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74)화 (73/123)

74화

“저, 성을 나가려고 해요.”

나는 따뜻한 그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예니체 경이 멈칫하며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무슨…. 왕자님도 아시는 얘기입니까?”

“아마도.”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이 설명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예니체 경은 더 이상 내게 아셰라드렌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저는 행복하지 않아요. 일개 고용인으로서 누가 행복을 찾겠느냐만은… 그런 걸 떠나서요. 무슨 뜻인지 예니체 경은 아시리라 믿어요.”

“압니다. 하지만.”

“혹시 저랑 같이 가시겠어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에게 물었다. 아셰라드렌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왕국이 망한다느니 하는 소리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나 나는 양심에 따라 물어야 했다. 비록 그가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한다 해도.

“지금 출발하는 겁니까?”

“어… 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돈도 찾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왕자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가려나 보네요. 잠시만요.”

시간을 확인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급히 나를 일으켜 앉혔다.

“서두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저랑 같이… 가시려고요?”

“네. 다프네 양을 혼자 보내기엔 영 마음에 걸리네요.”

예니체 경이 너무 담담하게 대답해서 나는 그가 지금 농담을 하나 싶었다. 잠시 왕성을 떠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평생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과연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 맞는지 모르겠다.

“한번 떠나면, 다시는 왕국에 오지 않을 건데요.”

“이 나라의 고기 요리가 많이 그립겠군요.”

“아니…. 괜찮아요? 예니체 경은 저랑 다르게 가족도 이곳에 머물고 있잖아요.”

“그러니까요. 그것도 대가족이. 그래서 상관없습니다. 부모님께는 저 말고도 아들이 넷이나 있어요.”

뭐가 상관없는데. 오히려 가족이 많을수록 떠나기 힘든 거 아닌가? 나는 불안해하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분들은 왕성 가까이 사시지 않나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목숨이 위험해지지는 않을는지….”

“이 평화로운 왕국에 전쟁이라니…. 하지만 제 가족들은 왕도의 끝 자락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도망가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한 것 같다.

솔직히 노파심에 한 제안을 예니체 경이 덥석 받아들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홀로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함께.

“그럼 가요. 지금, 당장이요.”

나는 옷장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말했다. 예니체 경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우선은 우스테 가문 소유의 은행에 들러야 해요.”

“알겠습니다.”

왕성을 빠져나오는 건 쉬웠다. 당연히 우리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 숙소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은 예니체 경과, 언젠가 시르시안과 같이 샀던 드레스를 입은 나는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마차에 몸을 실었다.

“차라리 머리를 땋는 게 좋을까요? 저, 귀족 영애처럼 보이지는 않죠?”

“옷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긴 하네요.”

“…예니체 경은 빈말하는 법을 모르시나요?”

“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사과하다니, 이쪽이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빗어 내렸다. 뭐라도 얼굴에 찍어 바르고 나오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그럴 틈이 어디에 있었다고. 나는 레이스 장갑을 끼고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부디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를 수상하게 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예니체 경, 왜 저를 따라오시겠다고 한 거예요?”

은행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게, 난 지금쯤 내가 혼자서 마차를 타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는데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름 없는 성 출신끼리의 유대감인가요?”

“그럴지도.”

예니체 경이 작게 웃었다. 예상치도 못한 인물과, 예상치도 못한 도피행이라니.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즐겁기도 했다.

단정한 아이보리색 셔츠를 입고 있던 예니체 경은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힐리크입니다. 앞으로는 호칭을 달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다면 저도 편하게 다프네라고 불러 주세요. 음… 힐리크?”

그는 나보다도 더 본격적이었다. 하긴 밖에서도 매번 경이라고 불러 댔다간 남들의 이목을 살 테지.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네, 다프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도 잘은 모르는데요. 우선은 저쪽으로 가 보죠.”

오늘은 시르시안이 없으니 귀빈 대접을 받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나는 은행 중앙에 있는 안내원에게 다가가 금고를 열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안내원은 내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오늘 안에 왕도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왕자님이 저희가 사라진 걸 아시게 되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고 싶어요.”

