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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84)화 (83/123)

84화

[방금 그거, 세스나의 언어가 아닌데.]

인형극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페터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건수를 잡았다는 양 눈을 빛내면서.

하지만 난 딱히 내 출신을 숨긴 적은 없는데. 일부러 말한 적도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어느 나라의 말일까요?]

[뭐야, 갑자기. 맞혀야 돼?]

나는 신문을 작게 접으며 일어났다. 바다 건너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지 간에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기 바빴다.

어머니에게 얻어 낸 동전을 악사에게 던지는 여자아이, 말린 과일을 파는 진열대, 빵 부스러기를 비둘기에게 나눠 주는 할아버지.

나도 저들 속에 자연스럽게 묻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울렁거리는 속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다려 줬으니까 푸딩부터 사러 가자.]

[잠시만. 혹시 미케 왕국의 말인가?]

[틀렸어.]

[아니면 레르베 라예트? 그러고 보니 그쪽 나라가 세스나랑 붙어 있기는 하지.]

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주었다. 내 반응을 보고 확신을 얻은 페터가 신이 나서 주절거렸다.

[난 당연히 누나가 세스나 제국 사람인 줄 알았는데. 머리색이 그렇잖아.]

[이제는 제국이 아니래.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는 모양이야.]

[무슨 상관이야. 그거 좀 잘못 부른다고 누가 뭐라 한다고.]

페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푸딩 가게로 향하는 나를 멈춰 세웠다.

[그래서 다프네 누나는 레르베 라예트에서 온 거?]

[그런 거.]

[이야, 멀리서도 왔다. 난 항상 궁금했다고. 누나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별걸 다…. 그보다 푸딩 몇 개 먹을 거야?]

어느 날 시골 마을에 나타난 외국인을 보면 누구라도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페터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고.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는 페터를 보고서 아예 푸딩을 6개짜리 세트로 사 버렸다. 딱 보니 제 것 하나, 할머니 것 하나를 생각한 것 같기는 한데.

[여기 푸딩은 작아서 하나만 먹으면 아쉽잖아. 자, 들어 줘.]

페터네 할머니에게 얻어먹은 딸기는 이렇게 갚으면 될 듯싶었다. 나는 페터에게 짐 가방을 건네주고 이번에는 마을에서 제일 인기가 좋다는 옷 가게로 들어갔다.

여자 옷만 파는 곳이라 그런지 페터가 웩, 하는 소리를 내며 불편해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총 다섯 벌 맞는지요?]

[네, 맞아요. 마지막 남색 드레스랑 세트인 구두도 같이 살게요.]

원하는 옷이며 음식을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삶.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아직도 어수선한 건지.

나는 순식간에 늘어난 짐 가방들을 예상과는 다르게 묵묵히 들어 주는 페터에게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 주었다.

그 애는 나와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묘하게 수줍어하면서도 이따금 툴툴거리고는 했다. 원래 10대 소년들은 죄다 저런 식인 건가?

‘아셰는 처음에 잠깐 까칠했던 것 빼고는 되게 고분고분했는데.’

페터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셰라드렌이 얼마나 순수하고 해맑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페터가 그렇지 않다기보다는, 아셰라드렌은 저 나이대 특유의 예민한 느낌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래 봤자 떠나기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나워지기 시작했었지만.’

화를 내고, 나를 함부로 만지려 하고, 고집을 부리고, 사람을 해치기까지 했다. 남자들이란 결국 다 그렇게 난폭한 시기를 거치는 걸까.

나는 핑크색 음료수에 한껏 당황한 페터를 향해 웃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온통 아셰라드렌을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슬슬 돌아가 볼까? 세나도 보고 싶은데.]

[그 고양이는 누나가 없어도 잘만 살 것 같은데.]

[아니거든. 페터가 세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예의상 푸딩이 든 가방은 내가 들기로 했다. 오후에는 킬라하 마을로 가는 짐마차가 따로 없어서, 나는 레모스에 올 때보다 큰 삯을 지불하고서야 마차에 탈 수 있었다.

[간만에 외출했으니 당분간 또 집에 틀어박혀서 살겠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페터는 나를 흘깃거렸다. 덜컹덜컹, 돌바닥 위를 굴러가는 마차가 지금 내 기분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가 자주 나왔으면 좋겠어?]

[아냐. 내가 보러 가면 되니까 상관없지.]

[페터…. 나를 너무 좋아하지 마. 누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 거야.]

[…누,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낯선 데서 혼자 살아가는 외국인 불쌍해서 그런다.]

