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 그렇지. 페터네 할머니에게 물어보자.”
멍하니 개인지 늑대인지도 알 수 없는 짐승을 내려다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킬라하 마을 최장수 노인인 페터네 할머니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할머니!]
그 길로 나는 페터네 집에 달려가 문을 마구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숟가락을 입에 문 페터가 나타났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큰일 났어. 우리 집 앞에 지금….]
페터는 내 설명을 들은 직후 할머니를 데리러 갔다. 할머니는 약초와 붕대로 가득한 작은 상자를 들고 나와 함께 집으로 출발했다.
[놀랐겠구나. 사냥터에서 도망 나온 개일까?]
할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페터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가 아니고 늑대 새끼 같은데.]
[대체 개랑 늑대의 차이가 뭘까? 항상 궁금했는데.]
언젠가 시르시안도 날더러 누가 봐도 늑대 새끼인 아셰라드렌을 보고 어떻게 강아지로 착각할 수 있냐며 타박했었지.
나는 할머니가 놈의 상처에 짓이긴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감는 걸 말없이 지켜보았다. 문제는 저 눈처럼 새하얀 털이었다. 나로 하여금 자꾸만 아셰라드렌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 다 됐다. 너는 앞으로 이 녀석을 어떻게 할 생각이니?]
할머니는 붕대의 매듭을 단단히 묶어 준 뒤 내게 물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할머니가 알아서 결정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모, 모르겠어요. 마빈 아저씨한테 넘겨야 할까요?]
[그러면 죽을 텐데.]
[아, 역시…. 하지만 키울 수도 없잖아요.]
[사냥터에 넘기는 건 어떻겠니? 이 녀석이 어떤 짐승의 새끼든지 간에 평범한 가정집에서 키우기는 어려울 듯싶은데.]
차라리 그편이 나을까. 어차피 난 놈을 책임지지도 못 한다. 나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우선 오늘 밤까지는 네가 돌보거라. 해가 뜨면 로만을 불러와야겠구나.]
하며 남은 푸딩을 먹어야겠다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셨다. 놈을 우리 집 테라스에 내버려 둔 채.
“아직 밤에는 추운데….”
조금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하루쯤이야 나도 맡아 줄 수 있었다. 혹시 세나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닐까 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할머니가 깨어나도 아마 활발하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 같다고 하셨으니.
어쩔 수 없이 나는 놈을 집 안에 들였다. 아셰라드렌을 너무 닮아서 왠지 찝찝한데.
“세나야, 이리 온.”
“냥.”
정신을 잃은 놈을 문가에 두고, 나는 세나와 함께 저녁을 먹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혹시 모르니 책을 잔뜩 쌓아 바리케이드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이, 아니겠지. 황제가 됐으면 한창 바쁠 텐데.”
나는 마지막으로 담요 하나를 대충 덮어 둔 놈을 내려다본 뒤 침실에 들어갔다. 깨어났을 때 저놈이 아래층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하지? 불안해하면서.
⋆★⋆
다프네가 침실 문을 닫기가 무섭게 짐승은 눈을 뜨고 일어났다. 뒷다리가 시큰거리긴 했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장에서 그는 석궁에 어깨를 관통당하고 허리에 창이 찔려도 아무렇지 않게 전투에 뛰어들고는 했다.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짐승은 앞발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런 다음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순식간에 장신의 사내로 변했다.
“…여전히 순진하네.”
사내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부러 덫에 걸린 것은 다프네의 집에 쉽고 간단하게 들어오기 위해서였다.
“보고 싶은데.”
아셰라드렌은 소파에 걸터앉아 중얼거렸다. 완전히 개화한 그의 능력은 이제, 사람이 되어서도 늑대와 같은 감각을 지닐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안광은 매끄럽게 빛이 났다. 다프네는 제 무릎에나 겨우 올 법한 높이로 책을 열심히 쌓아 두었다.
‘당분간은 장단을 맞춰 주는 게 좋을까.’
다프네도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니 저가 데려온 짐승이 아셰라드렌이라는 것쯤은 대충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만 그 알량한 동정심과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신중한 성격 탓에,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고 아셰라드렌을 제집으로 들였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는데.
아셰라드렌은 고개를 뒤로 젖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엌은 소꿉놀이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작았고, 다이닝 룸조차 따로 없는 듯 식탁이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소파도 그의 체격을 받치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이런 데서 살고 있었단 말이야? 다프네가 가져간 돈은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니었는데.
