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여긴 어떻게.”
그를 보았을 때, 다른 걸 떠나 그가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이곳은 세스나도, 레르베 라예트도 아닌 제삼국의 시골 마을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1년 전의 그날, 그가 나를 속였을 때 끝이 난 게 아니었던가? 나는 아셰라드렌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여전히 내 감정은 우리가 헤어졌던 날에 머물러 있었다.
“좀 더 좋은 곳에서 살고 있을 줄 알았어. 이런, 창고 같은 공간이 아니라.”
“충분히 좋은 집이에요. …왕성만은 못 하겠지만.”
나는 차마 아셰라드렌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불편한 일인가. 그와 나 사이를 떠다니는 공기조차 무겁게 내려앉은 듯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올 거라고,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친 이 상황은, 그보다 더 괴롭고 숨이 막혔다.
“그만 돌아와야지.”
“무슨 소리를….”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느릿한 말투는 고작 1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사라지고 없었다.
신기해. 아셰라드렌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진다.
새하얀 나신을 드러낸 채 어둠 속에 서 있던 그는 확실히 내가 알던 폐왕자가 아니었다. 넓고 단단해진 어깨, 근육이 붙어 한층 두꺼워진 몸.
비쩍 말라 있던 미소년은 어디로 가고, 어깨며 옆구리에 흉터가 남은 거친 전쟁의 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바깥 생활은 충분히 즐겼잖아. 네가 원래 있을 자리로 돌아와야지.”
아셰라드렌의 목소리는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잠시 세나에게 머물렀다.
혹시 해치려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어째서였을까? 내가 알던 아셰라드렌은 연약한 생명을 함부로 앗아 가는 이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세나를 재빨리 안아 들었다. 남자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건, 내 대신으로 키우던 놈인가?”
기가 찼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물음이었다. 체격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변한 걸까.
마음이 복잡했다. 그냥 지금 당장 아셰라드렌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다시 그와 엮이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두통이 일었다.
왕성에서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남자는 조금도 내 심정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는 무심했다. 제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에 푹 빠져, 옆에서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나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래 놓고서, 무슨.
“나가 주세요. 제국의 황제께서 왜 이런 보잘것없는 곳에 계신지 모르겠네요.”
“…아, 역시 다프네도 그 소식을 들었구나.”
내 차가운 어투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오히려 눈을 빛내며 작게 웃기까지 했다.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듯하면서도 기뻐 보이는 얼굴.
아셰라드렌이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 어깨를 굳히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날 피하는 건가?”
“…….”
“왜? 내가 너를 해칠까 봐 겁나?”
“‘너’라니….”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제껏 아셰라드렌이 나를 그런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그는 언제나 나를 다프네, 라고 제대로 불러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구나.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지금 우리 사이의 간극은 컸다.
나는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리다, 시야에 들어온 새하얀 발을 보고 숨을 집어삼켰다.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아.
그에게서 멀어지려 뒤로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다프네가 말해 줬잖아. 옆 나라의 황제가… 레르베 라예트를 무너뜨릴 거라고.”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더 빨랐다. 커다란 손아귀가 내 팔뚝을 쥐었다. 당황할 만큼 억센 힘이었다. 그는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는데.
“다프네가 살아야 할 나라를 망가뜨리게 두고 볼 수는 없었어. 그래서 내가 먼저 침략했다. 이제 더는 다프네가 두려워할 일은 없어.”
“제가 살아야 할 나라는 레르베 라예트가 아닌데요.”
“…맞을걸. 넌 영원히 그곳에서 살아야 해.”
떠난 지가 언제인데. 그보다 결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미래는 없었구나. 나는 지지 세력도 부족하고, 탄탄한 기반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가 무슨 수로 전쟁을 일으켰는지 조금도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죽은 제 아버지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체 누가 그의 힘이 되어 전쟁을 함께했단 말인가?
막상 그렇게 생각하자 곧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프리지어. 아셰라드렌의 왕비가 될 것이라던 여자.
