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이 목걸이는 아무래도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죠?]
시르시안은 줄이 얇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그러더니 기대감에 가득 차 있는 할머니를 슬쩍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게다가 가만 보니 다프네 양은 어제부터 계속 같은 목걸이를 착용하고 계시고.]
[…어제도 오늘도 푸른색 계열 옷을 입어서 그래요. 저도 다른 목걸이를 여럿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요? 하지만 부인께서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필요 없다고 한사코 고개를 저어도, 시르시안과 할머니는 이미 한통속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저를 응원하는 것을 눈빛으로 읽어 낸 그가 드르륵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예전부터 저 남자는 나이가 지긋한 여자들의 호감을 간단히 사고는 했었지. 나는 목에 힘을 빳빳이 준 채 내 뒤에 선 그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
나는 침묵했다. 시르시안의 투박한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 불쾌하고 답답했다. 이 세상이 꼭 무대 같았고, 나는 막에 오른 인형처럼 느껴졌다.
그 언젠가 이름 없는 성에서 지냈을 때는, 내가 아셰라드렌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한 적 없었는데.
[와, 역시 잘 어울리네요. 처음 봤을 때부터 미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르시안은 기어이 내 목걸이를 벗겨 저가 얻어 낸 에메랄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러고는 감탄하는 척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세스나에서는 상대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사랑 고백으로 여겨진답니다.]
할머니는 우리를 흐뭇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도 이런 대목이 있었던 것 같다.
레티스를 처음 본 리카르도가 ‘…예쁘군.’ 하고 한마디를 던지자, 그의 부하들이 레티스를 두고 미래의 황후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던 부분이.
하지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람. 레티스도 리카르도도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데.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질 때마다 딴 생각을 하게 되는 버릇은 영원히 고쳐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봐서라도 억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잘 어울린다고 하니 기쁘네요.]
[그나저나, 나는 아까부터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구나.]
[많이 아프세요? 객실까지 모셔다드릴까요?]
할머니가 갑자기 머리를 짚기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할머니는 괜찮다며 나를 다시 앉히려 했다.
[아니야. 다프네는 여기 있거라. 이봐요, 삼등실에 가서 내 메이드들을 좀 불러 줘요.]
할머니의 지시를 들은 승무원이 고개를 숙였다. 챙겨 줄 사람들을 따로 데리고 다니셨구나. 다행이었다.
[신사분이 적적해하실 테니 같이 있어 드리렴. 어차피 둘이 저녁도 함께해야 하지 않니?]
[할머니도 같이 드시면 안 되나요? 셋이서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렇게 두통이 있을 땐 약을 먹어도 밤까지 계속 아프거든. 오늘은 이만 일찍 들어가도록 하마.]
정말로 아프신 게 맞나. 설마 나랑 시르시안만 남겨 두려고 자리를 피하시는 건 아닌지.
나는 걱정스레 할머니의 안색을 살폈다. 기분 탓일까, 낯빛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함께하셨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 되었군요.]
시르시안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잠시 후, 깔끔한 옷차림의 여자 둘이 플레이 룸에 나타났다.
[저기 메이드들이 왔구나. 그럼 두 사람은, 나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아요.]
할머니가 자리를 뜨자, 룸 안에는 나와 시르시안, 그리고 다른 테이블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손님 여럿이 남게 되었다.
시르시안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네요. 어릴 적에 데하힐 왕국의 언어를 잠시 배우긴 했었지만, 거의 다 잊어버리는 바람에 계속 애를 먹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있던 약 1여 년간의 공백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였다.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분이 보내셨나요?”
“그분이라…. 다프네 양은 폐하를 좀 더 친근한 방식으로 불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제는 아니에요. 그분께도 말씀드렸다고요. 이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이인데, 왜 자꾸….”
“글쎄요.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지요.”
매번 이런 식이지.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머리가 좀 아픈 것 같네요. 그만 가서 쉬어야겠어요.”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저녁에 식당에서 보는 걸로 할까요?”
