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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94)화 (93/123)

94화

나는 빠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노부인에게 말했다.

[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래? 방금 저 남자분을 뭐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노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우리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방향을 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르시안과 멀어졌다.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요. 착각을 했나 봐요.]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랑? 갑자기 과거가 궁금해지는걸.]

노부인의 장난스러운 말에 씁쓸한 미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역시 감시당하고 있구나. 이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아셰라드렌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저… 부인,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갈까요? 너무 춥네요.]

[그럴까? 그런데 다프네도 나를 할머니라 불러도 좋아. 우린 꽤 닮았으니, 남들이 보면 분명 가족이라 생각할 게야.]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망설였다. 왕성에서 받았던 대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가 감히 그래도 될까요? 여태까지 말씀 못 드렸지만, 저는 평민이에요. 공작 부인께 제가 어떻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 나도 젊었을 적에야 귀족이니 뭐니 하며 따져 댔지, 다 늙어서는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더구나.]

다정한 말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노부인은 처음 본 내게 끊임없는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어째선진 모르겠으나, 왕성을 나오면서부터 내게는 좋은 사람들만 다가오는 듯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는 더욱더 왕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데 시르시안이라니! 시르시안이 이 배에 타고 있다니!

[내일 아침도 같이 하지 않으실래요? 음… 할머니?]

[나야 좋지! 그런데 다프네는 마그나에서 어디 머물 예정일까?]

[아직 숙소는 정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나와 같은 호텔에 가지 않으련? 좋은 곳을 알고 있단다.]

설마 호텔 비용까지 내주시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도 돈은 있는데. 물론 그 돈도 다 아셰라드렌에게 받은 거긴 하지만.

[벌써 내 객실에 도착했네. 같이 카드 게임이라도 하고 싶지만, 늙은이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해서.]

[저도 오늘은 일찍 자려고 해요. 그리고 카드 게임이라면 내일도 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갑판에서 내려와 복도를 걸었다. 페네이라 할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해 열쇠를 꺼냈다. 나는 그녀가 객실에 들어가는 것을 배웅해 준 뒤, 한숨을 쉬며 내 방을 찾아갔다.

공작 부인과 인연을 맺게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시르시안과 마주친 탓에 오히려 불안감만 커져 버렸다. 이 배에 탄 목적이 뭐냐고 묻는 편이 나았을까.

아니다,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시르시안이 정말로 우연히, 휴가를 위해 마그나로 향할 리는 없었다. 레르베 라예트 근처에도 여행지는 충분히 많이 있는데.

“…모르겠다, 난.”

아셰라드렌이 나를 잡기 위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준비했는지, 언제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이런 식이라면 내게 승산은 전혀 없었다. 난, 그저 그가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었는데.

이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아셰라드렌이 곁에 있으면 어떻게 하지. 꼼짝없이 왕성으로 끌려가야 하나.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어느새 새까매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에 놓인 와인을 발견해 홀린 듯이 다가섰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해, 실비아.”

나만 살자고 떠난 것이 문제였나. 실비아와 레티스를 잃고서 진실을 밝혀내지도 못하고 혼자라도 살아 보겠다고 도망친 것이.

만약 정말 부득이하게 왕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기필코 이번에는 그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고야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와인을 홀짝이며 구름에 가려진 흐릿한 달을 노려보았다.

언제까지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다음 날 아침, 깊이 잠들지 못한 나는 햇살이 침대를 비추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비싼 값을 치른 만큼 침구는 완벽했고, 객실 안은 따스했건만.

“역시 문제는 나인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나는 몸을 씻고 단정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페네이라 할머니가 이미 식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자리가 많이 비어 있으니 편하신 대로 앉아 주세요.]

웨이터는 어제저녁에 나를 안내해 주었던 그 남자 그대로였다.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테이블이 죄다 텅텅 비어 있었다.

[다프네! 여기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페네이라 할머니는 이미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 걸리는 점은, 할머니의 근처 테이블에 시르시안이 앉아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아침부터 반듯한 셔츠를 입은 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마치 내가 온 것은 꿈에도 모르는 것처럼.

[…벌써 아침을 드신 거예요? 빠르시기도 하지.]

[간단하게 쿠키만 좀 먹었지. 저녁을 든든하게 먹었더니 배가 고프지 않더라고.]

