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플 때는 의사, 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밤. 베이컨, 치즈. 꽤 오래 버티시는군요. 그러지 않을 이유라도?
날이 갈수록 혈색이 창백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셰라드렌의 어휘는 유창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모두 다프네를 보기 위해 꼭대기 층을 몰래 빠져나온 덕이었다.
다프네와 남자의 대화는 언제나 간결했다. 가끔은 아무런 대화 없이 지나가는 날들도 있었다. 남자가 나타나기도 전에 다프네가 방으로 사라진 탓이었다.
“…보고 싶, 어.”
늦은 밤, 그녀가 지나다니던 복도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돌아온 아셰라드렌은 사람으로 변하기가 무섭게 입을 뗐다.
짤막한 대화를 열심히 엿듣다 보니 유모가 그렇게나 혐오스러워하던 말을 더듬는 버릇도 약간은 나아졌다. 언젠가는 다프네와도 얘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아셰라드렌은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녀 또한 나더러 괴물이라고, 무섭다고 소리를 질러 대면 어떻게 하지.
“그, 그러면 정말로, 죽, 고 싶을지도….”
상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프네에게만큼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부디 내가 죽기 전까지는 이름 없는 성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이렇게 병들고 볼품없는 내가 죽으면, 남은 생을 꼭 행복하게 지내다 갔으면 좋겠다. 누구보다도 다프네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다프네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야.’
만약 내가 괴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인간 왕자였더라면. 다프네와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었을 텐데.
다프네를 알게 된 이후 아셰라드렌은 이 ‘만약’으로 시작하는 상상을 즐기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서의 그는 다프네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핏기가 다 사라진 입술을 끌어 올려 웃던 그는 이윽고 코를 움찔거렸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다만 그는 그것이 화약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그저 낯설고 불쾌한 냄새가 미세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왕성에서.”
냄새의 근원은 쫓겨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왕성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별다른 호기심을 갖지 못했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셰라드렌은 이불로 코를 막으며 눈을 감아 버렸다. 얼른 잠을 자야 다음 날에도 다프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눈을 떠야 했다. 무시무시한 굉음이며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들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예민한 그의 청각은 왕성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빠르게 감지할 수 있었다. 낯선 자들의 피비린내.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외치는 사람들.
이 시간에 들릴 리가 없는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까지.
“무, 무서워….”
그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오들오들 떨었다. 이런 일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저 멀리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갑자기.
겁에 질린 그의 몸이 자꾸만 줄어들려고 했다. 아셰라드렌은 끙끙거리며 변화를 막으려 했지만, 역시나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아, 다프…. 끼이잉.”
문득 그는 다프네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그녀 역시도 왕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할까.
왕성에서 이름 없는 성까지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복도에 난 창으로 작게 보이는 왕성을 본 적이 있으니, 그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급히 꼭대기 층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망설임은 조금도 없었다. 곧 있으면 왕성을 덮친 자들이 이름 없는 성에 들이닥칠 것이다.
“끼이잉, 끼이잉.”
그는 익숙하게 계단을 내려가 다프네의 방 앞에 섰다. 이 문을 열게 되는 날이 마침내 찾아올 줄이야.
하지만 기뻐할 틈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아셰라드렌은 하찮은 앞발을 들어 있는 힘껏 문을 긁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 설마.’
그는 낮아진 시야로 불안하게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불바다가 왕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제야 안에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프네는, 이곳에 없었다.
“왕! 왕!”
아셰라드렌은 정신없이 복도를 뛰어다녔다.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서 다프네를 찾았지만, 그녀로 보이는 그림자조차 마주칠 수가 없었다.
다프네가 없어. 다프네가 이름 없는 성을 떠났다.
절망적인 기분이 그를 에워쌌다. 어쩌면 지금쯤 다프네는….
‘아니야, 그럴 리가. 아, 안 돼. 안 되는데.’
그는 새하얀 털로 뒤덮인 얼굴을 마구 내저었다. 다프네가 왕성에 있다. 저 위험한 곳에,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곳을 향했다.
