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나 별로, 아무렇지 아, 않은데.”
“거짓말.”
아셰라드렌은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였다. 당장에 대꾸하는 내가 괘씸했는지 그가 소파 너머에 있던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안아 줄 거면, 제대로 안아 줘.”
어차피 아무도 없겠다, 상관없겠지. 아셰라드렌은 나를 제 허벅지에 앉히고는 나를 제 품에 가두었다. 안아 달라더니 본인이 안아 주고 있잖아.
나는 두 손을 뻗어 너른 등을 어루만졌다. 국왕의 난데없는 등장에 긴장한 몸이 아직도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왜 그렇게, 나를 시, 싫어하실까.”
그가 내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물었다. 무심한 상대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행동이 애처로웠다. 매번 아버지를 볼 때마다 아셰라드렌은 상처를 받는 것일까? 차라리 황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면 좋을 텐데.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기 쉽지 않겠지. 가족이 주는 사랑을 원하는 건 당연했다. 하물며 그의 부모는 두 사람 다 멀쩡히 살아 있는데.
“세상에는 부모 자격이 없는 부모도 있어요.”
“…나도 알고는, 있는데.”
“저는 부모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해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졌거든요.”
“뭐? 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어.”
“처음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왜 이렇게까지 국왕 부부를 그리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낳아 준 정? 그런 거 솔직히 기억나지도 않잖아. 그는 그저 외로운 것이다. 내가 여기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셰는 저 하나로는 안 되나 봐요. 저는 아셰만 있으면 충분한데.”
“그렇지 않아. 나도 다프네만 있으면 돼. …왜 몰라줘?”
몰라주는 건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치마를 사이에 둔 그의 하체가 꿈틀대고 있었으므로. 열기를 토해 내는 그를 애써 무시하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도 참기는 어려웠다.
가슴이 두근대고 숨이 거칠어졌다. 대화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셰라드렌을 이런 식으로 봐서는 안 되는데.
매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를 남자로서 보고 있는 나를 자각한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알아요. 아는데….”
등허리에 땀이 흘러내렸다. 아셰라드렌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새빨간 입술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에게 부모의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촉. 물기 어린 숨소리가 코를 간질였다. 왕자에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다프네.”
“미안해요. 너무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나도, 나도 그래.”
끌리는 대로 움직이자 그다음은 쉬웠다. 커다랗게 뜬 보랏빛 눈에 내가 비쳐 보일 정도로 우리는 바짝 붙어 있었다.
아셰라드렌이 급히 나를 소파에 쓰러뜨렸다. 그가 내 양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나와 입술을 겹쳤다.
다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였다. 그는 진하게 입술을 붙인 채 나를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소파를 짚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소파 가죽이 구깃구깃해졌다.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내 뺨을 적셨다. 역시 나는 왕자의 곁에 있고 싶다. 젖은 얼굴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셰라드렌을 설득하자. 여기는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 그리고 그와 함께 왕성을 나가는 거야.
나는 본능적으로 내게 몸을 맞붙여 오는 그를 느끼며 결심했다. 반쯤 감긴 시야가 바르르 떨려 오는 은빛 속눈썹으로 가득 찼다.
⋆★⋆
그러나 그 결심은 고작 며칠 만에 뒤바뀌고 말았으니.
여느 때와 같이 아셰라드렌이 저녁을 먹자마자 곯아떨어진 날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에게 운을 띄워야 하나, 매일같이 고민하던 나는 아셰라드렌에게 담요를 덮어 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날따라 사무치게 외로운 밤이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최근 들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뭡니까, 다프네 양. 이런 시각에.”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간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이랄 것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냥요.”
경비를 서고 있던 시르시안이 나를 보고 알은체를 해 왔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며칠간 서로를 마주치지 않았기에, 나는 그가 퍽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님은 주무시고 계십니까?”
“네, 뭐.”
실은 여전히 나는 시르시안을 의심하고 있었다. 레티스가 죽은 뒤로 프리지어가 왕자비 자리를 노리고 있지 않던가? 우스테 후작가는 완전히 왕자를 그들의 둥지 속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프리지어가 왕자비가 된다면 다음 대 후작가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지. 우스테의 현 가주에게는 시르시안을 제외하고도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나, 그는 아주 어릴 적에 병사했다.
후작이 시르시안을 가문에 입적시킨 데에는 지금은 죽고 없는 장남이 한몫했던 것이다.
“지난밤에는 나를 살인범으로 몰고 가더니.”
