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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88)화 (87/123)

88화

그리고 나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당연했다. 내 옆에 황제가 눈을 감고 있는데. 그것도 나를 꼭 끌어안고.

“안 자는 거 알아요.”

“…….”

“나 좀 풀어 줘요. 화장실 가고 싶다고요.”

“데려다줄게.”

“미치셨나 봐요.”

나는 화들짝 놀라 두꺼운 팔을 밀어냈다. 의외로 손쉽게 물러난 그가 먼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행복한 듯 웃었다.

“그런 소리를 가끔 듣기는 하지. 그보다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

나는 아셰라드렌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듯 화장실을 향했다. 볼일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남자는 침실에 없었다.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그가 세나와 대치 중인 게 보였다. 고양이는 꼬리털을 바짝 부풀린 채 아셰라드렌을 한껏 경계하고 있었다.

“우웅! 야옹!”

“만지지도 못하게 하네. 꼭 제 주인처럼.”

혼잣말치고는 꽤 큰 목소리였다. 내가 제 뒤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 나는 콧방귀를 뀌며 세나에게 다가갔다.

“세나야, 이리 온.”

“애옹.”

고양이는 아셰라드렌을 향해 하악질을 한 번 한 다음, 창가에서 뛰어내려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햇살이 잔뜩 들어온 거실의 풍경은 밝았다. 그리고 아셰라드렌은 망측하게도 여전히 담요 하나만 겨우 두른 나신이었다.

“옷 좀 입으세요.”

“있어야 입지.”

“돈도 많으실 분이.”

“지금은 없는데. 하나 사 줄래?”

나는 대답하지 않고 세나에게 차게 식은 닭고기를 찢어 주었다. 고양이는 냥냥거리며 열심히 식사를 했고, 아셰라드렌을 못 본 척하며 다시 창가로 올라가 햇볕을 쬐는 데 집중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황제 폐하 드릴 건 없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세수를 하는 고양이를 지켜보던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부엌에서 팬케이크를 굽고 계란을 익히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뻔뻔하게 식탁에 가 앉았다. 그러더니 식탁에 턱을 괸 채 눈을 반짝였다.

“밖에 토끼들이 풀을 뜯고 있던데. 하나쯤 없어져도 문제는 없겠지.”

“…이게 폐하 몫이에요.”

“다프네가 차려 주는 식사는 엄청 오랜만인 것 같네.”

나는 말없이 그에게 접시와 우유를 밀어 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혼자 사용할 목적으로 구입한 식탁은 아셰라드렌과 같은 거대한 사내가 쓰기에는 심하게 작았다.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무릎이 부딪혔다. 결국 나는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불편한 자세로 팬케이크를 잘랐다.

“왜 자꾸 귀엽게 굴지?”

“다 벗고 그런 말 하니까 변태 같아요.”

“응.”

뭐가 응, 이라는 건데. 변태가 맞다는 건가?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후 팬케이크 조각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아셰라드렌은 내쫓는다고 내쫓아질 상대가 아니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도망가야 하나.

“맛있다.”

“먹고 나면 옷을 사러 다녀올게요. 계속 벗고 계실 순 없잖아요.”

“같이 가지.”

“아뇨. 변태같이 밖에서도 벗고 돌아다니는 건 좀.”

나는 우아하게 칼질을 하는 남자를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짐가방 하나를 가득 채우던 금화들은 이미 옛적에 보석으로 바꿔 두었다.

세나는 당분간 페터에게 돌봐 달라고 해야지. 소란이 잦아들면 조용히 돌아와 세나를 데리고 다시 떠날 것이다.

펑!

“…응?”

“이러고 가면 되잖아. 다프네가 키우는 귀여운 강아지인 척하고.”

그러나 내 계획이 제대로 세워지기도 전에 아셰라드렌은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변해 버렸다. 우리 집 앞에 쓰러져 있던 불쌍한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아니, 강아지가 아니라 새끼 늑대. 어쩜 난 아직까지도 개와 늑대를 구분하지 못하는지.

“별로 개 같지 않은데요.”

“충분히 개 같은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고.”

“혼자 다녀올 테니 세나랑 같이 있어 줘요. 저래 보여도 외로움을 타는 아이예요.”

“나도 이래 봬도 외로움을 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개 같은 모습이라 그런지 개소리만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번에도 세상이 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아셰라드렌은 풍성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우유를 찹찹 마시더니 의자에서 뛰어내려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까 세나처럼 내 다리에 머리를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나도 예뻐해 줘. 질투 나게 만들지 말고.”

“…폐하를 예뻐해 줄 사람은 충분히 많을 텐데요.”

“없어, 하나도.”

