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름 없는 성에서 먹던 요리들도 충분히 호화스럽다고 생각했건만, 왕성에서의 식사는 혀를 내두를 만큼 놀라운 메뉴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저걸 캐비어라고 했던가? 나는 카나페 위에 올려진 새까만 알갱이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연어 살을, 좀 덜어 줄까?”
아까 트레이를 가지고 등장했던 메이드들 중에는 전과는 달리 젤라가 없었다. 아마 그녀도 아직 실비아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나는 소파 끄트머리에 어색하게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셰라드렌은 고작 며칠 만에 왕성의 풍경에 녹아든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감사해요. 역시 갓 만든 요리는 맛부터 다르네요.”
이름 없는 성에서는 차갑게 식은 음식을 데워서 먹고는 했다. 그래도 내 입에는 맛만 좋았는데, 왕성에서 먹는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겉만 구워 낸 연어살은 입 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셰라드렌을 쳐다봤다. 그가 활짝 웃음 지었다.
“다프네, 포크를 쥐는 법이, 틀렸어.”
“그런가요? 하지만 여태까지 잘만 이렇게 먹었는데요.”
“마담 지르젤이 그러는데, 집게손가락을 위쪽에, 둬야 한대.”
아셰라드렌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포크를 잡고 있는 내 손을 고쳐 주었다. 뭐지? 이게 대체 뭐지? 나는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 멍청하게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왕자는 내게 우아하게 고기를 써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어 뿌듯하다는 듯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반짝반짝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시선이 꼭 내게 칭찬이라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향해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어려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스스로가 바보라며 꿍해 있던 그가 얼마나 귀여웠던지.
앞으로는 그 귀여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가. 섭섭해진 나는 크림이 들어간 파스타를 돌돌 말다 내려놓았다.
“배가 부르네요. 아셰는 많이 드세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 몸이 안 좋은 거, 아니야?”
오늘 배운 식사 예절을 확실하게 복습하고 싶었는지, 아셰라드렌은 심각한 얼굴로 칼질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게 재차 식사를 이어 갈 것을 권유했지만, 내가 디저트로 나온 쿠키 바구니를 안고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하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다프네는, 아기 같아. 내가 식사하는 속도에, 맞춰 주지도 않고.”
“그런 예법도 있나요? 그것도 마담 지르젤이 알려 주셨겠죠?”
“응. 상대방이, 신경 쓰이지 않게 하라고.”
나는 아예 단단히 삐쳐 버렸다. 왕자는 옛날에 유모가, 유모가, 했던 것처럼 이제 마담 지르젤이, 마담 지르젤이, 하고 있었다.
배움이 부족한 백지상태인 만큼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쯤은 나도 알았지만…. 그래도 하필이면 마담 지르젤이라니. 자길 때리기나 하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아셰라드렌의 고운 입에서 자꾸만 내가 싫어하는 이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이 참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왕자는 실수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데 집중하느라 그런 나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하, 힘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으로 막 집어 먹었었는데.”
“얼굴로 드신 적도 있으시잖아요.”
“…이, 잊어 줘. 부끄러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냅킨으로 여유롭게 입을 닦은 그가 귀를 붉혔다. 얼씨구? 나는 쿠키를 까드득 까드득 씹으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때 아셰가 얼마나 귀여웠는데요.”
“나는 와, 왕자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셰라드렌의 단호한 표정을 본 나는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내가 아는 아셰와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내가 쿠키 바구니를 내려놓자 아셰라드렌이 탁자 위에 있던 종을 울렸다.
복도 밖에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들이 다시 나타나 빈 접시들을 치웠다. 그동안 나는 가만히 앉아 있기도 좀 그래서 아셰라드렌의 곁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레모네이드는, 마실 거야. 이건 남겨 둬.”
“네, 왕자님.”
메이드 하나가 마지막 남은 주스 잔을 가져가려고 할 때였다. 아셰라드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심코 그를 바라본 메이드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어린애처럼 굴던 그는 먼 과거의 일이었다. 느릿한 말투와 온화한 목소리를 가진 왕자는 누가 봐도 근사했다.
“그렇게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방법도, 마담 지르젤이 가르쳐 주셨나요?”
“아, 그건 프리지어가… 으으, 피곤해.”
메이드들이 모두 나간 후 나는 물었다. 가시가 잔뜩 돋친 질문을 문장 그대로만 받아들인 그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하품을 했다.
