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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87)화 (86/123)

87화

“흣… 그만.”

계속해서 목을 지분거리는 것이 괴롭게 느껴질 즈음이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올라와 새가 쪼듯 내 턱에 입을 맞추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이내 아셰라드렌은 내 입술을 찾았다.

“…그만하라니까요.”

그러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힘으로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을 알면서도, 어쩐지 난 그가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애매한 순간에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울어. 내가 싫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나를 좀 봐.”

아셰라드렌이 내 턱을 강제로 잡아 돌렸다. 시야가 어두운데도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만큼은 선명했다.

예쁘다, 아름답다, 그런 진부한 표현으로는 부족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저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눈빛.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은 저 눈은, 나로 하여금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저를, 데리고 갈 거예요?”

“응.”

“다시, 우리가 살던 왕성으로?”

“그래.”

“제가 싫다고… 하는데도요?”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야. 너는 그곳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돌아가 봤자 그 누구도 나를 환영하지 않을 텐데. 아셰라드렌의 욕심 때문에, 내가 원하지도 않는 삶을 사는 건 죽어도 싫었다.

나는 이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과거를 잊고 살아가고 싶었다.

“더 할 얘기는?”

싫다고 해도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겠지. 대체 어떻게 하면 아셰라드렌을 혼자 돌려보낼 수 있을까?

나는 이 마을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잦은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란 말이야.

“없으면 나랑 키스해.”

“싫….”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나. 내 말을 가로막고 한다는 소리에 기가 차서 바라보니, 남자는 웃고 있지도 않았다.

아셰라드렌은 급히 고개를 숙여 내 아랫입술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밀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너무도 간단하게 내 두 팔을 잡아 내렸다.

축축한 혀가 들어와 입천장을 간지럽혔다.

“으….”

멋대로 흘러 나간 앓는 소리에 아셰라드렌이 크게 반응했다. 움찔, 몸을 떤 그가 고개를 사선으로 꺾어 좀 더 깊이 내게 파고들었다.

게걸스러운 소리가 날 정도로 사탕을 빨 듯 혀를 쭉쭉 빨고, 잡은 두 팔로 제 등허리를 감게 했다. 꿈틀대는 근육의 움직임이 손끝 하나하나에 전달되고 있었다.

땀이 배어 나온 살갗이 뜨거웠다. 얇은 잠옷 치마에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아, 안 돼. 그만.”

“뭘 자꾸 그만하라는 거야.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그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길게 숨을 내쉬더니, 허벅지에 있던 손을 올려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음에도 나를 만지는 손길은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물기가 어린 내 눈가를 엄지로 닦아 준 그가 조그맣게 키득거렸다.

“언제는 나보고 어른이 돼서 오라더니.”

“…….”

“네가 애같이 굴면 어떡해, 다프네. 응?”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나는 이제 모르겠다. 고작 1년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나는 몸을 떨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맞닿은 곳이 고통스러우리만치 아릿했다. 아랫배 안쪽이 자꾸만 조여드는 이 감각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몸만 큰 아이였던 그가, 이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기다려 준다고 했잖아. 어른이 될 때까지.”

“그건 우리가… 이름 없는 성에 살고 있을 적의 얘기죠.”

“다시 그곳에서 살고 싶어? 그렇다면 상관없는데.”

“그렇게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잖아요.”

나는 더 이상 폐왕자의 시중을 들던 메이드가 아니었고, 그 또한 순진하고 어리숙했던 소년이 아니었다.

이제 와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신은 나만의 왕자님이 아니게 됐잖아. 나는 그 사실이 슬펐다.

“달라진 건 없어. 난 여전히 다프네를 사랑하니까.”

“…전 아니에요.”

“거짓말.”

가라앉은 시선이 내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하필이면, 선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어서. 프리지어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나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양손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아셰라드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을 잡아 내렸다.

“몸을 가려야 하는 건 나일 것 같은데.”

맞는 말이었다. 그는 줄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허리춤에 겨우 걸쳐 놓은 담요를 제외하고는.

“설마 여기까지 발가벗고 달려온 건 아니겠죠?”

“맞는데. 어차피 변신했을 땐 필요 없잖아.”

“황제가 성을 비워도 되는 건가요?”

“안 되지.”

