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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79)화 (78/123)

79화

충격에 날아간 의식이 돌아왔을 때, 아셰라드렌은 다시금 혼자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는 피 웅덩이가 고여 있고, 주위에는 그가 입고 있던 옷의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

아셰라드렌은 직감할 수 있었다. 또 괴물로 변하고 말았구나. 그래서 그 여자를….

“주, 주, 죽였,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꼭대기 층은 조용했다. 여자가 제 배를 가르려 했던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소리 죽여 울었다. 역시 유모는 틀리지 않았다. 그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는 안 됐던 거다. 그래서 이런 곳에 갇혀 있던 주제에.

그날 이후로 소년은 다짐했다. 누가 와도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 말자. 아무도 모르게, 쥐 죽은 듯이 살아가자.

“식사입니다.”

신기하게도 다음 날에도 여자가 왔다. 새로운 여자. 그를 해부하려 들었던 여자와는 다른 사람. 아셰라드렌은 더 이상 문 뒤의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참을 기다렸다 식사를 하고, 빈 그릇을 바깥에 내다 두고, 멍하니 앉아 시간을 죽이다 이따금씩 조그맣게 변하면 바닥을 뒹굴며 놀기도 했다.

그의 공간에는 어릴 적에 그와 함께 버려진 아기들을 위한 인형들도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아셰라드렌의 친구들이었다.

이가 간지러울 때면 인형을 물어뜯기도 하고, 잠이 올 때면 그들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시간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해가 바뀌어도 아셰라드렌은 깨닫지 못했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하루였다. 문밖의 여자들은 조금 익숙해질 만하면 목소리가 바뀌어 있었다.

“이, 이제는 아무 짓도… 하, 하, 하지 않, 는데.”

그러나 오늘도 새로운 여자가 왔다. 그녀는 전에 왔던 다른 여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한마디를 하고 사라졌다.

“…식사입니다.”

아셰라드렌은 여자의 인기척이 완벽하게 사라진 후에야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았다.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 한 잔과 마찬가지로 아직 식지 않은 샛노란 계란 요리.

“…어?”

쟁반 위에는 전에 보지 못한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천천히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 들었다. 연분홍색 꽃 한 송이였다.

“다, 달콤한.”

냄새. 꽃가루가 코끝에 묻는 것도 모르고 그는 정신없이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날이 많이 따뜻해졌다.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흘렀을까? 이따금씩 비가 오면 꼭대기 층에는 물웅덩이가 생겨나고는 했다.

아셰라드렌은 거울처럼 그 웅덩이에 저 자신을 비춰 보았다. 허리까지 기른 덥수룩한 은발 사이로 초췌하고 창백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꽃향기를 들이마시며 아침을 먹었다. 그릇을 내놓은 뒤에는 작은 짐승으로 변해 꽃송이를 물어 인형들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낮잠을 잤다. 저녁을 먹고, 다시 죽은 듯이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여자가 무뚝뚝한 어조로 문가를 두드렸다.

“식사입니다.”

⋆★⋆

아셰라드렌은 놀랐다. 오늘 저녁도 음식이 따뜻했다. 새로운 여자가 올 때면, 매번 첫 끼만 따뜻했을 뿐 그 후부터는 차게 식어 질긴 고기를 뜯어야만 했다.

그런데 여자가 오고 나서는 아침이건 저녁이건 상관하지 않고 음식의 상태가 훌륭했다. 가짓수도 많았다.

그동안 다른 메이드들이 값비싼 메뉴들은 은근슬쩍 빼돌리곤 했다는 걸 몰랐던 아셰라드렌은 그저 이 변화가 신기하기만 했다.

“오, 오늘도… 다, 달콤한.”

저녁 식사와 함께 나온 바나나 푸딩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본 그가 감탄했다. 행복한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벌써 며칠째던가. 여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설마 여자는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 그, 그럴 리가, 어, 없어.”

아셰라드렌은 자조했다. 괜한 기대를 했다가 실망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는 부디 여자가 그와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바랐다.

여자는 조용했고, 그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매번 칼같이 시간을 지켜 식사를 준비해 두고는 했다. 이제 아셰라드렌은 식사 시간이 기다려졌다.

여자가 이따금씩 그를 위한 선물을 남겨 두고는 했으니까.

‘오늘은 구슬이네.’

구슬이 아니고 사탕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아셰라드렌은 작은 짐승이 되어 구슬을 물고 인형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침으로 축축해진 구슬을 이리저리 굴려 보며 놀고 있는데, 자꾸만 그것을 맛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아셰라드렌은 분홍색 혀를 내밀어 구슬을 슬쩍 핥아 보았다.

“……!”

그러고는 혀가 아릴 정도의 단맛이 놀라 귀를 쫑긋 세웠다. 바깥의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신기하고 멋진 선물들을 그에게 선사하는 걸까? 아셰라드렌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기쁘게 구슬을 맛보았다.

