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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89)화 (88/123)

89화

“바람은 무슨 바람이에요. 페터는 어린애라고요.”

“…다프네는 어린애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셰라드렌의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억울했던 나는 주먹을 쥔 채 목소리를 높이다 마침 이쪽을 쳐다보는 가게 주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가씨, 거기서 왜 혼자 소리를 지르고 있어. 얼른 들어오시우.]

[아, 죄송해요. 그러니까… 옷을 좀 보러 왔는데요.]

[으응? 뭐라고?]

역시 가게 주인은 귀가 어두운 모양이었다. 나는 짧게 헛기침을 한 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 옷을! 사려고요!]

[남편 옷을 보러 왔나 보구먼. 아니면 동생?]

[…둘 다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람.]

[뭣이? 이해가 안 되는구먼. 그래서 키가 어떻게 된대?]

아셰라드렌의 정확한 키를 몰랐던 나는 옆에 있던 늑대개를 툭 치며 내려봤다. 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내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190.”

거인이 따로 없네. 어쩐지 올려다볼 때마다 목이 빠질 것 같더라니.

[190 정도 됐던 것 같아요.]

[말랐어? 살집이 좀 있나?]

[아뇨, 마르진 않았고… 어깨가 많이 넓어요. 가슴도 큰 것 같은데.]

[남자가 가슴이 커??]

옷 가게 주인은 잘못 들었다는 듯 ‘이잉?’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벽에 걸려 있던 셔츠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던, 뿌연 먼지가 내려앉은 옷들을 꺼내 주었다.

[그만한 덩치는 우리 마을에 별로 없다우. 그나마 요런 것들이 들어갈 것 같기는 한데….]

[입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요. 바지랑 속옷도 취급하시나요?]

[그려그려. 기다려 보게나.]

가게 주인이 창고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나는 아셰라드렌과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생명체는 새하얀 털로 덮인 귀를 쫑긋거렸다.

“날 자세히도 봤나 보네.”

무슨 말을 해도 개수작에 넘어갈 것 같았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가게를 구경하는 척했다. 아셰라드렌은 입을 헤 벌려 웃으며 분홍색 혀를 내밀었다.

“그런데 내 가슴이 커?”

“…적어도 저보단 큰 것 같던데요.”

“궁금하네. 비교해 보질 못해서.”

아이 진짜. 지금은 덩치가 작아서 한 대 칠 수도 없고. 주먹만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잠시 후 가게 주인이 새까만 바지 여러 개를 들고 나타났다.

[줄 만한 게 별로 없구먼. 이게 내 최선이여.]

[충분해요. 계산할게요.]

[혹시 작다 싶으면 다시 와 봐. 우리 남편이 바느질을 참 잘 한다우.]

어째서 난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재산이 많을 남자의 옷을 사 주고 있는지. 나는 가게 주인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며 값을 치르고 나왔다.

혹시 밖에서 또 마빈 아저씨와 그의 친구들을 마주치는 건 아닌지 불안했으나, 다행히도 그들은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일단은…. 집으로 가야겠지. 괜히 남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다.

“외국어를 잘하네.”

인적이 드문 숲속을 걷고 있을 때, 아셰라드렌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네발짐승이 사람의 언어를 한다는 건 익숙해지지 않아, 나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습했으니까요.”

“언제부터?”

“마을에 오고 나서부터… 그보다 폐하께서도 이 나라 언어를 다 알아들으시는 것 같던데요.”

“나도 공부했으니까.”

대단하네. 그 부분에도 프리지어나 우스테 가문의 입김이 있었을까. 나는 절대로 아셰라드렌이 혼자 전쟁을 일으키고 왕위를 얻어 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외부 세력이 그를 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전에 프리지어가 말했던 것처럼 아셰라드렌의 옆자리였겠지.

그 정도도 바라지 않고서야, 그들이 아셰라드렌과 함께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이 점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옷은 빨아서 입는 편이 좋겠죠?”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나는 물었다. 아셰라드렌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아무래도 좋다는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러면 그동안은 뭘 입고 있지?”

“지금 그 상태로 계시면 되잖아요.”

“그건 곤란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잖아.”

“뭘 하시려고….”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아셰라드렌이 사람으로 돌아왔다. 내가 식탁에 내려놓은 옷들을 뒤적인 그가 속옷과 바지를 하나씩 골랐다.

“계속 보고 있게?”

