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75)화 (74/123)

75화

“…언제부터였어요. 예니체 경, 혹시 왕자님께 미리 얘기를 들었나요?”

나는 아셰라드렌을 못 본 체하며 예니체 경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토록 끔찍한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고 싶기도 했다.

농락당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아셰라드렌과 예니체 경에게. 내가 가장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변명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예니체 경이 벽처럼 나를 막아 세웠다. 아셰라드렌이 울적한 낯빛으로 내 앞에 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나를 두고, 가려고 한 거야? …나를, 버리고?”

“…왕자님은 이곳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면서요.”

“그래! 그리고 다프네도, 여기서 살 거야. 나랑, 왕성에서.”

왕자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자국이 남을 만큼 강한 손길이었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구는 건 역시 내가 아는 아셰라드렌이 아니었다. 그가 화를 내면 낼수록, 나는 그에게서 마음이 떠나갔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사직서를 낼게요. 그러니….”

“그러면, 어, 어디로, 갈 거야? 가지 마, 다프네. 내 곁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응?”

그가 기어코 울기 시작했다. 홀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았다.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예니체 경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우스테 가문의 남매들은 이 신파극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보다 못한 프리지어가 나섰다.

“왕자님, 우선은 자리를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는 건 결코 옳지 않아요.”

“시끄, 러워. 참견하지 마.”

“…그런 언사도 삼가시는 게 좋겠어요. 이곳은 어디까지나 우스테 소유의 은행입니다. 주인 아가씨가 제집 마당에서 모욕을 듣고 있는 걸 보는 아랫것들 심정이 어떻겠어요?”

프리지어는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셰라드렌을 설득했다. 그는 딱히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지만, 별수 없이 나를 제 쪽으로 힘주어 잡아당겼다.

“왕성으로, 도, 돌아간다. 다프네랑 둘만 있고 싶으니까, 프리지어는 그만, 가 봐.”

“그럴 수 없습니다. 저희 저택에서 저녁을 드시기로 하셨잖아요?”

흥분한 아셰라드렌을 보면서도 프리지어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이 금화들을 아셰라드렌에게 돌려주면 나를 놓아줄까. 물론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는 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놔주세요. 저는 이제 더는 왕성에 있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고집을 부렸고, 그 탓에 프리지어의 눈총을 받았다. 그녀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너도 주제넘은 반항은 그만두렴. 일을 왜 자꾸 복잡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구나.”

“…실례가 많았습니다. 말씀대로 제가 주제도 모르는 바람에 큰 소동을 일으켰네요.”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 생각하니 멋대로 비꼬는 듯한 어조가 튀어 나갔다. 프리지어는 이런 내 무례한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가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밖에 내 마차가 세워져 있어. 왕자님과 그 마차를 타고 왕성으로 가거라. 나는 시르시안과 뒤따라갈 테니까.”

프리지어가 베푸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친절인지 아닌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아셰라드렌에게 질질 끌려가 은행을 나가야만 했다.

그 와중에 차마 나를 보지도 못하는 예니체 경을 쏘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미워.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미웠다.

내가 은행으로 향하리라는 것은 시르시안이 말했겠지. 나는 완벽하게 저들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

“그 금화는, 이런 식으로 쓰라고 준 게 아니었는데.”

우스테 가의 휘황찬란한 마차에 오르자마자 아셰라드렌은 내 가방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을 뚝뚝 흘려 대며 가쁜 숨을 뱉어 냈다.

“돌려드릴게요. 어차피 왕자님이 발견하신 것들이니까요.”

“…됐어. 내가 다프네한테, 선물로 준 거잖아.”

“어차피 쓰지도 못하게 하실 걸 왜 주셨는지 모르겠네요.”

“…다프네. 자꾸 날, 아프게 하지 마.”

내가 무얼? 나는 기가 차서 가방을 꽉 잡아 쥐었다. 아셰라드렌은 지금 나를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있었다.

차라리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이제 다시는 왕자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나중에 가서는 이 생각을 후회하는 날이 오겠지만, 지금만큼은 치가 떨릴 정도로 그가 미웠다.

“어차피 이 나라는 세스나 제국이 무너뜨릴 거예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왕자님은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시고….”

왕성의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했는데. 19년 평생을 이름 없는 성에 유폐되어 살았음에도 당신을 외면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필요하다 싶으니까 어화둥둥 받들어 모시기 바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왕자는, 지금이라도 사랑받으니 상관없다는 건가?

