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82)화 (81/123)

82화

[그럼 잘 가.]

나는 귀여운 소년 페터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현관문을 닫았다. 페터와 딸기를 배가 부를 만큼 나눠 먹었지만 여전히 바구니는 묵직했다.

남겨 뒀다가 내일 아침에 팬케이크에 곁들여 먹어야지. 나는 바구니를 소중하게 얼싸안고 걸음을 옮겼다.

[진하게]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던 태양의 몰락

그러다 신문 기사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으나, 그것도 찰나였다. 여주인공도 죽는 판에 남주인공이라고 안 죽겠어. 난 좀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었다.

“으음, 일단은….”

좀 더 자자.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오랜 기간 메이드로 일해 왔던 난 달콤한 낮잠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돈 많은 백수의 삶이란 행복한 것이로구나. 나는 삐거덕대는 나무 계단을 올라 그대로 2층 침실에 돌아갔다.

암막 커튼이 쳐진 그곳에는 나의 아담하고 포근한 침대가 있었다.

⋆★⋆

“하암, 배고파.”

얼마나 잤는지 따위는 모르겠고. 기지개를 켜고 커튼을 걷자 바깥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잠을 잔 건가?

그렇다면 또 밤새도록 로맨스 소설을 읽어 대겠군. 나쁘지 않은 일정이었다. 비록 날이 갈수록 사회성이 퇴화되는 느낌이긴 했지만.

“아… 계란이 다 떨어졌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저녁에는 쌀쌀해서, 나는 숄을 걸치고 내려가 찬장을 살폈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고 있다 보니 계란은 물론이고 우유며 햄까지 다 부족했다.

사람이 딸기만 먹고살 수는 없는 건데. 오늘은 씻는 것조차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이 외출 준비를 해야 할 듯했다.

나는 빠르게 샤워를 마친 뒤 짙은 노란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이 옷은 모직으로 되어 있어 꽤 따뜻하단 말이지.

“다녀올게, 세나야.”

그러고는 덜 마른 머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내리며 창가에 있는 새까만 고양이에게 인사했다. 말랑하고 따끈한 몸을 둥글게 말고 누운 고양이는 당연하겠지만 그런 나를 무시했다.

“그러고 보니 세나가 먹을 닭고기도 다 떨어졌지.”

“애옹.”

“자기 밥 얘기 하니까 아는 척하는 거 봐.”

고양이는 지난여름, 리스몬 항구에 도착했을 때 발견했다. 당시의 난 절망과 우울의 인간화 상태였다.

예니체 경은 날 속였지, 아셰라드렌은 사람이 변한 것처럼 왕위에 집착하기 시작하지.

거기다 프리지어며 왕성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날 적대시했었다. 안 그래도 실비아가 죽고 잔느가 사라진 탓에 하루하루가 힘겨웠던 내게 말이다.

역시 왕성에 남지 않길 잘했어. 더위와 갈증에 지쳐 쓰러진 새끼 고양이에게 배에서 샀던 소시지를 나누어 주며 나는 생각했었다.

슬퍼하는 것도 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가능한 것이라고. 미래가 어떻게 될 예정인지 훤히 아는 판에 개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아셰라드렌과 예니체 경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런 나를 저버린 건, 그들이었다.

“이양.”

손끝에 머리를 비비적대는 새까만 고양이는 먼 옛날, 내가 소설 속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상에 살았을 적을 떠오르게 했다.

그때는 내 머리도 이렇게 검었었지. 지금은 죽고 없는 레티스, 그러니까 그 속에 있던 문세나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린 세나를 잊고 싶지 않아, 항구에서 주운 고양이에게 그녀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참고로 고양이는 수컷이었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잠시 나갔다 올게. 기다리고 있어.”

“야오옹.”

“알았어. 우리 세나 귀엽다. 옷에 털 묻히지 좀 말고.”

진한 개나리색 옷이라 검은 털이 묻으면 금방 눈에 띈단 말이야. 고양이 세나가 과연 내 말귀를 알아들을지는 의문이었으나, 혼자 사는 나는 고양이와 대화하는 일이 일상처럼 익숙했다.

세나는 촉촉한 코를 몇 번이고 내 손등에 부딪히다 이내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우아하게 걸어가 물을 찹찹 마시는 걸 보니 아마 소파로 자리를 옮길 모양인 듯했다.

나는 고양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지갑을 챙겨 집을 나섰다. 얼른 출발하지 않으면 돌아올 때는 컴컴한 밤일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마빈 아저씨.]

[오, 다프네. 오랜만이구나. 드디어 먹을 게 다 떨어졌니?]

울창한 숲길을 조금 걷다 보면 금방 페터의 집이 나타난다. 그 뒤에는 마빈 아저씨와 사라 언니의 집이, 그다음에는 아네트 아주머니의 집이, 마지막으로는 상점 거리가 나온다.

