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을 잠가 버렸다. 나는 침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아셰라드렌이 내게 걸어오며 물었다.
“또, 저놈이야? 저놈 냄새, 난 싫어하는데.”
“아, 그게.”
“밤에는, 냄새가 짙어져. 다프네는 또… 저놈 냄새를 묻히고 있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전 그냥, 심심해서…. 아셰는 자고 있었잖아요.”
“그럼 나를, 깨웠어야지.”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던 지난날이 나았다. 헝클어진 은빛 머리칼과 풀어진 기다란 눈매가 그에게서 낯선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히려 저렇게 얌전한 모습이 더 무서웠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해명하려 했다.
“어떻게 아셰를 깨워요. 아셰가 요즘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는데.”
“난, 다프네가 다른 놈이랑, 있는 게 너무 싫어.”
“하지만 아셰도, 다른 여자랑 매일 같이 있잖아요.”
유치하게 이게 뭐 하는 건지. 나 자신의 성숙하지 못한 대꾸에 낯이 화끈해졌다. 아셰라드렌이 하, 하고 처음으로 내 앞에서 코웃음을 쳤다.
“…프리지어를 말하는 거야? 그 여자랑은, 그런 거 아니야.”
“저도 시르시안 님이랑 그런 사이 아니에요.”
먼저 유치하게 구는 것은 아셰라드렌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억울했다. 시르시안과는 그저 짧은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프리지어 님은 아셰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면서요. 두 분이 곧 결혼하게 될 거라는 말이 많아요.”
“그런 거, 안 해. 난 다프네랑….”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왕성에 있는 한.”
“…하지만 내가 왕이 되면.”
또 저런다. 자꾸만 이름 없는 성에서 했던 우리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나는 애가 타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셰가 왕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랑 같이 어디론가 떠나서 둘만 살았으면 좋겠단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현실적으로, 힘들어.”
곧바로 튀어나온 아셰라드렌의 발언이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런 얘기를 나눌 때마다 얼버무리는 듯한 반응을 보였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까.
지금 왕자는 확실하게 나와 미래를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요? 왜 힘든데요? 아셰가 왕위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인가요.”
“그렇다기보다는….”
안락한 왕성 생활을 뒤로하고 나와 떠나고 싶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과 여기서 함께 지내는 게 더 좋은가? 나는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스로도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으리라.
흥분한 나는 조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여기 있으면 아셰는 죽어요. 기억하진 못 하겠지만, 이미 한 번 죽었어요. 곧 있으면 제국군들이 쳐들어온다고요.”
“무, 무슨 말이야? 갑자기.”
“아셰르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저는 이 나라의 미래를 이미 본 적이 있어요. 이곳은 불타 없어질 장소예요. 그러니까 저랑 같이 가요.”
내가 봤던 로맨스 소설 중에서 이렇게 최악으로 미래를 알려 준 케이스는 없었다. 다들 가까운 앞날에 벌어질 사건 등을 얘기해서 먼저 신뢰를 얻고는 하던데.
그러니까 이건 확률이 0에 가까운 도박이었다. 어차피 난 가까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같은 건 모른다.
레티스가 죽었던 날 이후로 내가 읽은 소설과 이 세계는 이미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늘어놓았으니, 아셰라드렌은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의심하겠지.
그런데도 나는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먼 옛날, 나를 찾기 위해 평생을 갇혀 살았던 이름 없는 성에서 빠져나온 그를 알고 있기에.
“다프네는 내가, 예전처럼, 살기를 바라는구나. 다프네 하나밖에 모르고, 다프네 하나만 바라보던… 시절처럼.”
왕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바라던 반응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이름 없는 성에서는 우리, 행복했잖아요.”
“왕성에서도, 행복할 수 있어.”
“저는 그렇지 않아요. 아셰는 몰라도 저는 그렇지 않다고요.”
역시 괜히 말했어. 아셰라드렌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질 않았다. 사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괜한 억지, 그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을 미친 소리였다. 세상에 어느 왕자가 메이드의 헛소리만 믿고 모든 걸 버리고 떠나겠어.
난 이런 식으로 아셰라드렌을 설득하려고 해서는 안 됐다.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셰라드렌이 내 턱을 움켜쥐었다.
“내가, 다프네를 행복하게 해 줄게. 난 그러려고 지금까지, 모든 것들을 참아 왔는데.”
그러고는 내게 입을 맞추려 했다. 나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는데.
