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93)화 (92/123)

93화

[다프네 님께서 사용하실 객실입니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짐을 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앞으로 3일간, 나는 이 거대한 배에 몸을 맡길 것이다.

“일단은… 저녁부터.”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식당에 가서 입을 드레스를 골랐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는 이미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잔잔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자니, 며칠간 겪었던 일들이 꼭 한바탕 꿈이라도 꾼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나는 마그나에서 잠시만 숨을 죽이고 있다가 킬라하 마을에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나를 찾아….

“다시 살 곳을 알아보는 게 좋겠지.”

아셰라드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페터와 할머니와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었지만, 킬라하 마을에서 계속 지내다간 내 마음이 영 놓이지 않을 것 같으니까.

가족이 없다는 건 이럴 때 좋았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훌쩍 떠나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어깨선이 드러나는 남색 드레스를 입은 나는 은색 구두에 발을 집어넣었다. 허리까지 기른 머리는 한쪽으로 넘기고, 립스틱을 사용해 입술과 뺨을 붉게 물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따로 자리를 예약하셨습니까?!]

예쁘게 차려입는 건 기분 전환에 꽤나 도움이 된다. 나는 웨이터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드레스의 색깔과 잘 어우러졌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내가 울적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스스로 되뇌며, 나는 웨이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녁 식사를 하러 오신 손님이 많아, 우선은 잠시 대기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합석도 괜찮으시다면 바로 입장하실 수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느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건가요?!]

[저기 창가에, 혼자 앉아 계신 노부인이 보이시는지요?]

[자리가 좋네요. 합석하도록 할게요.]

휴양지로 가는 배편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많았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자리가 부족한 것은 그 때문인 듯했다.

어린 나이에 보석이 달린 크라바트를 차려입은 아이들과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부인들, 그리고 그들의 남편들까지.

일등실 식당의 내부에서는 우아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웨이터는 나를 창가 자리로 데려갔다. 나는 웨이터가 빼 준 의자에 앉으며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그러자 생선 살을 발라 먹고 있던 노부인이 고개를 들어 방긋 웃었다. 그녀는 흰 머리가 섞인 갈색의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

[나처럼 혼자 다니는 아가씨가 있다길래 합석을 허락했지. 어서 앉으시우.]

[감사해요. 한참 기다릴 뻔했는데, 덕분에 이렇게 앉을 수 있게 되었네요.]

노부인의 억양이 독특했다. 나처럼 외국인인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페터가 갈색 머리는 세스나 제국에서 흔한 색깔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레르베 라예트 왕국에서도 갈색 머리는 종종 볼 수 있었다.

[여긴 관자 수프가 맛이 좋지. 스테이크도 나쁘지는 않은데, 생선 요리가 일품이야.]

[그럼 저도 그렇게 시킬까 봐요. 추천해 주신대로요.]

나는 웨이터에게 메뉴를 주문한 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노부인은 아예 포크를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이 진 눈가에 피부는 하얗고, 눈동자는 나처럼 초록색이었다. 내게 할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페터네 할머니와도 곧잘 어울렸던 나는 이 노부인이 금방 마음에 들었다.

[아가씨는 이름이 뭔가? 말투를 보아하니 나처럼 데하힐 왕국 출신은 아닌 모양이야.]

[다프네예요. 레르베 라예트에서 왔어요.]

[아아…. 그 나라는 내게 별로 인식이 좋지 못한데. 난 세스나 제국에서 왔거든. 아니, 이제는 왕국이지.]

[죄송해요. 하지만 전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나라를 떠나서….]

전쟁을 일으킨 건 아셰라드렌인데 왜 내가 사과를 해야 하지. 하기야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벌어진 전쟁이었으니, 나도 죄가 아예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더 이상의 죄책감은 가지고 싶지 않은데. 나는 급히 눈을 내리깔며 어서 빨리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얼른 먹고 자리를 뜨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아가씨를 탓하는 게 아니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어색해진 내 표정을 살핀 노부인이 손을 저었다. 손가락마다 알이 굵은 보석 반지를 낀 그녀가 와인을 마시며 웃었다.

