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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76)화 (75/123)

76화

“…왕자님.”

우선은 이 자리를 떠야 했다. 나는 아셰라드렌의 두꺼운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자기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면서, 이래서야 어떻게 한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나는 그가 미우면서도 안쓰러웠다. 하지만 곁에 남는 것만큼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얘, 너 왕자님을 진정시킬 수 있겠니?”

프리지어는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사실 모두가 나와 아셰라드렌의 근처에도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는 늑대의 목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변신한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혹시 그가 날뛰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불안해진 나는 턱을 덜덜 떨었다.

“다프네 양! 당신도 위험합니다!”

시르시안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러나 저런 말을 해 봤자 아셰라드렌의 심기를 거스를 뿐이었다. 늑대가 된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쿵! 하고 커다란 앞발로 바닥을 찍어 눌렀다.

그러자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개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었는데, 바짓가랑이가 점점 축축하게 젖기도 했다.

저렇게까지 무서워할 일인가. 덩치만 클 뿐이지 이성도 남아 있고 말귀도 잘 알아듣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아셰라드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기사들은 뭣들하고 있는 거야! 당장 끌어내! 누가 다치면 어쩌려고!”

누구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이, 군중 속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즈음 왕성을 지키는 경비병들도 도착해 아셰라드렌을 향해 기다란 창을 겨누었다.

“거기 계시는 아가씨께서도 얼른 물러나시길 바랍니다!”

“아니에요, 저는….”

“그 말 들어! 너도 다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나는 괜찮다고, 왕자가 나를 해칠 리는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프리지어가 일을 더 크게 만들지 말라는 듯 내게 손짓했다.

그런가? 여기선 일단 그녀의 뜻대로 하는 게 나은가? 사실 내가 어떻게든 아셰라드렌을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그가 나체인 상태일 테니 또 다른 난리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저 많은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야 아셰라드렌 하나를 옮기는 게 낫겠지. 하지면 과연 가능할는지.

나는 아셰라드렌과 프리지어를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시간 끌지 말고!”

그러다 프리지어의 호통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래, 맞아. 내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어 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셰라드렌을 한 번 꼭 끌어안아 준 뒤 재빨리 프리지어를 향해 달려갔다.

콰앙!

프리지어가 나를 제 뒤로 숨기는 것과 동시에 아셰라드렌이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러더니 금세 고개를 들고 내 쪽을 노려보았다.

부스러진 돌조각들이 하얀 털에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그는 내게 다가오려는 듯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놀란 경비병 하나가 아셰라드렌을 창으로 내리쳤다.

“으아아악! 우, 움직이지 마!”

“크르릉!”

반사적으로 늑대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셰라드렌이 앞발로 경비병을 쳐 냈다. 인간이라는 게, 저렇게 종잇장처럼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존재던가? 벽에 몸을 부딪친 경비병이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쓰러졌다.

“사, 사람을… 해쳤잖아! 대체 왕실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것을!”

누군가 혀를 차는 것을 시작으로, 경비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아셰라드렌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꼼짝도 못 하게 에워싸인 늑대의 안광이 무시무시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는 직전과 같이 섣불리 행동하지는 못했다. 경비병 하나를 크게 상처입힌 탓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셰라드렌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저것을 다시 이름 없는 성에 처넣어야 한다고, 저런 흉한 것을 왕자로 모실 수는 없다고 쑥덕거렸다.

“일을 아주 크게 저질렀구나. 당분간 곤란하겠어.”

경비병들과 대치하는 아셰라드렌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프리지어가 한숨을 쉬었다. 짜증스레 나를 돌아본 그녀가 내 손목을 쥐었다.

“떠날 거라면 진작에 떠났어야지. 난 네게 기회를 많이 주었어. 칠칠치 못하게 기사님이 왕자님께 연락을 할 시간까지 주다니.”

여기서 말하는 기사란, 예니체 경을 뜻하는 거겠지. 하지만 난 설마 예니체 경이 그런 짓을 저지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를 믿었는데. 이름 없는 성에서 쌓아 왔던 우리의 유대감을 믿었는데. 나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정말로 떠날 거니? 왕자님의 곁에 남지 않아도 되겠어?”

“…이미 붙잡아 와 놓고 그런 걸 물으셔 봤자.”