할머니는 시르시안의 존재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도 그를 힐끔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걸 다 먹으면 플레이 룸으로 가서 어제 하지 못했던 카드 게임이라도 하자꾸나.]

내 몫으로 나온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확인한 그녀가 제안했다. 바다 위에서 고립된 상태라는 특이성 탓인지, 나와 할머니는 놀랄 만큼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나보다는 페네이라 할머니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덥석 잡기도 하고, 항구에서 산 초콜릿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식사를 마쳤다. 내가 할머니와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기다렸다는 듯 시르시안이 웨이터를 불러 영수증을 부탁했다.

[카드 게임은 많이 해 봤니?]

[아뇨, 몇 번 안 해 봤어요.]

나는 시르시안을 외면하려 애를 써야만 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며 할머니에게 집중하려 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할머니는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마침 지나가던 귀족 하나가 나와 할머니를 보더니,

[손녀와 사이좋게 여행이라도 하시나 봅니다.]

라고 인사해 할머니를 기쁘게 한 덕이 컸다.

[네가 정말로 내 손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이미 진짜 손녀처럼 저를 대해 주시고 있잖아요. 여행길이 적적할 줄 알았는데, 할머니를 알게 돼서 너무 행복해요.]

나는 할머니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할머니가 없었다면 시르시안 때문에 배에 타고 있는 내내 골머리를 앓을 게 뻔했다.

어느덧 플레이 룸에 도착한 우리는 빨간 천이 씌워진 테이블에 앉았다.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했으므로, 내가 대신 카드를 골라 오기로 했다.

[푸른색 카드로 가져와라. 난 그 브랜드가 좋더구나.]

[네, 할머니. 잠시만요.]

그렇게 내가 구석에 놓여 있는 카드를 가지러 갔다 왔을 때였다. 아슬아슬했던 나의 신경을 폭발시켜 버릴 만한 상황이 기어코 벌어졌다.

[세스나의 카드 게임은 해 본 적이 없어서요.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래요? 딱히 가르쳐 드릴 만한 것도 없는데.]

갑판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오는 듯했던 시르시안이 결국엔 할머니의 옆에 앉아 버린 것이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카드를 세게 쥐었다.

시르시안은 예전에 내가 자주 봤던 모습 그대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어서 앉으렴, 다프네. 여기 이 신사분이랑 인사하고.]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어제 갑판에서 뵈었었죠?]

천연덕스럽기는.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할머니는 또래로 보이는 나와 시르시안을 서로 소개시켜 주기 바빴다.

[다프네와 같은 레르베 라예트 제국 출신이라더구나. 어제 이분이 아는 사람이랑 닮았다고 했었지? 제국에서는 이런 얼굴이 흔하니?]

[제 얼굴이 흔한 인상은 아니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요. 너무하십니다, 부인.]

시르시안은 가벼운 농담을 던져 할머니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속은 뒤집히는 듯했지만 말이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시르시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내게 찻잔을 밀어 주었다.

[다프네 양도 세스나의 카드 게임은 처음이겠지요? 우리 같이 부인께 배워 봅시다.]

[…네.]

어젯밤에 시르시안에게 가서 아는 척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편이 좋았을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만.

[규칙이 꽤 복잡하니 자세히 봐 두도록 해요. 그전에 무언가를 걸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는 이 금화를 걸지요. 레르베 라예트에서 예전에 사용되었던 돈입니다.]

할머니의 제안에 시르시안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아셰라드렌에게 받은 금화였다. 저 자식, 전에 전부 다 챙겨 넣었다고 했으면서.

[그럼 나는 이 에메랄드 목걸이를 걸지.]

할머니는 어제 내게 주려고 했던 목걸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나는 뭘 준비하는 게 좋을지.

[저는 딱히 상품으로 내걸 만한 게 없는데요.]

목걸이는 이미 할머니가 내놓았으니 좀 그렇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시르시안이 금갈색 눈을 장난스럽게 휘었다.

[제가 이기면 다프네 양의 저녁을 사도록 하지요.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나는 어이가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소녀처럼 뺨을 붉히며 깔깔거렸다.

[이 신사분이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뭐 어떠니, 다프네. 어차피 재미로 하는 건데.]

그러나 그렇게 재미로 시작된 게임을, 시르시안이 첫판부터 바로 이겨 버릴 거라고는 할머니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에메랄드 목걸이를, 내게는 저녁 시간을 선물 받은 시르시안은 의기양양하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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