를 받아들이며 객실로 들어갔다.
“야앙.”
우리 둘밖에 없는 넓은 공간에서도 아셰라드렌을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저 멀거니 바닥만 내려다보던 나는 때마침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큼직한 침대에 검은 고양이 세나가 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나를 알아본 듯 침대에서 뛰어내려 달려왔다.
“세, 세나야.”
“냐앙.”
그제야 시르시안이 말했던 작은 선물의 정체를 눈치챘다. 세나를 데리러 가기 위해 킬라하 마을에 돌아가려 했건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나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 말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셰라드렌이 나를 내려 주었다.
“…세나가 왜 여기에 있어요? 혹시 페터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그냥 집이 비어 있을 때 조용히 가서 데려온 게 전부인데.”
“할머니는….”
“어느 할머니?”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세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셰라드렌이 느긋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공작 부인을 말하는 건가? 앞으로 볼 일은 없을 텐데. 부인께서는 애지중지 아끼는 ‘진짜 손녀’와 떨어지지 않으려 할 테니까.”
“‘진짜 손녀’라는 게 무슨 뜻이죠? 대체 어디서부터 나를 속인 건가요?”
“…전쟁 중에.”
정장을 차려입고 있던 아셰라드렌은 목을 죄는 크라바트가 불편한지 옷깃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로잡힌 포로 중 하나가 부인의 손녀였어. 다프네와 많이 닮아 있었지. 그걸 보고 난…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다. 네가 만약 귀족의 딸이었다면, 하고.”
“그래서 부인을 협박했나요? 나를 공작가의 일원으로 만들어 준다면, 손녀분을 풀어 주겠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할머니가 내게 들려준 그녀의 이야기는 전부 뭐란 말인가.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녀의 딸이 죽은 건 사실인가? 손녀도 태어났던 날에 같이 죽었다면서. 내가 진짜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할머니가 분명히….
“잔인, 하시네요.”
난생처음으로 가족이 생기는 줄 알았다. 할머니와 매일 같이 산책을 하고, 십자수를 배우고, 수다를 떨고 함께 여행을 할 줄 알았다.
속았어. 할머니가 내게 보여 준 친절과 상냥함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제 더는 누군가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안해. 나는 바보라서, 이런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네가 자꾸 사라지는 바람에 마음이 급했던 것도 있고….”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잡아 두려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첫사랑?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에요.”
아셰라드렌과 헤어졌다 만난 지금까지, 우리 사이의 공백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나를 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만 생각했던 내가 지나치게 안일했던 걸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었다. 이따위 건 집착에 불과했다.
“말했잖아. 내가 살기 위해선 네가 필요하다고.”
“무슨 억지….”
화가 나서 소리를 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아셰라드렌이 몸을 굽혀 앉아 내 턱을 감싸 쥐었다.
놀란 고양이는 무릎에서 뛰어내려 어디론가 달려갔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보랏빛 눈동자와 피부에 닿는 뜨거운 숨결.
아셰라드렌은 거침없이 내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놓은 그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봐, 이렇게 몸이 반응하는데.”
서늘한 바닥이 온몸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미약한 웃음기와 함께 내 뺨을 쓸어내리고,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이 목덜미를 단단히 받쳤다. 고개를 비튼 그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남자는 멋대로 내 안을 헤집어 놓으며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남자가 만족하기만을 기다릴 뿐.
“…눈 떠.”
그러자 아셰라드렌이 입술을 떼고 처음으로 내게 명령했다.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나를 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남자는 내 자유를 빼앗고 나를 기만했다. 행복했던 시절은 이제 모두 끝났어. 이대로 왕성에 돌아간다면, 나는….
“우리는 부부가 될 거야. 다프네 공녀.”
아셰라드렌이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세상에 어느 황제가 메이드와 결혼을 한다고. 나는 그를 비웃기 위해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아셰라드렌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질척하고 뜨거웠다.
당신은 짐승이 아니라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분이라고, 그 언젠가 남자에게 속삭여 주었던 적이 있었건만.
“…괴물 같아.”
“그런 말 자주 들어.”
상처 주기 위해 뱉어 낸 말에도 아셰라드렌은 담담했다. 어느새 테이블에 올라간 고양이는 우리에게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해가 구름에 가려졌는지 갑자기 방 안이 어두워졌다. 할머니는 지금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배를 탔을까.
시르시안은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나는 매번 이렇게 바보 취급을 당하고, 아셰라드렌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건들지 말아요. 나 이제 당신이 싫어졌어.”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는데.”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리려 했지만, 그마저도 아셰라드렌에게 저지당했다. 남자는 내 손을 잡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나를 일으켜 세웠다.
“침대로 가자.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만큼 붙어 있고 싶으니까.”
죄수처럼 그에게 끌려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를 바라보는 아셰라드렌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기도 했다.
대체 어째서? 나는 허, 하고 코웃음을 쳤다. 울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