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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92)화 (91/123)

92화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나갔다. 아셰라드렌을 미끼로 쓴다는 건, 그를 위험에 빠뜨리겠단 뜻인가?

그러나 그가 시골 사람들의 꾀에 당할 리는 없었다. 거기다 지금 여기서 아셰라드렌을 아저씨에게 넘긴다면 나는 당분간 이곳을 벗어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나는 아셰라드렌의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알아서 도망갈 수 있죠? 지금은 저쪽 장단에 맞춰 줄게요.”

“…….”

그가 말없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설마 나를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건 그에게 있어 장난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뭐, 원망을 좀 받으면 어때. 홀로 킬라하 마을에 처박혀 버렸을 때부터 난 이미 그의 원망을 가득 받고 있었다.

[여기요.]

[고맙구나. 싫어할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하지만… 죽이거나 하시면 안 돼요. 아직 어리잖아요.]

[그래그래, 걱정하지 말아라.]

마빈 아저씨는 선뜻 아셰라드렌을 건네주는 내가 놀라운 듯 말했다. 이제 와서라도 거절하는 게 좋을까.

사실 나는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었다. 왠지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아냐. 아셰라드렌이 어린애도 아니고.’

이 정도쯤이야 알아서 할 수 있겠지. 내가 언제까지고 그의 편의를 봐줘야 하느냔 말이다.

차라리 잘됐어. 새끼 늑대는 마빈 아저씨에게 목덜미를 잡혀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그 모습을 모른 체했다.

[우선 덫을 새로 만들어 둘까. 이보게, 아서! 얼른 가 보자고.]

횃불까지 챙겨 온 마빈 아저씨가 아셰라드렌을 어떻게 대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험하게 대하지는 않지 않을까. 어느새 시간은 어둠이 깔린 늦은 저녁이었다.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지, 아셰라드렌은 순순히 아저씨에게 붙잡혀 그의 일행과 함께 사라졌다.

기회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라 했던가. 횃불들이 더 이상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재빠르게 집으로 들어가 세나부터 챙기기로 했다.

“세나야, 우리 귀여운 아기.”

“야앙.”

“미안해. 한동안 페터 오빠랑 지내 줘. 금방 찾으러 올 테니까.”

고양이를 데리고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가 어렵다. 잠시 세나와 이별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역시 내 신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나는 세나의 통통한 등허리를 마음껏 쓰다듬어 준 다음, 새까만 고양이를 데리고 어두운 숲길을 총총 걸어 나갔다.

내가 마을에서 제일 친하게 지냈던 페터와 그의 할머니라면 세나를 믿고 맡길 수 있겠지. 페터의 집에 도착한 나는 낡은 나무 문을 통통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야. …다프네.]

[잠시만. 바로 나갈게.]

페터네 집은 우리 집처럼 작아도 사람 사는 온기가 넘쳐흘렀다. 아마 언제나 거실에 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빵을 굽는 할머니 덕분일 것이다.

나는 이 집의 온화함을 사랑했다. 아셰라드렌을 확실히 따돌릴 수만 있다면, 곧바로 내가 돌아올 곳은 이곳이었다.

[뭐야, 누나. 어쩐 일이야?]

[그게….]

[얘, 페터야! 다프네가 왔다고? 얼른 들어오라고 해라. 마침 저녁을 다 만든 참이란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훈기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나도 그냥 여기서 마음 편하게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 세나를 쓰다듬다 잠이 들고 싶은데. 평범한 일상을 망친 아셰라드렌이 원망스러웠다.

[잠깐 가 봐야 할 데가 있어. 며칠만, 아니, 몇 주가 될지도 모르지만… 세나를 좀 맡아 줄 수 있을까?]

나는 먹먹해진 목을 가다듬으며 페터를 바라보았다. 아까 아셰라드렌이 묻힌 생크림을 씻어 냈는지 머리가 젖어 있는 페터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어딜 간다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난 이 세계에 날 낳아 준 부모의 얼굴조차 몰랐지만.

핑계를 대는 건 역시 이런 쪽이 간단했다. 페터는 내 낯빛을 살피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누나가 가족 얘기하는 건 처음 봐. 큰일이라도 생긴 거야?]

[응, 그런 것 같아. 급해서 당장 짐을 싸고 가 봐야 하거든. 부탁 좀 할게. 미안해.]

