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얘, 페터. 노란 지붕에 사는 여자애에게 딸기를 좀 갖다주련.]
[뭐야, 또? 아, 왜 자꾸 나한테 시켜.]
중립국 데하힐의 남동부, 항구 리스몬에서 마차를 타고 열네 시간은 들어가야 나오는 시골 마을 킬라하.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둘이 사는 소년 페터는 투덜투덜 불평을 하면서도 착실하게 딸기가 든 바구니를 쥐었다.
겉으로는 싫은 척을 했지만 내심 그는 노란 지붕 집에 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집은 동화 같은 장소였다.
이름 모를 알록달록한 꽃들로 가득한 정원에, 홀로 까만 고양이를 키우며 사는 예쁜 누나에. 집 안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기분이 아늑하고 몽글몽글해지고는 했다.
거기다 누나가 나눠 주는 쿠키며 차는 또 얼마나 달콤하고 향긋한지.
[얼른 갔다 올게). 혼자 무리하지 말고 쉬고 있으셔.]
[얘는, 할미한테 말본새가 그게 뭔고.]
[아무튼!]
페터는 주방에 구부정하게 서서 딸기 꼭지를 자르고 있던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른 뒤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햇살은 따스하고, 녹음은 눈이 부셨다. 소년은 노란 지붕에 사는 누나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와, 이거 뭐지.]
바구니를 붕붕 흔들며 걷던 소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숲에 사는 동물이라고는 다람쥐며 토끼 정도밖에 없는 평화로운 킬라하 마을의 바닥에, 페터의 두 발을 합친 것보다 큰 거대한 발자국이 움푹 파여 있었다.
게다가 그 발자국은 숲속에 위치한 노란 지붕을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페터는 헐레벌떡 다리를 놀렸다.
[다프네, 다프네!]
여자 혼자 사는 작은 집이었다. 발자국의 크기만 봐도 무시무시한 짐승이 덮쳤다간,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질 게 분명했다.
페터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누나를 찾았다. 수풀이 우거진 저 덩굴만 넘으면…!
[…에이, 뭐야. 멀쩡하잖아.]
그는 보랏빛의 작은 꽃들을 헤쳐 가다 한숨을 쉬었다. 짐승의 발자국은 어느덧 끊겨 있었고, 노란 지붕의 집은 이곳만이 다른 세상인 양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페터는 집 앞에서 풀을 뜯고 있는 갈색 토끼를 피해 계단을 올랐다. 문 옆의 테라스에는 푹신한 안락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다프네, 다프네 누나.]
토끼가 놀랄까 싶어 그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딸기가 든 바구니를 덮은 신문지에 별생각 없이 시선을 두었다.
나라 간의 전쟁이니 뭐니, 최근 100여 년간 분란에 휩싸인 적 없는 데하힐 왕국과는 별세계의 일이었다.
페터는 탐스럽게 익은 딸기 한 알을 들어 토끼에게 보여 주었다.
[야, 이거 봐라. 맛있겠지.]
[조금만 나눠 주지 그래? 토끼도 딸기는 먹을 수 있다던데.]
[으악, 깜짝이야.]
움찔 놀란 페터가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일어난 듯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느라 살짝 휘어진 눈.
[꼬, 꼴이 그게 뭐야?]
[미안해, 방금 일어나서.]
헐렁한 잠옷 원피스 차림에 숄을 두르고 있는 여자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동네 백수였다. 처음 그녀가 연고도 없는 마을에 왔을 때, 혹자는 귀족 나리의 도망친 정부가 아니냐며 수군거리기도 했더랬다.
그러나 소탈한 옷차림 하며, 문제 한번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그녀를 지켜본 사람들은 어느샌가 색안경을 벗어 던졌다. 콧대 높은 귀족을 상대했다기엔 여자는 너무도 살가웠다.
[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어떻게 여자가 남자 앞에서 그런 차림으로….]
페터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다프네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정작 그녀는 별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너 그렇게 더듬거리니까 꼭…. 아니야.]
[꼭, 뭐? 뭔데?]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아는 사람이 생각이 나서.]
[아는 사람 누구.]
다프네는 폭풍우가 치던 한여름에 킬라하 마을에 왔다. 벌써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으니 곧 있으면 정착한 지 1년이 되어 간다.
페터는 작년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일까. 언제부턴가 페터는 다프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넌 모르는 사람이야.]
[킬라하 마을에 내가 모르는 사람은 없어.]
[이 마을 사람이 아닌걸.]
[…그럼 어디 사람? 다프네의 고향 사람?]
[고향이라.]
여자는 콧잔등을 들썩이며 풀숲을 뛰어다니는 토끼들을 멀거니 구경했다. 그러고는 혼자 추억에 잠긴 것처럼 잠깐 침묵했다.
이럴 때마다 페터는 여자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우리 집에서 저녁도 먹고 갔으면서. 할머니랑 나랑 셋이서, 오붓하게.
[다프네는 외국인이잖아. 말투가 어눌한 걸 보면 확실하지.]
페터는 괜히 여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혹시 갈색 머리가 흔하다는 세스나 제국 출신일까. 작은 왕국인 데하힐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세스나 제국이었다.