“명심하십시오. 왕자님께서는 절대로 이름 없는 성 바깥으로 나가서는…. 하, 왕자는 무슨 왕자. 이 더럽고 불길한 짐승아. 너는 세상에 네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돼. 왕가의 수치 같으니.”
어느새 발걸음은 이름 없는 성의 유일한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유모의 차가운 음성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두려웠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그는 이 성을 떠나서는 안 됐다.
평생 동안 들어 왔던 경고였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을 빠져나갔다. 흩날리는 재가 섞인 녹음을 맡으며. 짤따란 다리를 끊임없이 놀려, 피비린내가 짙어지고 있는 왕성으로.
[어라? 이게 뭐야. 성에서 키우던 개인가?]
[새끼잖아. 내버려 둬. 무의미한 살생까지는 하기 싫다.]
[하긴, 귀엽기도 하고.]
그러다 중간에 갑옷을 입고 피를 뒤집어쓴 병사들을 만나기도 했다. 뒷덜미가 낚아채졌을 때에는, 어째서 이럴 때는 거대한 짐승으로 변하지 않나 초조해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아셰라드렌이나 다프네가 쓰는 언어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셰라드렌은 그런 소소한 것 따위에 정신이 팔릴 여유가 없었다.
허공에 들려 열심히 버둥대던 그는 바닥에 내려지자마자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다프네의 냄새가 어디에서도 맡아지지 않았다. 왕성에 가까워질수록 피 냄새가 짙어진 탓이었다.
“왕! 왕!”
다프네! 다프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다프네를 불렀다. 그래 봤자 울부짖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윽!”
왕성과 이름 없는 성을 이어 주는 숲을 거의 다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옥죄는 듯한 고통이 일더니 기다란 팔이며 다리가 자라났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직감했다. 이것이 마지막이겠구나. 오늘이, 지금이.
“다프네.”
그렇다면 그녀와 한 번만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가던 내게 너는 유일한….
“컥!”
울컥 토해 낸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셰라드렌은 거칠게 입가를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시체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싫은 기색도 없이 저와 덩치가 비슷한 남자의 옷을 벗겨 입었다. 유모가 극도로 혐오하던 제 몸을 다프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핏물이 묻어 끈적한 셔츠와 바지는 입기도 힘들고, 손목이며 발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았다. 아셰라드렌은 혀를 차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부드러운 발바닥에 돌부리가 찍히는 것은 아프지도 않았다.
심장이 타는 듯 조여 오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나무를 짚은 채 비틀비틀 서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프네의 냄새를 찾아 헤맸다.
내가 다프네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어. 그는 계단에 숨어서 지켜보곤 했던 다프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저쪽에. 있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다프네가 있는 곳. 그녀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셰라드렌은 다프네는 물론이고 그녀를 둘러싼 주변 환경까지 세세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내 그는 불타오르는 왕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세스나 제국의 병사들에게 가로막히기도 하고, 목에 칼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는 온갖 방해물들을 깨끗하게 치워 버렸다.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했는지 따위는, 글쎄.
새까만 연기를 들이마시며,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 내던 그는 마침내 기둥에 깔려 쓰러진 다프네를 찾아낼 수 있었다.
눈을 감았을 때 보였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왕자는 초인적인 힘으로 기둥을 밀어내고, 엎드린 상태로 정신을 잃은 그녀의 귓가에 처음으로 속삭였다.
“죽지 마, 다프네. 너는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어.”
다른 사람들 따위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너만, 오직 너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왕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프네를 안아 들었다.
눈을 뜬 그녀는 그 끔찍한 혼란 속에서도 그를 알아보았다. 그러자 그 사실이 너무나도 기쁘고 고마워서.
아셰라드렌은 다프네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제 보잘것없던 인생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이라 믿었다.
그는 왕성을 뒤로하고 밤하늘이 아름다운 언덕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아무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는 장소, 그가 눈을 감기 완벽한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