시르시안은 엄청난 내용을 거론하며 소년처럼 툴툴거렸다. 제 발이 저렸던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도 그것 때문에 시르시안 님과 멀어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요, 그래. 사과가 참 빠르네요.”
요 며칠간 나는 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늦은 시간에 침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다. 그랬던 탓에 더욱 갑갑하기도 했다.
아셰라드렌은 내가 아닌 사람들과 대화라도 하지, 나는 그를 제외한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나를 알아주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동안 많이 외로웠어요.”
시르시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말로 실비아와 레티스를 죽인 극악무도한 이라면 과연 내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그는 레티스가 죽은 현장에 있었고, 실비아가 죽은 시간에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럼에도 나는 시르시안을 믿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드넓은 왕성에서 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시르시안 님은, 앞으로 후작가를 이어받게 되나요?”
“글쎄요, 갑자기 왜 그런 걸 묻지요?”
너무 뜬금없었나.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 전에… 프리지어 님이 왕자비가 되겠다고 하셨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아하. 그런 얘기가 원로원에서 나오고 있기는 한데… 솔직히 사생아에게 가문까지 이어받게 하는 경우는 드물죠.”
시르시안은 금방 납득한 듯 답했다. 후작위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어 보이는 저 산뜻한 표정은 진심일까?
“다프네 양은, 누님에게 질투가 나지는 않습니까?”
난다. 엄청 질투 난다. 그러나 나는 아셰라드렌에게 걸맞은 신분이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나는 왕국에 하나밖에 없는 왕자를 사랑해서.
되레 초조해진 나는 애꿎은 바닥을 발끝으로 꾹꾹 내리눌렀다.
“말 돌리지 마시고요. 이대로라면 프리지어 님이 왕자님과 결혼하게 될 텐데….”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입니까? 최근에는 아니더라도, 왕자님은 툭 하면 늑대 새끼로 변하시지 않았습니까. 결혼해서 후사를 보게 된다 해도, 음.”
“프리지어 님이 늑대를 낳으실까 봐 불안하세요? 그런데 늑대 새끼라뇨. 왕자님은 귀엽고 깜찍한 강아지로 변신하시는데?”
건국왕 기르시의 아들도 짐승의 형태를 하고 태어났다. 세간에 알려진 전설에는 그런 사실까지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그 뒷얘기까지도 알고 있었다. 건국왕의 부인은 지금의 왕비처럼 짐승으로 세상에 나온 제 자식을 거부했다.
애초에 그녀는 건국왕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강압적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게 무슨 강아지입니까? 딱 봐도 늑대 새끼지.”
“시르시안 님이 자세히 보지 않으셔서 그래요. 아무리 봐도 꼬리도 짧고 다리도 짧은 강아지라고요.”
시르시안은 내 말을 듣자마자 한숨처럼 웃음을 뱉어 냈다.
“생각해 보세요, 다프네 양. 늑대의 피를 물려받았는데 어떻게 강아지가 될 수 있습니까? 강아지로 보일 만큼 귀엽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처음부터 그분은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여태까지 늑대 새끼와 강아지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건가? 말도 안 돼.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아셰라드렌이 변신을 할 때마다 유독 귀가 쫑긋해 보이긴 했었다.
하지만 내가 늑대와 강아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물론 늑대의 새끼를 본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제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으셨는데.”
“어느 짐승이라도 새끼 때는 그 정도로 작습니다.”
“…아, 알겠다고요. 이제까지 제가 착각했던 거.”
“멀리서 봐도 늑대 새끼던데.”
“이제 알겠다니까요?”
사실은 아직까지 전혀 와닿지 않았다. 이 밤을 아셰라드렌이 강아지다, 늑대다 하는 토론으로 지새우게 될 줄이야.
그런데도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서 그런지 기분은 즐거웠다. 어쩌면 시르시안은 살인범이 아닐지도. 문득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끼이익.
“…어?”
혹시 너무 떠들었을까. 목소리를 크게 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뒤에서 열리는 침실 문을 확인한 나는 곧이어 아셰라드렌이 나타날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가 아닌 그의 손이 튀어나와 나를 잡아당겼다. 시르시안이 멈칫하는 사이 아셰라드렌이 나를 집어삼키듯 방 안으로 끌어당겨 문을 닫았다.
“…뭐 해?”
“네? 딱히 뭘 하지는.”
않았는데. 나는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이어지는 아셰라드렌의 가라앉은 음성이 매서웠다.
“뭐, 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