“그럼 언제쯤….”

“내일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데, 다프네가 그걸 허락해 줄지 모르겠네?”

“전 안 간다고 했어요.”

잘라 내듯 답하자 아셰라드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은빛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린 그가 입꼬리를 늘였다.

“나도 여기서 살지 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억지를 부리는 건 너야. 내가 너를 봐주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저렇게 오만한 남자, 나는 모른다. 말문이 막힌 나는 입만 벙긋거리다 이내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그가 나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강아지처럼 나를 졸졸 쫓아다니던, 사랑스러웠던 나의 왕자님. 그는 내가 제 시야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했었다.

하지만 왕성에서의 그는 그렇지 않았지. 내가 없어도 다른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고는 했다. 그런 그를 보며 어찌나 쓸쓸했던지.

“나도 목이 마른데.”

물을 한 잔 따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자니 등 뒤에 선 그가 나를 감싸 안았다. 왜 이제 와 이러는 거냐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찬장에서 새로운 컵을 꺼내려다 금세 가로막혔다. 아셰라드렌이 내 고개를 돌려 입 안에 있던 물을 받아 마셨다.

“이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요?”

“배운 적 없어. 그냥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거짓말.”

“설마 내 순결을 의심하는 건가? 너 하나만을 위해 간직해 왔던….”

“으으, 아까부터 자꾸 왜 이래요? 그만하라니까요?”

나는 물이 묻은 입가를 벅벅 닦으며 소리쳤다. 난 혼자 알아서 잘살고 있었는데, 왜 날 찾아와서 흔드는 건지….

“이렇게까지 날 밀어내는 이유가 뭐야?”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말하지 않으면 나는 몰라.”

“그래서 내가 당신을 떠나온 거예요.”

“…당신?”

잘못 들었다는 듯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황제를 감히 그런 식으로 불렀다고 화를 내는 건 아니겠지.

아니, 지금의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변해 버린 아셰라드렌은 내가 알고 있던 소년이 아니었다.

“아셰라고 불러야지.”

“싫어요. …황제 폐하.”

“하, 화가 단단히 났네.”

“지금 화가 난 게 누군데….”

“너잖아, 다프네. 그래서 날 떠났고. 노력하고 있는데, 끝까지 몰라주네.”

남자의 손아귀 안에서 나는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불만스레 중얼거린 아셰라드렌이 갑자기 몸을 숙여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무, 무슨 노력을 했다고… 잠시만요. 어디 가요?”

“밤이 늦었으니 자러 가야지. 침실은 위층이던가.”

“설마 같은 침대에서 자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야. 항상 그래 왔잖아.”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나는 완전히 남자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여긴 내 집인데. 내가 사는 공간인데.

“자꾸 옛날얘기 들먹이지 말아요. 내려 줘요.”

“후… 다프네가 너무 변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자니 작은 강아지였을 적의 그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싶었다. 싫다던 그를 꽉 껴안고 내 방으로 달려갔던 그 시절.

내가 아무리 반항해도 아셰라드렌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침대에 나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뻔뻔하게 입을 비죽 내밀었다.

“좁네. 같이 자기 불편하겠어.”

“같이 잘 생각 없어요.”

“왜? 난 있어.”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발버둥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다. 그는 억지로 나를 눕혀 팔베개를 해 주고는, 한쪽 다리를 내 허벅지 위에 올려 옭아맸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만 도르륵 굴려 노려보니 그가 내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자꾸 움직이면 더한 것도 하고 싶어질 것 같은데.”

“…차라리 늑대로 변신해 줘요. 작아질 수 있잖아요.”

“그게 잘 안 돼, 이상하게.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어서 그런가.”

무슨 상관이람. 당신은 처음부터 어린애가 아니었는데. 마음이 미성숙했다뿐이지 몸은 처음부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단단히 흥분한 그를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았다.

뺨에 닿는 숨결이며, 힘을 준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허벅지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내 침실에 남자 하나가 더해진 것이 이토록 나를 고뇌하게 만들 줄이야.

“…내려가 줬으면 좋겠는데.”

“포기해. 앞으로 그럴 일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

아셰라드렌은 나를 비웃듯 발끝으로 내 종아리를 툭 건드렸다. 밤이 너무나도 길었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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