“수많은 사람을 죽였어. 피를 묻히고, 전장에서 날뛰었지. 모두 너를 위해서.”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다 남자가 내뱉은 충격적인 발언에 깜짝 놀랐다. 지금 아셰라드렌이 뭐라고 하는 건가? 나를 위해 살인을 했다고?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순간 회귀 전의, 세스나 제국에 의해 불태워진 왕성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었지. 그 끔찍했던 광경을, 이번에는 아셰라드렌이 만들어 내다니.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이라고 한 적은.”
“그래, 맞아. 네가 원한 건 너와 둘이서 도망을 가자는 것이었으니.”
아셰라드렌이 입꼬리를 올렸다. 부풀어 오른 탄탄한 가슴이 꼭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처럼 완벽했다. 역시 내가 알던 몸이 아니야.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나라를 버리고… 어떻게 나만 살아남을 수 있겠어? 레티스가 죽은 날부터 내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 난, 내 백성들을 모른 체하고 싶지 않았고.”
“그 말투….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나요?”
“응? 아아, 나라를 다스리려거든 위엄 있게 말하는 법부터 배우라던데.”
“그러니까 누가요. 프리지어?”
어차피 왕성도 아닌데, 높여 부를 이유는 없겠지. 당신의 곁에는 틀림없이 그 여자가 붙어 있을 텐데, 어째서 나를 찾아왔나.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속없이 고롱고롱 소리를 내는 세나를 고쳐 안았다.
아셰라드렌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그래, 맞아. 뭐 문제라도 있을까?”
“…아뇨, 아무것도.”
“질투하고 있네. 여전히.”
“그렇지 않아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이 인간이 귀가 막혔나. 어이가 없어 벙찐 얼굴로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남자의 그림 같은 미모에 심장이 멋대로 두근거렸다. 아셰라드렌이 손을 올려 내 뺨을 감쌌다.
“하, 하지 말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이미 끝난 사이잖아. 뭘 이제 와서 날 만지려고 해.
“할 거야. 다프네는 내 거니까.”
“아니에요.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요.”
“귀엽긴…. 오랜만에 봐서 낯설어하는 건 좋은데, 적당히 해.”
그렇게 말하고, 그는 고개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아셰라드렌 때문에 놀란 세나가 내 품에서 뛰어내렸다.
“봐. 저 고양이도 우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잖아.”
남자는 실실 웃으며 다른 한 손으로 내 등을 받쳤다. 날 다신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하려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짓눌린 내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그를 피하려 하자 그가 날 어르기라도 하듯 속삭였다.
“가만히.”
“시, 싫어요. 왜 이러는 거예요. 날 좀 내버려 두라고요.”
“그럴 수 없어. 다프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는데.”
퍽이나 그래 보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내가 자꾸만 뒤로 물러나려 하자, 아셰라드렌은 아예 나를 벽으로 밀어붙인 뒤 내게 제 거대한 몸을 밀착시켰다.
뜨겁고, 바위처럼 단단한 몸이었다. 나는 그와 맞닿은 하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무서울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참고 있었어. 자꾸 이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는데.”
그가 내 양 어깨를 잡고 허벅지 사이를 짓눌렀다. 쿵쿵쿵쿵.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왜 하필이면 지금 홀딱 벗고 있는 건데.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아셰라드렌은 감옥같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그의 어깨 너머를 내다보았다.
아셰라드렌과 눈을 마주쳤다가는, 내가, 그리웠던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짓을 벌였다간 꼼짝없이 그와 함께 왕성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나는 내 친구들이 죽고,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놔, 주세요.”
부드러운 머리칼이 내 뺨을 간질였다. 그가 토해 내는 숨결이 목덜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힘을 짜내 겨우 입을 벌렸지만, 아세라드렌은 그런 나를 비웃듯 목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못 해. 알잖아.”
“제발, 우리 더는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
“그걸 누가 정했는데? 응?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쿵쿵, 강하게 뛰는 맥박 위로 그의 입술이 몇 번이고 붙었다 떨어졌다. 심각한 나와는 반대로, 아셰라드렌은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내 감정 따위, 아무래도 좋다 이거지. 몇 번이고 싫다고 말했는데.
눈가에 열이 몰렸다. 남자는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