숲속에 산다고 해서 문명과 완전히 동떨어진 건 아니었다. 삽이며 곡괭이 등을 하나둘씩 손에 쥐고 있던 마빈 아저씨의 일행은 나를 보자마자 아는 체를 해 왔다.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뻔하지. 네가 집을 나오는 건 요상한 내용의 책을 사러 갈 때나, 먹을 게 없을 때. 딱 이 두 가지뿐이라던데.]

어린 소년 페터가 로맨스에 대해 뭘 알겠나. 열다섯 살 먹고도 아직까지 지렁이로 나를 놀래키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난 아저씨들을 향해 물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 만하네요. 그런데 여기서 다들 뭐 하세요?]

[일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이상한 걸 발견해서. 여기 좀 보거라. 산에서 짐승이 내려왔는지….]

마빈 아저씨가 흙이 묻은 삽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시선을 내리자, 아저씨의 발보다도 한참은 큰 발자국 여러 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점은 발자국이 길의 중간에만 여러 개 찍혀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공중에서 증발해 버린 듯.

[하지만 킬라하 마을에 살면서 늑대나 호랑이를 본 적은 없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 평생을 마을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는데, 봤던 짐승 중에서 제일 무서웠던 게 우리 아내였지. 아마.]

[예끼, 이 사람아. 사라가 들으면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정도로는 안 끝날걸.]

동네에서 소문난 애처가면서 또 저런다, 또. 나는 마빈 아저씨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다시금 땅바닥을 확인했다.

이 정도로 큰 발자국은 설마 아셰라드렌의 것일까. 그가 늑대로 변했을 때, 꼭 이렇게….

[하지만 만약에 짐승이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면, 안전을 위해서라도 꼭 잡아야겠지.]

[덫을 놓아야 하나? 주문 제작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니다, 잘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내 고개를 들었다. 아셰라드렌을 본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 데다가, 의식적으로 잊으려 해서 그런지 몰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듯했다.

그전에 레르베 라예트 왕국을 떠난 이후로 아셰라드렌이 나를 찾은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관계는 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금의 아셰라드렌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겠지. 그 순진하고 착했던 왕자가 세스나 제국을 격파하기까지 어떤 일들을 겪었을지.

궁금했지만, 나는 일부러 생각을 이어 나가지는 않기로 했다. 아셰라드렌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아팠다.

이건 틀림없는 실연이었다.

[앗, 더 늦었다간 팔머 할아버지의 정육점이 닫을 텐데.]

나는 멍하니 아저씨들 사이에 서 있다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다른 가게는 몰라도 팔머 할아버지는 해가 지면 잠을 자고, 해가 뜨면 일을 하는 분이라.

[이미 늦은 거 아닐까, 다프네? 그러지 말고 그냥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어.]

[아니에요, 세나… 그러니까, 고양이가 먹을 고기도 다 떨어져서요. 저는 그만 가 볼게요.]

마빈 아저씨의 제안을 거절하고 상점 거리에 도착했을 때, 팔머 할아버지는 이미 가게를 청소하고 있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세나가 먹을 고기며 내가 먹을 꿀을 바른 햄을 샀다.

그런 다음에는 다른 가게에도 들러 계란, 우유, 빵, 그리고 샐러드를 만들기 위한 약간의 채소도 구입했다.

[혼자 살면서도 잘 해 먹네. 누가 될지는 몰라도 다프네를 데려갈 신랑은 행복하겠어.]

[에이, 루나 언니. 말했잖아요. 전 결혼에는 관심 없어요.]

남편과 함께 채소 가게를 운영하는 루나 언니는 나보다 열네 살이나 많았지만, 어째선지 이 마을의 여자들은 죄다 내게 언니라는 호칭을 강요하더라.

덕분에 나는 페터네 할머니를 제외한 모두를 누구누구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데하힐 왕국의 문화인가?

[왜 관심이 없어? 로만이 널 아주 좋게 보고 있던데.]

로만이 누구더라.

[그 왜, 킬라하에서 조금 떨어진 사냥터에서 일하는 남자 말이야. 키도 훤칠하니 크고.]

[아아, 아버지를 따라 장래에는 사냥터지기가 될 거라던….]

나는 지난겨울, 축제 날에 보았던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사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내 타입은 아니었다.

거기다 그 사냥터는 항구 도시 리스몬을 다스리는 귀족의 소유가 아니던가? 나는 남은 인생을 더 이상 귀족이니 뭐니 하는 것들과 엮여 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돈도 많고, 집도 있고, 거기다 고양이까지 키우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굳이 뭐 하러 결혼을?

[저는 눈이 높아서요.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이 아니면 싫어요.]

나는 농담하듯 루나 언니에게 말하며 집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는 하필이면 이때 장을 보러 왔던 로만이 있었다.

[이,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게 아닌데….]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새빨간 사과가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루나 언니는 어머나, 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민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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