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게 아니야, 이 멍청한 것! 왜 몇 번을 가르쳐 줘도 이해하질 못하지?”
“으, 우….”
날아오는 채찍질이 두려워, 소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유모가 제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벌거벗은 앙상한 몸, 가느다란 팔다리. 어제의 그는 작고 복슬복슬한 짐승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눈을 떠 보니 또 몸이 바뀌어 있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유모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새빨간 입술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네 흉측한 몸 따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어서 옷을 입으란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저를 볼 때마다 언제나 화를 내고는 했다. 유모의 손에 들린 기다란 채찍이 바닥을 가르자, 아셰라드렌은 몸을 달달 떨며 먼지가 잔뜩 달라붙은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폐하께서는 대체 왜 이런 일을 내게 맡기셨는지…. 난 레티스 공주님을 맡는 줄 기대하고 왕성에 들어왔는데.”
그는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유모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바지를 올려 입었다. 단추를 잠그려고 했지만 손톱이 길고 더러워 좀처럼 끼워지지 않았다.
그는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유모는 별 해괴한 것 다 보겠다는 듯이 아셰라드렌을 노려봤다.
“더럽고 불결해. 그 손은 짐승일 때와 다를 바가 없구나.”
그러더니 거칠게 그의 손을 잡아, 불쑥 작은 가위를 꺼냈다. 저렇게 나를 싫어해도 나는 유모밖에 없는걸.
소년은 울음을 참느라 애를 쓰면서도 유모의 따스한 손길에 집중하려 했다.
“악!”
그러나 그녀는 자비가 없었다. 손톱을 너무 바짝 자르는 바람에 손끝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잖아! 그 역겨운 손톱을 계속 갖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흑, 나, 나, 낫지… 아, 않겠…어.”
“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병신같이 말을 하는 꼴을 볼 때마다 내 속이 터지는 것 같아.”
유모는 인상을 쓰며 거침없이 그의 손톱을 잘라 나갔다. 소년은 따끔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훌쩍였다.
그러나 그 훌쩍임조차 유모에게는 거슬렸는지, 그녀는 온갖 성질을 부리며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접시를 내팽개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다시 오도록 하마.”
어린 소년은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쭉쭉 빨았다. 새까만 바닥에 흩어진 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에 시선을 빼앗긴 그는 유모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몰랐다.
역겹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가 이내 사라졌다. 아셰라드렌은 허겁지겁 몸을 숙여 고깃덩이 하나를 물었다.
배가 고팠던 그는 고기를 몇 번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켜 버렸다. 소년은 대개 하루에 한 끼를 먹었지만, 유모의 심기가 불편한 날은 아예 쫄쫄 굶어야만 했다.
그녀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성에는 오는 건지 귀를 기울여 보면 아래층에서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는 들려오고는 했다.
가끔은 괴로운 듯 소리를 질러 대기도 했고. 그러다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럴 때면 유모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셰라드렌은 아직 본 적이 없는 남자, 라는 것. 유모는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내가 못나고 멍청한 탓이니까….’
그는 바닥에 뭉개진 감자를 쓸어 모아 입에 집어넣었다. 다 식어 빠진 음식들이었는데도 어제 하루를 통으로 굶었더니 눈물이 날 만큼 맛이 좋았다.
소년은 목구멍이 막히도록 감자며 고기를 우걱우걱 씹어 대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툭. 투둑. 천장에 난 작은 구멍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이마가 떨어진 빗물을 닦으며 자리를 구석으로 옮겼다.
콰앙!
“악!”
손에 묻은 소스를 샅샅이 핥아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유모가 화난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이내 아셰라드렌을 찾았다.
“비가 와서 왕성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여긴 마차가 들어서지도 못하는 곳인데!”
“비, 비가 와, 와, 서….”
“닥쳐. 따라 하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
“다, 닥쳐….”
“역시 껍데기만 인간이라 그런지 짐승보다도 못한 지능을 가지고 있구나.”
유모가 쏟아 낸 마지막 말은 너무나도 빨랐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 역시?’ 하고 중얼거리다 그녀에게 팔뚝을 잡혔다.
“…아?”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지 마. 눈 내리깔라고.”
때마침 번개가 내리쳐 시야가 한순간 어두워졌다. 깜짝 놀란 아셰라드렌이 눈을 감았다 뜨자, 유모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를 질질 끌어갔다.
“어, 어디. 어, 어, 어디….”
“어디에 가냐고? 당연히 욕조지. 한참도 전에 씻는 법을 가르쳐 줬는데, 왜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이런 악취를 풍기고 있지?”