‘하긴, 이름 없는 성에서도 예전엔 방에만 처박혀서 살았었지.’
다프네가 떠나던 날. 그는 제 것이되, 제 것이 아닌 기억을 떠올려 냈다. 낯선 회상 속에서 그는 다프네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아셰라드렌은 지금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었고, 갑작스럽게 과거를 떠올린 탓에 그리움에 지쳐 반쯤 돌아 버린 상태가 되었다.
다프네와 그의 인연은 그렇게 쉽게 끊어질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지 않나.
스무 살이 넘어 죽어야 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다프네가 그리워서, 그녀가 떠나기 전과는 달리 알 수 없는 두통이며 갈증에 시달리고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나를 떠날 수 없어.”
아셰라드렌은 소년처럼 풋풋하게 웃었다. 종아리에 난 상처는 이미 아물어 가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신의 피는 그가 모든 것을 내리누르고 정점에 설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더 이상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모두 죽였다. 다프네가 말하던 세스나 제국의 황제도, 어떻게든 그를 내치려 하던 아버지도.
다만 그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어머니, 그녀가 데리고 있는 제 동생만큼은 아직, 숨통을 끊지 못했지만.
‘상관없어. 그 녀석은 유폐되었다.’
아셰라드렌은 핏덩이에 가까운 제 동생이 저와 똑같이 짐승의 모습을 하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아 버렸다. 그 품에서 자라날 아기는 절대로 제게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셰라드렌은 마땅히 그가 누렸어야 할 것들을 전부 되찾을 심산이었다. 그중에 다프네가 포함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
“…세나야?”
외출하고 와서인지 어젯밤은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 해를 맞으며 일어난 것이 얼마 만인지? 나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고양이를 찾았다. 분명 내 옆구리에서 갸르릉대며 자고 있었는데.
“아, 설마. 안 되는데.”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세나는 침대에 없었다. 혹시 혼자 아래층으로 내려갔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 슬리퍼도 신지 못하고 계단으로 달려갔다.
고양이는 식탁에 앉아 문가에 있는 짐승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끔찍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나야, 너 거기 있으면 안 돼.”
나는 책들을 옆으로 옮기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고양이를 번쩍 안아 드는데, 길쭉한 치즈처럼 늘어난 세나가 야옹거리며 내게 반항했다.
왠지 억울해진 나는 세나의 퉁퉁한 볼을 한 번 잡아 늘이고 놓아주었다. 놈의 시선은 내가 계단에서 내려올 때부터 부엌에 갈 때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뭐, 뭘 보는데.”
“…….”
“붕대는 또 어디 갔고? 헉, 설마 혼자 풀었어?”
입을 쓰지 못하게 입마개라도 씌워 뒀어야 했나? 나는 또다시 뒷걸음질을 치며 놈을 자세히 관찰했다.
혼자 씻었을 리도 없는데 묘하게 어제보다 반질반질 깨끗해진 털이며, 으르렁대지는 않아도 적대적인 눈빛이며.
당장이라도 세나를 데리고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놈이 문을 막고 앉아 있었다. 젠장, 어떻게 하면 좋지.
“오, 오지 마.”
심지어 놈은 보란 듯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바짝 세운 귀를 움찔거리며, 튼튼한 앞발을 내 쪽으로 내디뎠다.
“오, 오지 말라니까. 너 다리는….”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다 벽난로에 있던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사나워도 덩치는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놈이 어제와는 다르게 절뚝이지도 않는 걸 보는 내 심정은 참담해졌다. 덫에 물렸으니 최소 골절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어째서, 이놈은 멀쩡하게.
“다 나은 지 반나절은 지났어. 바보.”
“아, 미친. 개가 말을 하네.”
“끝까지 날 귀여운 강아지로만 보네.”
“누가 귀여운 강아지….”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놈이 인간의 말을 하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놈의 정체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어.
하지만 아셰라드렌은 강아지일 적에 사람의 말을 하지 못했는데. 그전에 저 모습은.
“더는 다프네가 좋아하는 새끼 때로 돌아갈 수 없더라. 이상하지? 이게 내 최선이었어.”
놈이 입을 열 때마다 평온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괴하면서도 신비로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여기 있어서는 안 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아셰라드렌….”
그러자 짐승이 조금 웃는 것도 같았다. 눈 깜짝할 새 은빛 머리를 가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로 변한 놈이 눈가에 그늘을 드리운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즐거웠어? 나를 버리고 행복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