데하힐은 영토의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고, 배를 타면 어디로든 못 갈 곳이 없다고들 한다.
화려하진 않아도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고운 얼굴이며,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실력을 보면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페터는 홀린 듯 다프네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그보다 이거 받아. 할머니가 너 가져다주래.]
[‘너’가 아니라 ‘다프네 누나’겠지. 머리에 비도 안 마른 게.]
[‘비’가 아니라 ‘피’거든. 나한테 데하힐어 다시 배울래?]
소년의 핀잔을 들은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처음 이 나라에 정착했을 때는, 무작정 집에 처박혀 언어 공부만 했었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건만, 가끔 이렇게 실수를 하는 걸 보면 아직도 한참 멀었나 보다.
[할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그런데 이게 뭐야?]
[마지막 봄 딸기. 잘 익어서 엄청 빨개.]
[네 얼굴처럼?]
[…내가 뭐가 빨갛다고!]
페터는 성질을 부리며 바닥을 쿵쿵 밟았다. 다프네가 아는 누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왕자님은 놀림을 받으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소심하게 울상을 짓고는 했었는데.
자유롭게 자라난 페터는 아셰라드렌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긴, 페터가 한참은 어리기도 하고.
다프네는 뒤늦게 바구니를 받아 들다 말고 멈칫했다.
[이거 뭐야?]
[딸기라니까.]
[아니, 딸기 말고 이 위에 덮어 놓은 거.]
[신문이잖아. 로이 아저씨가 밖에 내다 둔 걸 할머니가 주워 왔지. 할머니도 참, 자꾸 아무거나 주워 오지 말라니까.]
[잠시만 볼게. 들고 있어.]
페터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대다 얼결에 다시 바구니를 돌려받았다. 다프네가 딸기 물이 든 신문지를 펼쳐 읽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평소 맹하게 웃는 여자의 얼굴에만 익숙했던 소년은 덩달아 긴장하여 그녀의 곁에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목을 쭉 내밀어 신문 앞면에 걸린 기사 제목을 읽어 보았다.
[세스나 제국의 황제, 참수당해 목이 내걸리다….]
“…이럴 수는 없는데.”
[뭐가 이럴 수는 없어? 다프네 누나, 너 역시 세스나 제국 출신이야?]
[아니, 아니. 나는.]
다프네는 고개를 내저으며 신문을 덮었다. 그녀가 갑자기 테라스 주위를 서성이며 한숨을 쉬었다.
영문을 모르는 페터는 눈을 끔뻑거리며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다프네는 이내 신문을 다시 펼쳐 들었다.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전쟁이 막을 내린 것은 이미 한 달도 전이었다.
일부러 속세와는 동떨어진 시골로 들어오긴 했지만, 설마하니 주변 나라의 전쟁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살 줄은 몰랐다.
[페터, 너 전쟁이 일어난 줄 알고 있었어?]
[아니, 전혀. 나도 방금 알았는데.]
소년은 해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다프네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소설 속에서 두 나라의 전쟁은 이번 초겨울에나 시작될 예정이었다. 지난겨울이 아니라.
“이상하잖아. 대체 어떻게….”
여주인공이 죽어서 사건이 빠르게 진행되기라도 했나? 하지만 왜? 남주인공마저 죽어 버려서 물어볼 상대도 이젠 세상에 없었다.
물론 살아 있었다 해도 제국의 황제와 말을 섞을 기회 따위는 영원히 없었겠지만….
다프네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신문에서 눈을 떼려 애썼다.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이제 모두 남 일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레르베 라예트 왕국의 백성이 아니었다. 소왕국 데하힐의 킬라하 마을에 사는 시골 아가씨에 불과했다.
“그래도 어떻게 남주인공까지 죽을 수가 있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이 세계는 소설 속의 세상이 아니지 않나? 소설의 전개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데?
아니, 그 전에 이 기사는 말이 안 돼도 너무 안 된다. 세스나는 대륙 유일의 제국이라 불릴 만큼 막강한 나라였다.
레르베 라예트 역시 약소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스나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내가 아셰라드렌을 버리면서까지 끝끝내 왕성을 떠난 이유가 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남 일이라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남주인공 리카르도의 잘린 머리가 왕성 앞에 걸리다니. 대체 누가 그런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던 말인가.
[뭘 자꾸 혼자 중얼중얼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거야. 상태 안 좋으면 발 닦고 누워서 자.]
[아….]
식탁에 기대서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다프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뒤쫓아온 페터가 식탁에 딸기 바구니를 올렸다.
[이미 끝난 전쟁이라잖아. 우리랑은 관계없어.]
[그, 그렇지.]
[할머니가 기껏 누나를 위해서 따 온 것들인데. 맛도 보지 않고.]
[미안해. 지금 먹을게.]
다프네는 엉겁결에 페터의 말에 납득했다. 그래, 맞아. 소설의 전개는 이미 한참도 전에 틀어져 있었는데.
그리고 나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울보에다, 소심하고 순진했던 아셰라드렌이 이번 전쟁의 주역이었다 해도.
다프네는 신문을 접어 던져 버렸다. 지금은 달콤한 딸기에 집중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