그러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으.”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다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지끈지끈 조여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그는 영문을 모른 채 눈만 깜빡거렸다.

입가에 딱딱하게 굳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더러워서는 안 되는데. 허겁지겁 일어나 욕조에 물을 받아 넣었다.

아셰라드렌은 제 수명이 끝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몰랐다. 누구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욕조에 쪼그려 앉아 입술을 벅벅 닦는 데만 집중했다. 소년의 머릿속은 온통 얼굴도 모르는 여자로 가득했다.

건강을 잃어 가고 있는데도. 살아갈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

“식사입니다.”

“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같이 여자가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가 문 앞에서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그렇게나 소심한 목소리가 여자에게 닿을 리는 없었다. 여자는 이내 사라졌고, 아셰라드렌은 울적하게 문을 열었다. 쟁반 위에는 찢어진 종잇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 오래됐어.”

그는 알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한 종이를 킁킁대며 중얼거렸다. 오래된 냄새가 났다. 뭐라고 쓰여 있을까? 여자, 그러니까 다프네는 평생을 갇혀 살아온 그를 위해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시 한 구절을 남겨 주었다.

다만 선물을 받은 장본인이 글을 읽을 줄을 몰라 종잇조각은 의미 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소중한 쓰레기.

아셰라드렌은 종잇조각을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요즘 그는 갑자기 혼절하는 일이 잦아졌다.

“언제 또….”

정신을 잃었을까. 차가운 바닥 위에서 눈을 뜬 그는 제일 먼저 품속의 종잇조각부터 확인했다.

아셰라드렌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아까는 아침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밤이었다. 식사를 하고 쟁반을 내놓지도 않았는데 문 앞에는 새로운 식사가 놓여 있었다.

여자는 그의 식사를 챙기는 것을 업무로만 보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아셰라드렌은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차라리 이게 나았다. 여자는 그에게 무관심하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는 않았다.

“…다프네 양. 제가 도와드릴 게 있습니까?”

“아뇨, 딱히.”

대신, 여자를 향한 아셰라드렌의 지대한 관심만 한없이 늘어났다.

“절대로 문밖으로 나가서는 안 돼. 네게 허락된 공간은 이 꼭대기 층이 유일하니까.”

유모는 분명 그렇게 그를 협박했고, 아셰라드렌은 세뇌가 된 것처럼 그 말을 믿고 따랐다. 그랬던 그가, 한 번은 난데없이 그 ‘금기’를 어긴 적이 있었다.

이유는 오직 여자였다. 여자가 너무도 궁금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날, 아셰라드렌은 기어코 꼭대기 층에서 내려와 계단에 숨어 그녀를 지켜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다프네 양,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래요. 별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때마침 작은 짐승으로 변해 다행이었다. 계단 아래에 있던 두 남녀 중 누구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셰라드렌은 동그란 보랏빛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처음으로 여자를 눈에 담았다. 단정하게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머리, 예전에 봤던 여자와 같은 새까만 복장.

이제 아셰라드렌은 제 관심을 독차지한 여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다프네.’

한번 선을 넘자,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다프네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그에게 식사를 챙겨 줄 때 빼고는 아예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대체 저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짧고 하얀 네 다리로 뽈뽈 계단을 내려온 그는 열심히 코를 킁킁대며 그녀의 흔적을 쫓았다.

한 번만 더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셰라드렌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그녀가 있을 벽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끼잉….”

그러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던 날은, 혹시나 제 끔찍한 모습을 들킬까 싶어 정신없이 달려 꼭대기 층에 돌아온 적도 있었다.

‘다프네랑 무슨 얘기를 했을까.’

계단 위에 숨어 다프네를 지켜볼 때면, 종종 튀어나와 그녀에게 말을 걸고는 하는 남자도 있었다. 언젠가 꼭대기 층에 와서 제게 인사를 건넸던 것도 같은데.

하지만 제대로 기억하고 있진 않았다. 아셰라드렌은 평생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남자란 건 죄다 저렇게 시커멓고 커다란가? 요즘은 나도 저렇게 커다래진 것 같기도 한데.

아셰라드렌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프네를 구경하다, 숨이 가빠져 제 방으로 향했다. 또 다. 또 핏물을 왈칵 토해 내고 있었다.

“우으….”

이제 곧, 나는 죽겠구나. 아셰라드렌은 체념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번 정신을 잃으면 다시 눈을 뜰 때까지의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아픈지도 모르겠고, 평생 성 밖으로 나간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짧고 보잘것없는 인생 속에서 다프네를 알게 되어서 감사했다.

그녀와 단 한 번이라도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아셰라드렌은 작디작은 몸을 움찔 떨며 하얀 털로 덮인 발을 쭉 뻗어 보았다. 지금 당장 닫힌 문을 열고 다프네가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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