시야가 한참은 낮아진 그가 금세 눈망울을 축축하게 물들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름 없는 성에 있었을 때보다는 한참은 커진 덩치였으나, 다른 집에서 키우는 개들보다야 자그마한 몸이었다.

그 눈빛에 흔들린 나는 별수 없이 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여전히 솜털처럼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웠다.

“…왜 없어요? 다들 폐하를 우러러볼 텐데요.”

“글쎄, 무서워하면 모를까.”

아직도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걸까. 내가 떠나기 전에도 그는 왕성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을 움츠리게 만들었었다.

전장에서는 거대한 늑대로 변신해 적국의 병사들을 물어뜯었겠지. 건국왕 기르시가 그랬다는 것처럼.

“외로웠겠네요.”

“응.”

“미안해요. 혼자 떠나 버려서.”

“상관없어. 앞으로 쭉 함께 있으면 되니까.”

“그건….”

나는 아셰라드렌을 잊은 척했지, 진짜로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 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왕성에 가면 다시 느껴야 할 그 초라함과 굴욕이 싫었다.

그곳은 실비아가 죽은 곳이었고, 잔느가 도망쳐 버린 곳이었다. 멀쩡히 남아 살아 숨 쉬는 것들은 모두 콧대 높은 귀족들뿐.

“나가죠. 이 시간쯤이면 장이 열렸을 거예요.”

“장?”

“시장이요. 규모가 작긴 하지만 폐하가 입으실 만한 편한 옷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예요.”

“폐하라니, 그런 호칭은 그만두지. 남들이 수상하게 생각하겠어.”

나도 바깥에서 그렇게 부를 만큼 상식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를 아셰라고 부르는 건,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알아서 할게요. 갈까요?”

“그리고 나같이 작고 귀여운 개한테 존댓말을 쓰는 것도 이상하니까.”

“누가 작고 귀여운데요.”

“다프네가 그랬었잖아. 귀엽다느니, 사랑스럽다느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위층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아셰라드렌은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이미 문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보석들을 몇 개 챙겨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사용할 틈조차 없을 것 같았다. 설마 나는 이대로 아셰라드렌에게 이끌려 왕성으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날이 좋은데.”

“…개가 사람 말하는 것보다 수상한 건 없어요.”

“멍! 멍멍!”

“그것도 어색해 보여요. 예전엔 잘만 짖으시더니.”

나는 문을 잠그고 아셰라드렌과 정원을 지나 걸어갔다. 꽃에 내려앉은 나비가 날개를 팔랑이며 꿀을 먹고 있었고, 나무쪽에는 토끼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꼼지락대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아셰라드렌의 새하얀 털이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길을 걸었다. 새끼 늑대가 된 그는 이따금씩 내 손을 꼬리로 간지럽히며 나와 나란히 발을 내디뎠다.

“와, 좋은 냄새.”

숲을 빠져나오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밀가루 반죽을 구우며 신문을 읽고 있는 로이 아저씨였다. 나는 아저씨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과일 가게들을 지나쳐 갔다.

“저쪽에 있는 남성용 옷 가게를 갈 거예요. 그런데 폐하의 사이즈에 맞는 옷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어차피 아무도 레르베 라예트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요. 그보다 강아지면서 사람 말 하지 말라니까?”

“왕!”

물론 아셰라드렌은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지만, 난 괜한 이목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고양이 한 마리만 키우는 걸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이미 나와 아셰라드렌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여, 다프네. 그 조그만 강아지는 대체 뭐야?]

옷 가게에 들어가기 전, 그 앞에서 친구들과 떠들고 있던 마빈 아저씨가 나를 잡아 세웠다. 큰일이었다. 마빈 아저씨는 마을에 나타난 늑대를 잡으려고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숲에 돌아다니는 걸 주웠어요. 불쌍하잖아요.]

[그래? 그런데 이 녀석은….]

마빈 아저씨가 턱수염을 쓸며 아셰라드렌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 된다. 이러다 늑대인 걸 들키겠어.

나는 치맛자락을 늘여 아셰라드렌을 가렸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 얼른 선물을 사야 해서요. 실례할게요.]

[응? 네가 남자 옷 가게에 갈 일이 뭐가 있다고.]

[어… 페터! 페터의 선물을 좀 사려고….]

[허허! 페터는 참 좋겠구만. 이렇게 예쁜 누나가 간식도 사다 줘, 옷까지 사 입히고!]

이러다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아저씨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는 사이, 나는 가게 문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셰라드렌은 옷 가게 주인이 나이가 지긋한 노인인 것을 확인한 후 나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송곳니를 드러낸 그가 으르렁거렸다.

“바람을 피웠나 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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