나는 분노했다. 눈꼬리가 새빨개진 아셰라드렌의 청순한 얼굴이 더 이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믿어. 다프네, 네 말을, 믿어. 나는.”

“아, 그러시겠지요. 왕성을 떠나지는 않으시겠지만요.”

“난, 그곳에서 태어났어.”

“자라지는 않으셨잖아요.”

“계승법에 따르면, 내가 정당하게 물려받을 장소야.”

계승법이니, 정당함이니, 아셰라드렌의 입에서 그런 어려운 단어들이 흘러나오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눈만 끔뻑거렸다.

역시 아셰라드렌은 교육이 부족했을 뿐, 지능 자체가 멍청한 건 아니었나 보다. 그런 그를 데리고 망명을 떠나고 싶어 했던 것 자체가 내 욕심이었을까.

“내가 이 나라를, 지킬게. 내가 강하고 똑똑해져서… 다프네가 살아갈 이 나라를, 무너지지 않게, 어떻게든 노력할 테니까… 제발.”

나를 마주 보고 앉은 그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중간중간 힉, 하고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렇게까지 서글프게 울다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심장을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왕성을 탈출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든 이 나라를 지키겠다 약속해도 나는 그 말을 믿어 줄 수 없었다. 세스나 제국은 레르베 라예트 왕국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대한 국가였으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왕국이 제국의 침략을 막아낼 가능성은 없었다.

내가 직접 겪었던 그와 나의 비참한 최후는 그만큼 내게 절대적이었다. 왕국을 떠나는 것 말곤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됐다.

“도착했습니다, 왕자님. 왕성입니다.”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 대는 아셰라드렌의 눈가를 닦아 주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마차가 멈춰 섰다. 떡 벌어진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헐떡이는 그는 마부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 것처럼 보였다.

“왕자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시 왕성에 돌아왔네요.”

기분도 상황도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뒤쪽에서는 우리를 따라온 프리지어와 시르시안이 탄 마차가 막 도착한 참이었다.

“…다프네, 안아 줘. 응?”

아셰라드렌이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또 나를 아프게 잡으려나. 원체 힘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나를 그렇게 함부로 대할 줄은 몰랐다. 나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죄송해요. 왕자님이 무서워서 안아 드릴 수가 없어요.”

“…아, 아셰라고, 불러 줘. 그리고 난 무섭지, 아, 않아. 언제는 날 더러 귀, 귀엽다고.”

“이름 없는 성에 있을 땐 귀엽고 사랑스러운 솜사탕 같은 분이셨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동화 속 왕자님이 입을 법한 반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그는 더 이상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우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 넓다.

나는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셰라드렌이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읏, 몸이 이, 이상해…. 다프네, 나 좀 안아 줘. 흑, 제발….”

뭔가 이상한데. 그제야 나는 얼굴을 들었다. 아셰라드렌이 괴로운 듯 제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건가? 급히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목덜미를 긁어 대던 아셰라드렌의 손톱이 길고 날카롭게 자라났다. 그러더니 어깨며 허벅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 안 돼요. 왕자님, 여기서는!”

나는 이 과정을 알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아셰라드렌이 거대한 늑대로 변해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왕성의 입구 쪽에서.

심지어 우리는 아직 마차 안에 있었다. 늑대로 변한 아셰라드렌의 덩치를 감당하기에는 마차 내부가 너무 좁은데.

“큭, 윽…. 다프.”

내 이름이 꼭 단말마처럼 들려왔다. 괴로워하던 아셰라드렌의 옷가지가 찌직, 하고 찢어져 나갔다. 그가 그르릉, 낮게 울부짖었을 때는 이미 마차가 폭삭 내려앉은 뒤였다.

“꺄아악! 저게 뭐야! 저게 무슨 일이야!”

마차 바퀴가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추락할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셰라드렌이 재빠르게 등을 숙여 나를 받아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직후였다. 왕성을 오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마차에서 튀어나온 집채만 한 늑대를 보고 놀라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괴물이다! 우린 모두 여기서 죽을 거야!”

수십 명에 달하는 이들이 아셰라드렌을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당장 기사들을 부르라며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다 주저앉기도 했다.

“입 다물어 봐! 저건 분명 얼마 전까지도 폐왕자셨던…!”

“저 위험한 것을 세상 밖에 내놓았단 말이야? 말세로군!”

아셰라드렌의 푹신한 등에 기대어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혼란스러울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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