[미안할 거 뭐 있어. 그런데 레이몬드는?]

[마빈 아저씨한테 들켜서…. 자세한 건 아저씨한테 물어보는 게 좋아.]

어차피 하룻밤 사이면 아셰라드렌은 사라져 있을걸. 마빈 아저씨는 난리가 나서 마을을 뒤질 테고.

그사이 아셰라드렌도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황제의 추적을 과연 내가 따돌릴 수 있을까.

솔직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 건, 더 이상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내 의사를 남자가 존중해 주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가 볼게.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말고, 고맙다고 해 주라. 갔다 오면 맛있는 거 사 주기야.]

[응, 당연하지. 아, 그리고 이건 비상금이야. 필요한 일 있을 때 써.]

나는 주머니에서 금색과 은색이 섞인 동전들을 꺼내 페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시골에 사는 소년은 금화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페터는 당황한 듯 나를 잠깐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어디 멀리 가 버리는 거 아니야?]

[아니야. 돌아올 거야. 할머니께도 안부 전해 드려.]

[몸조심해. …보고 싶을 거야.]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나도 보고 싶을 거야.]

나는 페터에게 세나를 넘겨준 뒤 그를 강하게 한번 끌어안아 주었다. 사춘기 소년은 새빨개진 얼굴을 세나의 털에 파묻어 버렸다.

이걸로 된 거야. 마지막으로 페터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세나를 확인하고, 나는 다시금 내가 살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움직이기 편한 옷들만 골라 짐 가방에 대충 던져 넣었다. 또 이렇게 도망길에 올라야 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난 평생 왕성에 묶여 살겠지. 왕성은 내게 끝나지 않는 악몽 같은 곳이었다.

“다 됐다…. 그럼.”

부디 아셰라드렌이 나를 찾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후 내가 다시 이 마을에 돌아온다 해도 모른 척 눈을 감아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짐 가방을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1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살던 정겨운 집을 잠시 떠나는 기분이 영 씁쓸했다.

몰래 숲을 빠져나가다 마빈 아저씨의 집을 지날 때는, 혹시 어디선가 아셰라드렌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했다.

그러나 마을 중심부로 나와 마차를 구할 때까지도 누군가의 방해를 받는 일은 없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순조로운 도피행이었다.

나는 낡은 마차의 구석에 앉아 꼬깃한 지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레르베 라예트 왕국을 떠날 즈음에 샀던 것을 또다시 사용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음.”

마차는 덜컹덜컹 밤길을 굴러갔다. 한숨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들판을 달리고 있겠지.

항구 리스몬은 꽤나 번성한 도시였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여행길에 오를 것이다. 지도에 그려 놓은 동그라미 여러 개를 확인하며,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은빛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이 세상에 평화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들게 했다.

나는 지도를 반으로 접은 뒤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아침으로 따뜻한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며, 무릎 위에 있는 세나를 쓰다듬는 상상을 하면서.

⋆★⋆

끼룩끼룩 갈매기가 우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숨을 가득 들이마시자 바다의 짠 내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듯했다.

나는 짐 가방을 챙겨 마차에서 내렸다. 열 시간이 넘게 이동을 했더니 허리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실례합니다. 마그나로 가는 표 한 장 주세요. 1등실로 부탁드려요.]

그럼에도 표를 사는 일은 잊지 않았다. 나는 값을 지불한 뒤, 항구에서 가까운 여관에 들러 방을 하나 빌렸다.

배를 탈 때까지는 아직 반나절까지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방에서 꼼짝 않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아셰라드렌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내가 없는 킬라하 마을에는 볼 일이 없을 텐데, 설마 벌써 떠났을까?

부디 내 근처에만 없길 바랄 뿐이다.

“와…. 살 것 같아.”

남자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만 힘들고 괴로울 게 뻔했다. 이제 그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헝클어진 머리를 씻어 내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피곤에 전 상태로 목욕을 하고, 양송이 버섯이 들어간 수프에 빵을 찍어 먹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커튼을 치고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꿈에는 간만에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실비아가 나타났다. 새하얀 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흐윽!”

그간 외면하고 있었던 죄책감과 무력감이 나를 내리눌렀다. 숨이 막혀 일어난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마그나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휴양지였다.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여행이라고 애써 되뇌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리에 있는 리본을 묶었다.

허옇게 뜬 실비아의 눈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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