아직 작고 어렸던 아셰라드렌은 유모가 한 손으로도 덜렁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그가 유모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이, 그녀는 소년을 욕조에 집어넣고 물을 콸콸 받기 시작했다.
유모는 주변에 있던 비누를 욕조에 던져 넣더니 다리를 달달 떨며 물이 차오르길 기다렸다. 물이 반쯤 차올랐을 때였다. 그녀가 아셰라드렌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잡아 물속에 처넣었다.
“…읍, 욱!”
“마음만 같아선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사인은 혼자 물장구를 치다 익사. 네가 죽으면 폐하도 기뻐하실 텐데.”
“악, 커헉!”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 안에 비누가 들어가 따가웠다. 아셰라드렌은 미친 듯이 물을 삼키며 발버둥을 쳤다. 유모의 힘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숨이 막혀. 정말로 죽을 것 같다.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갔다. 유모의 말대로 저가 죽으면 아바마마가 좋아하실까.
그러나 소년은 죽고 싶지 않았다.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배곯으며 비참하게 살아간다 해도 그는 살아남고 싶었다.
새벽에 잠깐 눈을 뜨면 보이는 이슬이 맺힌 거미줄. 공중을 부옇게 돌아다니는 반짝이는 먼지들. 쿰쿰한 냄새가 나긴 해도 그의 작은 몸을 따뜻하게 안아 주는 회색 담요.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니. 억울했다. 아셰라드렌은 비명을 지르며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꺄아아악! 지, 징그러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옥죄고 있던 손길이 사라졌다. 아셰라드렌은 정신없이 고개를 쳐들고 숨을 들이마셨다.
코가 맵고 눈이 뜨거웠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비눗물을 토해 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모가 왜 저렇게 작지. 아니다, 내가 높은 곳에 있는 건가. 하지만 난 방금 전까지 욕조에 앉아서….
“컹!”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벌리자 나오는 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가끔씩 몸이 멋대로 이렇게 변하는 때가 있었지.
그럴 때마다 유모는 자지러질 듯 그를 두려워하며 도망치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의 유모는 그럴 정신도 없어 보였다.
비눗물로 축축해진 유모의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시선을 조금 옮겼다. 유모가 근처에 놓아둔 채찍을 집어 들려 하고 있었다.
싫어. 저건 아픈데.
소년은 유모를 말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그러했듯 그도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다. 이건 손이 아니었다. 유모에 따르면 이것은 괴물의 발이었다.
“아아아아!”
그는 그저 채찍을 빼앗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유모가 갑자기 몸을 뒤틀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채찍은 저만치 멀리 던져져 있었고, 그녀의 팔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너 어떻게, 이, 이, 이런! 소, 손이, 손이 잘렸….”
언제는 저더러 미련하게 울지 말라더니, 유모가 더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그제야 아셰라드렌은 채찍만이 허공을 날아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는 위험한 괴물인 모양이었다. 서글퍼진 그는 유모에게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괜찮지 않겠지.
소년은 유모가 저렇게까지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난생처음 보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셰라드렌은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유모는 꺽꺽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흐윽, 윽… 망할, 자식. 여태까지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은혜? 그게 무슨 뜻이지. 전에도 몇 번 유모가 은혜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이 있어 그때마다 아셰라드렌은 더듬더듬 그 뜻을 묻고는 했다.
그러나 유모는 ‘그런 것도 모르니까 네가 이런 데 갇혀 있는 것’이라며 저를 비웃었다. 시무룩해진 아셰라드렌은 머리에 달린 귀를 축 늘어뜨리며 그녀의 움직임을 살폈다.
유모는 시뻘게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문가로 다가가 줄행랑을 쳤다.
“크르릉!”
“아악!”
저 문 너머로는 절대로 갈 수가 없다. 언젠가 그를 보러 왔던 아바마마가 그렇게 명령했고, 유모도 저가 문가 가까이 있을 때면 불같이 화를 내고는 했다.
아셰라드렌은 문 근처를 서성이며 유모를 불렀다. 그러나 나오는 소리라고는 알아먹을 수도 없는 울부짖음밖에 없었다.
그 소리를 들은 유모가 멀리서 지른 비명에 귓가에 들어왔다. 아셰라드렌은 피와 비눗물로 축축해진 제 앞발을 혀로 핥으며 훌쩍였다.
아마 유모는 내일 나를 보러 오지 않겠지. 굶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유모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녀조차 만날 수 없다면 그는 망가질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