하여간에 솔직하지 못하다. 나는 키득대며 장난스레 페터의 정강이를 툭 건드렸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주인공이 죽어도, 평생을 나만의 왕자님으로 살아갈 줄 알았던 남자가 대륙을 제패했어도.

이야기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내 일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을 예정이었다. 집 앞에서 페터의 배웅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나야, 엄마 왔….”

그러나 옷이 가득한 가방을 내려 두고 세나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 나는 까만 고양이가 내가 아닌 창밖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고양이는 수염까지 움찔대며 창밖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저게 뭐지.”

해가 질 듯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알록달록한 꽃이 피어난 정원 가운데.

덩치가 어른 고양이인 세나 정도는 될 법한 새하얀 물체가 쓰러져 있었다.

“세나야, 저게 뭘까?”

“이양.”

고양이는 그릉거리며 내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미동도 없는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셰라드렌의 머리색을 닮은 저 짐승은….

“안 되겠다. 다녀올게.”

숨이 가빠져 왔다.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하얀 털을 가진 그것의 뒷다리에는 마빈 아저씨 일행이 놓았을 덫이 걸려 있었다.

살아는 있을까. 불안해진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벌리고 서 있다 몸을 낮추었다. 그것은 눈을 감고 있었다.

“어, 어떡해. 죽었나 봐.”

이 정도 가까이 다가갔으면 눈을 떠야 할 텐데. 혹시 기절했을까?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그것의 뒷다리를 옥죄고 있는 덫이 짐승의 크기에 비해 너무 거대했다.

하긴 마빈 아저씨가 잡으려던 짐승의 발자국은 저 아이보다 한참은 더 컸으니까. 그렇다면 저것은 그 짐승의 새끼일까….

“크르릉!”

“꺄악!”

쓰러진 하얀 털 뭉치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그것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나를 노려봤다.

화들짝 놀란 나는 곧바로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해진 털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난 보랏빛 눈동자.

“…아셰라드렌?”

그러나 그것의 정체가 내가 아는 남자라고 하기에는, 눈빛이 너무도 야성적이었다. 아셰라드렌은 강아지로 변해도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는데.

내 앞의 짐승은 차원이 다르게 매서웠다. 기다란 혀를 빼물고 헉헉대는 저놈은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달려들 것 같았다.

“아, 아니겠지. 하지만 너무 닮았는데.”

“크릉!”

“악!”

혼잣말이 거슬렸는지 짐승이 나를 위협했다. 털을 부풀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저만 한 덫이 저를 물고 놓아주질 않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마, 마빈 아저씨를 불러올….”

“컹!”

“아, 알았어! 대체 뭘 어쩌라고!”

그 아저씨는 왜 남의 집 근처에 덫을 놔서 이런 사태를 만들었나. 나는 몸을 덜덜 떨며 짐승이 발버둥 치는 것을 강제로 지켜봐야만 했다.

저러다간 다리가 잘려 나가겠는데. 놈은 피를 줄줄 흘려 대며 덫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날카로운 덫이 놈의 살점을 파고들 뿐이라… 고 생각했으나,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놈은 기어코 덫을 망가뜨리고 일어나 있었다.

“뭐, 뭔데, 그거. 어, 어떻게 한 건데.”

짐승의 덩치가 별로 크지 않다고 해서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놈은 뒷다리를 절뚝대며 내게 다가오려 했다.

가만히 있으면 물릴 것 같은데. 게다가 놈은 엄청나게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페터네 집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있는 힘껏 달리면 놈에게 물어뜯기기 전에 페터를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애도 저렇게 사나운 들개를 만나 본 적은 없을 텐데.

쿵.

“주, 죽었니…?”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놈이 갑자기 흰자를 드러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쉽게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던지라 나는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놈에게 던졌다.

그러나 머리를 얻어맞고도 짐승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아셰라드렌을 닮은 것이 내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은 건 아니구나. 기절한 거였어.”

나는 용기를 내어 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다시 나뭇가지를 주워 놈의 몸을 콕콕 찔러 보았다.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다행히도.

하지만 여긴 우리 집 정원이고, 대체 어디서 덫에 걸렸는지 몰라도 놈은 내 구역 안에서 쓰러져 있었다. 마빈 아저씨를 불러오면 틀림없이 이 녀석을 죽이려고 들 텐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사나운 짐승을 내 집에 들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끙끙거리며 덫에 물린 자국이 남은 놈의 뒷다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눈을 보고 아셰라드렌인 줄 알았지만, 그렇다기엔 다리가 너무 길었다.

나는 아직도 강아지였던 그의 짤막한 다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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