“마차를 타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갈 예정입니까?”

“그건 아직….”

실은 대충 정해 뒀다. 세스나 제국은 레르베 라예트 왕국을 비롯해 이 주변 국가들을 모두 침략할 테니, 나는 아예 제국 옆에 붙어 있는 중립국 데하힐로 향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 나라는 물가도 높고 언어도 달라서 처음 정착하기엔 쉽지 않겠지만, 이민자들을 곧잘 받아 주는 곳이니까 나쁘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소설로 읽었을 때 남주인공 리카르도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가 데하힐이었다. 땅을 짓밟고 으스러뜨리기엔 규모가 너무 작다나 뭐라나.

“다프네 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예니체 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금세 안내원이 돌아왔다. 그녀는 나와 예니체 경을 데리고 전에도 가 본 적이 있던 귀빈실을 향했다.

“금고를 만드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네요. 실례지만 해지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오늘은 전에 봤던 그 영감님이 안 계시는 건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안내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영업용 미소를 띤 채 내게 서류를 내밀고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라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죄송해요.”

“아뇨, 죄송하실 건 없지요. 작성해야 할 서류가 꽤 많은데,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최대한 간략히 부탁드려요.”

이런 데서 시간을 질질 끌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예니체 경을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결심한 듯 입을 뗐다.

“서류를 간추려 줄 수 있겠습니까? 우스테 은행이라면 가능할 듯싶은데.”

“아, 네. 물론이지요. 잠시만요.”

저보다 높은 사람을 불러와야겠다며 안내원이 자리를 떴다. 이래서야 오늘 안에 일이 전부 해결될 수 있을는지. 나는 한숨을 쉬며 깃펜을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잠시 후, 안내원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여인 하나를 데려왔다.

“지점장인 마담 하르타입니다. 다프네 고객님께서 금고 해지를 원하신다고요.”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나타나자 남은 과정은 거침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여인이 내미는 서류에만 서명을 적었고, 그녀는 안내원을 시켜다 금고에 있던 내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

“언젠가 연이 닿는다면 다음에도 저희 은행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방을 품에 안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나는 은행의 지점장과 안내원의 인사를 받으며 귀빈실을 나섰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은 마차를 잡고, 옆 마을로 가서 밤을 보낸 다음에, 항구로 가는 편이 좋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노라니 끝없이 나를 괴롭히던 불안감의 이면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가 움텄다. 나는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아셰라드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을 외면하기 위해서라도 눈앞의 현실에 집중해서 이 상황을 최대한 좋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힐리크, 우선은 마차를….”

은행의 넓은 홀을 걸어가던 나는 가볍게 내딛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어째서지? 어째서 저들이 여기에 있는 거야?

막 은행 안으로 들어서는 일행을 확인한 나는 급히 예니체 경을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다프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아셰라드렌이며 프리지어, 심지어는 시르시안이 보였다.

그들은 전에 봤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귀빈실의 영감의 안내를 받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만요. 나, 이런….”

귀족 아가씨를 따라 하려는 듯한 차림새. 내 꼴은 딱 그 모양이었다. 프리지어처럼 우아하게 머리 손질을 받거나 화장을 하지도 않았으며, 치맛자락 안에 입은 스타킹도 급해서 갈아입지 않았다.

창피해. 아셰라드렌의 시선이 내게 닿는 순간 얼굴 위로 열이 몰렸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어요? 예니체 경, 말해 봐요.”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설마 나를 가지고 논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칠 정도의 배신감이 나를 에워쌌다.

믿었는데. 예니체 경만은 나를 믿고 따라 주는 줄 알고 기뻤는데. 아무래도 이 나라에 내 편은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더욱 떠나야 해. 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셰라드렌을 바라보면서, 나는 굳게 다짐했다.

“설마 정말로,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어. …다프네.”

아셰라드렌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또한 배신감으로 처참하게 망가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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