스스로도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대꾸를 하지 않고 플레이 룸을 나섰다. 불행 중 다행히도 시르시안은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압박감과 스트레스. 나는 그 불안정한 감정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가장 먼저 목걸이부터 풀어 내렸다. 그러고는 침대에 풀썩 엎드려 눈을 감아 버렸다.
즐거운 여행이 될 줄 알았는데.
“으으….”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사위는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큰일이었다. 시르시안과 저녁을 먹기로 했건만.
“하지만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일부러 가지 않은 것도 아니고, 간밤에 잠을 설친 탓에 그런 건데 뭐. 나는 하품을 하며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출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식당에 가면 분명 시르시안이 아직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이제 하루 남았나.”
내일 오후쯤이면 배는 마그나의 선착장에 도착할 것이다. 그 후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할머니가 바라는 대로 그녀를 따라간다 해도, 근처에 시르시안이 있다면 난 조금도 휴가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 전에 시르시안이 나를 발견한 이상, 나는 이미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결국 아셰라드렌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그의 사랑만으로는 도저히 버텨 낼 수 없는 그 장소에, 주변 귀족들의 무시와 냉대를 견뎌 가면서.
꼭 그렇게 살아가야 하나?
왕성에서의 나날들이 떠오르자 갑자기 배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싫어하는데, 아셰라드렌은 왜….
밤이 깊어 갈수록 생각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는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집착당하는 내용들을 그렇게나 좋아했었는데, 막상 내가 경험해 보니 이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괜한 사람을 건드려서.”
나는 몇 번이고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남은 밤은 뜬눈으로 지새울 듯했다.
⋆★⋆
입맛도 없고 기분도 저조해서, 아침이 되었는데도 나는 식당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상념에 잠겨 목욕을 하고 어두운 색 드레스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배가 마그나에 도착할 때까지는 앞으로 여섯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슬슬 짐 가방을 다시 꾸려야 할 시간이었다.
[다프네, 안에 있니?]
가방을 정리하고 소파에 멀거니 앉아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가를 두드렸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갑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할머니와 동행하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나야 푹 쉬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졌지. 그보다 식당에 나오질 않았더구나.]
나는 문을 열어 할머니를 안으로 들였다. 지팡이를 짚은 그녀는 오늘도 알이 굵은 보석 반지들을 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종류들이 모두 어제 봤던 것들과는 달라, 새삼 나는 할머니가 얼마나 부유한 귀부인인지 자각하고 말았다.
…솔직히 부러웠다. 공작 부인쯤 되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텐데.
[늦잠을 잤거든요. 이제야 정신을 차렸어요.]
[그런 것치고는 눈 밑이 거뭇한데.]
사실 밤에는 결국 눈을 붙이지 못했다. 뜨끔한 나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소파에 앉은 할머니는 잠시 창으로 보이는 바다에 시선을 두었다.
[자연이란 참 신비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어도, 저 바다는 여전히 고요하고 잔잔할 테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슬프잖아요.]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나는 할머니의 곁으로 다가가 앉아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나를 친근하게 여겨 주시니 이 정도 무례는 범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늘어놓았다.
[참 이상한 일이지. 고작 사흘 전에 알게 된 네가, 진심으로 내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말씀만으로도 기뻐요. 저도 할머니가 제 진짜 할머니였으면 좋겠어요.]
처음에 나는 할머니에게 장단을 맞춰 주려 노력했다. 다만 이젠 나 역시도 진심이 되어 가는 듯했다.
[정말이니? 그렇다면 다프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늙은이의 진짜 손녀가 되어 주겠어?]
그러나 할머니만큼 진지하지는 않았었나 보다. 수줍게 손가방에서 입양 서류를 꺼내는 할머니를 마주 보며,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류의 맨 아랫부분에는 이미 할머니의 이름과 작위가, 그러니까 ‘페네이라 르테미아 공작 부인’이라는 서명이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