나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아셰라드렌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주변의 기대에 열심히 부응하는 것이 죄는 아니건만. 그래도 나는 그에게 서운했다.
차가운 레모네이드 잔을 든 아셰라드렌은 소파에 기대어 웅얼거리다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와 하루를 함께하지 않아 잘은 모르겠으나, 그 역시도 꽤 긴 하루를 보낸 모양이었다.
“침대에 가서 주무세요. 옷도 갈아입으셔야죠.”
아셰라드렌의 옆에 멀거니 서 있던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그가 눈에 띄게 움찔하며 놀라더니 내 쪽으로 주스를 쏟아 버렸다.
“미, 미안. 다프네. …젖었어?”
유리잔 안에 든 얼음들이 내 다리를 타고 후두둑 떨어졌다. 번쩍 정신을 차린 아셰라드렌이 안절부절못하며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저도 알아요. 진정하세요. 제가 닦을 테니까….”
그가 너무 허둥지둥하길래 나는 오히려 그를 다독였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뭘 저렇게까지. 이제야 내가 아는 어린애 같은 모습이 튀어나오는 것 같아 드디어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이 물기를 털어 내기 위해 내 허벅지를 붙들었을 때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분명 순수한 의도만을 가지고 있을 것을 알면서도 커다란 손 하나가 다리 사이를 향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석고상처럼 굳어 버렸다.
“제가, 제가 한다니까요.”
나는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온 손을 붙잡고 말했다. 차라리 가만히 내버려 뒀더라면 이렇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진 않았을까. 아셰라드렌은 말없이 눈을 끔뻑거리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유 모를 긴장감을 느낀 나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내게 손목을 잡힌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옷은 제가, 갈아입어야 되겠네요. 잠시만요.”
나는 거의 도망치듯 그를 두고 내 방으로 달려갔다. 강아지인 그를 내 무릎에 앉힌 적도 있었고, 가슴이 닿는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품에 안고 돌아다니고는 했었는데.
최근 들어 자꾸만 그를 이성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나. 이래서야 강아지로 변해도 편하게 대하지만은 못할 것 같다.
덜컹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나는 가슴 부근을 마구 두드리며 옷장 문을 열었다. 몇 번이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새로운 메이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침대에서 주무시라니까.”
그사이 아셰라드렌은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잠들어 있었다. 깨우기도 미안할 정도로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어 나는 살금살금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내 침대가 이렇게 넓었던가? 낮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 혼자 누워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괜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거의 반나절을 죽은 듯이 내리 잠만 잔 탓에 정신이 너무 깨어 있다. 나는 말똥말똥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중얼거렸다.
“…사람이 눈앞에서 둘씩이나 죽었는데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네.”
그냥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고. 과연 이게 맞나 싶다.
속으로만 계속 괴로워하고. 정작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고.
답답한 마음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혼자 지새울 밤이 아주 길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왕자의 침실로 돌아가 보자, 오렌지빛 촛불 사이로 곤히 잠에 든 미소년이 보였다.
그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잠시 나갔다 와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멀리 갈 생각은 없었다.
“시르시안 님.”
문을 반쯤 열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복도에는 시르시안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나를 알아본 그가 내게 말없이 눈인사를 건넸다.
아침의 예민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조명이 어두워 뺨에 난 손톱자국도 잘 보이지 않았다.
좀 더 말을 걸어 볼까. 어째선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용기를 내라고. 뭐라도 하란 말이야.
나는 시르시안 몰래 손등을 꼬집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문을 닫고 나와 그의 옆에 다가섰다.
“좋은 밤이네요.”
“네, 좋은 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프네 양에게는.”
시르시안은 별생각 없이 내 말을 따라 하다 망설였다. 한 박자 늦게 나를 돌아본 그가 입을 뗐다 다시 다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아침에는 제가 미안… 아, 네. 뭡니까?”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사실 그보다는 내가 조금 더 빨랐다. 시르시안은 멋쩍은 얼굴로 다시금 내게 되물었다.
“궁금한 게, 뭡니까?”
“별건 아니고요. 오늘 새벽에, 어디에 계셨나 싶어서.”
“그건 별게 맞는 것 같네요. 미안하지만 알려 주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도 쭉 당신을 의심해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건 실비아가 죽은 시각, 구체적으로 시르시안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였다.
그런데 뭘 알아보기도 전에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하다니.
“그래요? 알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왕성을 나가기 전까지 시르시안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금발의 미남이 억울하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나를 노려봤다.
“설마 다프네 양, 당신. 나를 믿지 못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