[어차피 난 하나밖에 없던 딸도 아주 예전에 잃어서, 전쟁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것도 없다우.]

[그래도….]

[신경 쓰지 말아.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먼.]

나는 좀처럼 대답을 하질 못했다. 그러자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내게 손녀가 있었다면 딱 다프네 양 나이 정도 되었을 게야. 실례지만 몇 살이나 되었는가?]

[스물셋이에요. 그렇지만 저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요.]

[신기하네. 우리 딸아이가 그맘때쯤 아이를 낳고 죽었는데.]

[저도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부인의 머리색이나 눈동자색이 저랑 비슷하기도 하고요.]

대화를 나누던 도중 음식이 나왔다. 나는 노부인이 추천해 준 관자 수프를 맛보며 감탄했다.

[맛이 아주 좋네요.]

[그렇지? 어서 들게나.]

그 후로는 잠시 식사에 집중하느라 얘기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노부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했다.

나를 정말로 제 손녀나 딸과 겹쳐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빵을 찢어 수프에 담가 먹으며 문득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검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 갑판에 있던 키가 큰 신사 하나가 등을 보인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셨으면 먼저 가셔도 되는데요.]

내 메인 요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노부인은 이미 디저트로 나온 홍차와 조각 케이크까지 먹고 난 뒤였다.

그러나 그녀는 때마침 다가온 웨이터에게 홍차를 한 잔 더 부탁했다.

[아니야. 다프네 양과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 혹시 불편한가?]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부인에 대해서 알고 싶거든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노부인은 스스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페네이라로, 공작 부인이며, 재작년에 남편을 잃고 나서는 계속 여행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삶이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부인은 왠지 모르게 외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르테미아 공작 부인이시라니…. 몰랐어요. 그렇게 높으신 분을 만나 뵙게 될 줄은.]

[그렇지도 않아. 우리 가문은 명이 짧은지 후계도 없고….]

이대로라면 대가 끊어지게 된다며, 노부인은 처음 만난 내게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길어지기 시작한 대화는 내가 식사를 끝낸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먹고, 차로 입가심을 하자 부인이 제안했다.

[자리를 옮겨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나? 이대로 보내는 건 왠지 아쉬울 것 같아서 그래.]

[좋아요. 저도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어요.]

노부인은 신경 쓰지 말라며 내 식사를 함께 계산해 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제야 그녀의 옆에 놓인 지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노부인은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내게 팔짱을 꼈다.

[객실에 들러 숄이라도 가지고 오는 편이 좋을까요? 밖은 좀 쌀쌀하네요.]

[아니야. 어차피 많이 걷지도 못한다네.]

나는 노부인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객실에 처박혀 있었다면 우울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내 객실에 항구에서 산 에메랄드 목걸이가 하나 있는데, 가만 보니 그게 나보다는 다프네 양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

우연히 마주한 인연치고는 외모며 서로 가족이 없다는 것까지, 공통점이 많은 덕일까. 심지어 노부인은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은 내게 값비싼 선물을 하려 들었다. 나는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지만 말이다.

[아니에요, 정말로 괜찮아요. 지금 하고 있는 사파이어 목걸이로도 충분한걸요.]

[다프네 양이 뭘 모르는구먼. 보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인데. 그런데 이제 그만 편하게 다프네, 라고 불러도 되겠는가?]

[네, 물론이죠. 저도 그렇게 불러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외국말도 잘하고, 똑똑하고 예쁘고. 수양딸로 삼으면 참 좋겠어. 여자아이라 후계를 물려주지는 못해도….]

세스나는 레르베 라예트와는 달리 여전히 남자만이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갑판을 걷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아, 미안합니다.]

저쪽도 외국인인가.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 상대가 내가 익히 아는 얼굴임을 깨닫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르시안 님?”

[왜 그래, 다프네. 아는 사람인가?]

옆에서 노부인이 물었지만,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까 갑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 신사.

얼굴은 보이지 않아서 몰랐어도, 머리가 금발이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사가 시르시안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를 이런 데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오랜만입니다, 다프네 양.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시르시안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수척해져 있었고, 눈매가 짙어져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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