“하지 마세요. 저는 왕성에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의 손을 쳐 내고 고개를 돌렸다. 아셰라드렌으로서는 처음으로 내게 거부를 당한 것이었다. 소심한 그가 상처를 받았으리란 사실은 뻔했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 로맨스를 찍고 싶지 않았다.
“…부탁할게요. 저랑 같이 가요.”
“싫어.”
너무해. 나는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보랏빛 눈이 금세 물기를 머금고 축축해져 있었다. 최근 들어 우리는 너무 자주 울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왕성 탓이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의 평화로운 나날들이 눈물겹게 그리웠다.
아셰라드렌은 내 얼굴을 억지로 붙들었다. 나를 향한 시선 또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다프네가 나랑 있어. 여기에. 다프네가 말한 대로 사라질 왕국이라면… 내가 이 나라를, 지켜 낼 테니까.”
도톰한 입술이 내 입술을 머금었다. 꿈을 잘못 꿨냐는 말 대신 그는 날 침묵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다급하게 내 목뒤를 받친 그가 혀를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대체 이런 식으로 키스하는 법은 누구한테 배운 거지? 프리지어? 이쯤에서 내 정신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셰라드렌이 고개를 꺾어 입 안을 마구 헤집었다. 숨이 막혔고, 화가 났다. 이런 와중에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류 같은 것이 느껴져서.
“…으, 싫어. 하지, 마요.”
나는 턱을 비틀어 안간힘을 써서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했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셰라드렌은 다시금 내게 입술을 겹쳤다.
굳어 있는 혀를 기어코 찾아낸 그가 뿌리째 그것을 감아올렸다. 그러고는 아예 내 다리를 번쩍 들어 제 허리를 감게 만들었다.
맞닿은 아래가 묵직하게 부풀어 있었다. 정신없이 내게 혀를 밀어 넣은 그가 거침없이 침대를 향했다.
“싫어! 싫다고요! 여기서는 안 돼!”
“가만히, 있어. 난 여태껏, 계속 참아 왔어.”
다프네가 원하는 대로, 착한 아이인 척 굴어 줬잖아…. 응? 잠시 입술을 뗀 사이 그가 내 귓가를 지분거리며 속삭였다.
뜨거운 숨과 더불어 질척질척한 혀가 나를 괴롭혔다. 허리며 아랫배에 힘이 저절로 바짝 들어갔다. 나는 애원하듯 말했다.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면서요….”
“그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다프네야. 기억, 안 나?”
그가 나를 비웃는 듯했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침대에 눕힌 아셰라드렌이 내 위로 올라탔다.
두 다리 사이에 갇힌 나는 처음으로 그가 두려워졌다. 이건 아니야. 지금의 아셰라드렌은 내가 구하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폐왕자가 아니었다.
“하지 마요, 정말로….”
그래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이래서야 메이드를 겁탈하려는 흔한 귀족 남성들과 그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아셰라드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손을 치우고 살며시 올려다보자, 그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으…. 흣.”
지나친 흥분이 그를 폭주시키고 있었다. 입술이 기괴하게 갈라지기 시작하고, 입고 있는 옷의 솔기가 터져 나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새하얀 털들이 돋아나와 창백한 피부를 가렸다. 놀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집채만 한 늑대가 나를 내려다보며 그르렁 더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이, 일단은 내려와요. 무거우니까.”
사실 그가 내게 무게 중심을 두고 있지는 않았으나, 원초적인 공포심이 앞섰다. 아셰라드렌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내게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새까만 코를 들이대며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과 허리를 지나 아랫배를 향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아 나는 허둥지둥 발을 놀렸다.
“캥!”
그러다 북실북실한 털이 덮인 가슴팍을 있는 힘껏 세게 차 버렸다. 당황해 뒤로 물러난 아세라드렌이 화가 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뭐, 뭐요…. 먼저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 건 아셰잖아요.”
그것도 늑대의 모습을 하고서.
“크르릉….”
아셰라드렌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뭐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냥 내 위에서 내려왔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건국왕 기르시의 아내는 대체 어떻게 그와 사랑을 나누었을까?
아셰라드렌은 감정이 지나치게 격해지면 이렇게 늑대로 변해 버리고 만다. 만약 건국왕도 그랬다면, 그들 부부는 대체 어떻게.
“다시는 제 허락 없이 그러지 말아요. 안 그러면 또 걷어차 버릴 거야.”
“…끼잉.”
아셰라드렌이 뾰족한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귀엽고 무서웠다. 그리고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아셰라드렌은 확실하게 나와 떠나기를 거부했으므로.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