“아, 아뇨.”

그는 속옷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다 말고 나를 향해 물었다. 식탁이 아래를 절묘하게 가려 주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섬세하게 갈라진 근육.

그것이 자꾸만 내 시선을 끌었다. 민망해진 나는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벌써 아셰라드렌이 익숙해진 세나는 그가 있든지 말든지 햇볕을 쬐며 낮잠을 자느라 바빴다.

“좀 작은데.”

등 뒤에서 아셰라드렌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는 까맣고 윤기 나는 털을 뽐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잘 잤어, 아가?”

“바지도 짧네. 발목이 다 드러나.”

“…불평하지 마세요. 애초에 폐하께서 자초한 일이잖아요.”

“그놈의 폐하 소리.”

남자는 실없이 웃으며 셔츠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 냈다. 그러고는 한쪽 팔을 끼워 넣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이름 없는 성에 살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안 그래?”

셔츠는 우습게도 가슴 부근에서 꽉 끼어 더 이상 잠기지 않았다. 소매는 손목도 가려 주질 못했다.

처음 아셰라드렌을 봤을 때, 그가 딱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더랬다. 물론 지금과 체형은 전혀 달랐지만.

“…그러네요.”

나는 마지못해 답했다. 은빛 머리칼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길어져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를 가리는 앞머리가 갈라질 때면, 남자는 묘하게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높은 콧대와 붉고 도톰한 입술, 언제나 살짝 젖어 있는 듯한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세상에 어쩜, 저렇게 생긴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뭘 그렇게 봐. 마음에 들어?”

“…무슨 말을 못 하겠네요.”

“왜, 다프네는 항상 내 얼굴을 좋아했잖아.”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피워 냈다. 그러고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내 쇄골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또다시 얼굴이 홧홧해지려 했다.

나는 그를 피하고자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남자는 말 없이 입매를 굳혔다.

“당신이 있든 없든, 내 일상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소극적인 반항뿐이었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두고 소파로 가서 앉아 근처에 있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아셰라드렌을 더 이상 의식해서는 안 됐다. 이미 늦은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노력해야 했다. 솔직히 저런 거구를 집에서 쫓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괜히 그를 자극했다간 억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차분하게, 내가 그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 좋아.”

아셰라드렌은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를 따라 소파까지 걸어온 남자와, 내게는 전혀 낮지 않았던 천장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

나의 아담하고 소박한 집은, 남자 하나가 추가된 것만으로 꼭 소꿉놀이용 인형의 집이 된 것처럼 보였다.

“…방해하지 말라고요.”

“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나의 평화로운 일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셰라드렌이 좁은 소파에 몸을 구기듯이 집어넣더니, 난데없이 내 허벅지를 베고 누운 탓이었다.

“내가 방해돼?”

“그래요.”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참아.”

“…….”

부담스러웠다. 책으로 가야 할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아셰라드렌이 보석 같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당연했다.

나는 강제로 종잇장에 눈을 고정시켰다. 세르비크는…. 세르비크는….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노력했다. 제대로 읽지도 않은 페이지를 넘기고, 애꿎은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기도 하면서.

하지만 시간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았다. 똑딱똑딱. 벽에 걸린 시계가 나를 자꾸만 초조하게 만들었다.

“배가 고픈데.”

“…….”

“배가 고파. 다프네.”

대체 어쩌라는 건지. 시간은 30분이 채 흘러가지 않았다. 아침에 먹었던 팬케이크로는 양이 부족했을까?

아셰라드렌은 또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제 생각을 하도록 나를 휘저어 놓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의 칭얼거림을 무시했다.

“대답이 없네. 토끼 사냥이나 다녀올까.”

“…뭐가 먹고 싶은데요?”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제일 어렵다고요.”

그러다 결국 책을 덮고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이지, 아셰라드렌이 나타나고 나서는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남자는 입술을 매끄럽게 말아 올리며 눈을 접어 웃었다.

“재료는 부엌에 있나?”

“그래요, 잠시만….”

“앉아 있어. 내가 알아서 하지.”

짜증스레 아셰라드렌의 머리를 밀어내고 있자니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갑작스럽게 내 이마에 입을 쪽, 맞추더니 혼자 부엌으로 가 버렸다.

“…뭐야.”

소파에 남겨진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떨어뜨렸다. 남자는 까치발도 들지 않고 찬장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제집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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