“왕자님께 장단을 맞춰 준 것뿐이야. 네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넌 왕성을 나갈 수 있어.”

손목을 쥐고 있던 프리지어가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내 턱을 잡아 저를 보게 만들었다. 당황한 시야에 아찔할 정도로 고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들어왔다.

“그래, 지금이 딱이겠네.”

“진심이신가요? 멋대로 도망갔다고, 벌을 받거나 하는 건.”

“내가 왜? 난 이왕이면 너도 사라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다. 갑자기 턱을 붙든 그녀의 손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비틀비틀 뒷걸음을 쳐 프리지어와의 거리를 벌렸다. 픽 웃은 그녀가 손을 뻗어 나를 밀어냈다.

“어서 가.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그것으로 끝이었다. 프리지어는 내게 관심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직까지도 경비병들을 경계하는 중인 아셰라드렌이었다.

‘그래, 프리지어라도 아셰라드렌과 함께 있어 준다면.’

심장이 조이는 듯 아프고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셰라드렌은 지금 내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당장 사라져야 했다.

“이쪽입니다.”

인파를 뚫고 나가려는데, 누군가 나를 이끌었다. 너른 등을 멀거니 바라보며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시르시안은 아셰라드렌 때문에 통행이 막힌 마차 여러 대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 나를 안내했다.

“그 금화들을 사용하는 날이 이렇게나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요.”

그러고는 빈 마차 하나에 나를 태우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레티스와 실비아를 죽인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누나였나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을 삼키고 나는 짐 가방을 품에 껴안았다.

“건강하세요.”

세스나 제국이 이 나라를 짓밟아 누를 때까지. 그리고 그날이 오면, 아셰라드렌의 길동무가 되어 주기를.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으니까, 너희들이라도.

“다프네 양도 건강하세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오면 좋겠군요. 좀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왕자님께서 이쪽을 보고 계세요.”

마차의 창턱에 팔을 걸치고 있던 시르시안이 움찔하며 몸을 떼어 냈다. 아셰라드렌이 기어코 경비병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피가 솟구치는 저 광경을 마지막으로 작별해야 한다니.

나는 참혹한 현장에서 눈을 돌렸다. 저래서야 아셰라드렌의 미래는 폭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제가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럼, 다프네 양. 안녕히.”

“…네, 안녕히.”

하지만 과연 당신이 간다 해도 아셰라드렌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니, 내가 지금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이제 왕성의 사람들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이곳에서의 모든 일들은 이제 남 일이었다.

“제일 가까운 항구로 가 주세요.”

나는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어 마부에게 부탁했다. 아셰라드렌이 있는 쪽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함께 떠나고 싶었는데.’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미련을 완전히 떨쳐 내지는 못했다. 쿵, 쿠웅! 쿵! 뒤편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무언가가 박살이 나고 무너지는 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안녕히 계세요, 왕자님. 행복하세요.”

어차피 듣지도 못할 테지만.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

밤늦게 항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뜻밖에 난관에 봉착했다. 여관에 묵을 때 내는 돈이며 데하힐로 넘어갈 배를 살 돈으로 쓰기에 금화는 너무 큰 단위였던 것이다.

“왜 이걸 이제야….”

그래도 메이드 일을 하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아 뒀기에 망정이지. 나는 여관 바닥에 금화를 쏟아부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것들을 좀 더 작은 부피로 바꾸어야겠다고.

“내일 보석상에라도 가 봐야겠다.”

다행히도 배가 출발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힘들고 지쳤으니까 푹 쉬고, 내일 아침에 움직이는 게 좋겠다.

나는 금화를 다시 챙겨 넣은 뒤 목욕물을 요청했다. 지금부터 깨끗하게 씻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죽은 듯이 잠이 들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겁네. …응, 즐거워.”

속으로만 생각하면 별로 와닿지 않을 것 같아 입 밖으로 내 보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셰라드렌이 사납게 울부짖던 모습이 아직도 잔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목욕 준비가 될 때까지 침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어 버렸다. 사실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나는 아셰라드렌이 내년 이맘때쯤에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는데.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나 혼자라도 살아남겠다고 결국 도망쳐 나오다니. 왕성에 있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나는 단추를 풀고 헐떡거려야만 했다.

괴롭고 슬펐다. 그리고,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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