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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68)화 (68/123)

68화

“쉬어. 수업이 끝나면, 바로 보러, 올 테니까.”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말했다. 어쩜 저렇게도 다정할까.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이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열심히 하시네요. 보기 좋아요.”

물론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아셰라드렌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내년 이맘때쯤엔 폐허가 될 왕성에서 대체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저, 정말? 나, 왕이 되기엔, 모자란 게 많다고, 들었는데.”

“…아셰는 왕이 되고 싶은가요?”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내 운명이라면….”

이름 없는 성에 있을 때는 왕위 따위에 관심도 없었잖아. 우리 둘이서만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는데. 나는 끝내 옆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베갯잇에 비벼 닦았다.

서운했다. 나는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아셰라드렌은 길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만 가 볼게. 다프네는, 푹 자고 있어.”

“…네.”

목이 잠기려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불에 감싸인 내 등을 토닥인 그가 이내 방을 나섰다.

이렇게 아셰라드렌이 먼저 내 곁을 떠난 적이 있었던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는 곧잘 내 옆에 붙어 있기 위해 억지를 부리곤 했다.

잠깐 그릇을 가지러 주방에 가는 것조차 용납하질 못해 강아지처럼 뒤를 졸졸 따라오곤 했던 이가, 이제는 나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간단다.

어째서지? 혹시 아셰라드렌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건가?

“모르겠어, 이젠.”

더 이상은 생각을 이어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충격적인 아침을 보낸 참이었다. 나는 억지로 힘을 주어 눈을 감고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그러나 몇 번이고 무너져내리던 왕성과, 나를 안아 들며 웃던 창백하고 아름다운 아셰라드렌이 생각나 좀처럼 잠이 들지도 못했다.

그때, 나를 쫓아 이름 없는 성을 탈출했던 폐왕자의 세상에는 나 하나밖에 없었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물방울이 자꾸만 베개를 적셨다. 왕성에서 나는 홀로 외로웠다.

⋆★⋆

얼마나 잤을까. 몸살이 난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하고 추웠다. 나는 이불 속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녁나절이었다. 서둘러 일어나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했다.

“예니체 경, 아직 근무 시간이신가 보네요.”

텅 빈 왕자의 침실을 지나 문을 열자 응접실 앞에 서 있는 예니체 경이 보였다. 그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입을 뗐다.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몰골이 말이 아니군요.”

“글쎄요,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왕자님은요?”

머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예의상으로 짓는 미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예니체 경의 시선을 피해 응접실을 흘깃 쳐다보았다.

“…프리지어 님과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아마 곧 나오지 않으실까요?”

“그렇군요. 저도 예니체 경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을게요.”

프리지어가 원한 건 아셰라드렌과의 둘만의 티타임이었으니 방해를 해서는 안 되겠지. 나는 깊이 숨을 들이켜며 예니체 경의 옆에 다가섰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은 탓이다.

“그럼 저는 이만.”

예니체 경의 좋은 점은, 쓸데없는 소리를 길게 늘어놓지 않는다는 부분에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벽을 마주 보며 서 있었고, 내가 실비아를 발견했던 당시의 감정을 생생하게 떠올릴 때쯤 응접실 안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왕자님.”

다음 순간 문이 열렸다. 프리지어의 환한 금발 머리가 쏟아질 듯 시야에 들어찼다. 그녀는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너 여기 있었구나. 어디로 갔나 했어.”

“안녕하세요, 프리지어 님.”

가볍게 예니체 경과 눈인사를 나눈 그녀가 내게 아는 체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들자 프리지어의 옆에 선 아셰라드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프네. 이제 괜, 찮아?”

“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성큼 내게로 다가와 물었다. 아셰라드렌이 손등을 내 뺨에 대었다.

“다행이야. 다프네가 없으니까, 하루가 어찌나 길던지.”

“어머, 저랑 꽤 즐겁게 대화하셨잖아요? ‘벌써 돌아갈 때가 됐나’ 하고 놀라셨으면서.”

프리지어가 아셰라드렌을 나무라듯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마냥 달갑지만은 않은 시선이 내게 닿았다 떨어졌다. 불청객. 순간적으로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마담 지르젤이며 모르기니아 대공이 나를 보던 눈빛과 프리지어의 시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제 그만 퇴장해야 할 단역이었다.

“그, 그런 적, 없어. 너 얼른 돌아가.”

프리지어를 돌아본 아셰라드렌이 소심하게 손을 내저었다. 어련하시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장난스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녀는 오늘 아침 주방에서 한 메이드가 목을 매달아 죽은 것을 알까? 알고 있다면 저렇게 밝은 낯을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별로 상관없을까. 실비아는 프리지어를 꺼려 했지만, 정작 프리지어는 실비아의 존재조차 알았을지 미지수였다.

지금 우리는 꼭 연극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내게는 현실이 와닿지 않았다. 실은 이름 없는 성에서 나온 이후로 줄곧, 나는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배, 고프지 않아? 하루 종일, 굶었잖아.”

프리지어가 자리를 뜨자, 아셰라드렌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저녁은, 방에서 먹겠다고 했어. 같이 가자.”

“네, 왕자님.”

“…다프네, 괜찮은 거, 맞아?”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은데. 들켰다간 또 얼마나 나만 들들 볶일까? 나는 우리 쪽을 주시하는 예니체 경을 못 본 체하며 몸을 돌렸다.

“어서 가요. 여태까지 수업을 하셨으면 피곤하시겠어요.”

“응…. 오늘도 엄청, 혼났어.”

“누구한테요?”

아셰라드렌은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침실로 들어온 그가 문을 닫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마담 지르젤한테.”

“어쩌다가요? 설마, 오늘도 회초리로 맞으셨나요?”

“응, 세 번 정도.”

나는 침실을 가로질러 걷다 멈춰 섰다. 마담 지르젤의 회초리질은 퍽 매서운 것이었다. 문가에 기대어 선 아셰라드렌은 내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가 그를 돌아보자 그가 환하게 입을 벌려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나한테 와, 다프네. 내 옆에 있어 줘.”

“…안아 달라는 말씀인가요?”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망설이고 있으려니 왕자의 입꼬리가 처졌다. 그가 보폭을 넓게 해 급히 내 앞에 다가섰다.

“왜, 그러는 거야? 오늘, 이상해.”

“죄송해요. 아직까지 몸 상태가 영….”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아셰라드렌부터 찾았는데, 그는 프리지어와 떠들며 웃고 있고.

나는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왕자와, 어쩌면 그의 아내가 될 귀족 영애가 둘이서 무엇을 했는지 상상해 보면서.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 해. 다프네한테 보여 줄 것도 있는걸. 오늘 나, 마담 지르젤에게, 제대로 수저를 쥐는 법을 배웠어.”

아셰라드렌이 자꾸만 아래를 쳐다보는 내 턱을 그러쥐어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내 마음이 어떤지는 꿈에도 모르고.

“아, 네. 물론이죠.”

조금도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억지로 답했다. 그야 당연히, 내가 그에게 가르쳐 주었던 식사 방법은 왕실 예법과는 달랐겠지.

아셰라드렌도 서서히 알아 가고 있을 것이다. 이름 없는 성이라는 작은 세상에서는 나만이 그의 전부였으나, 실제로 나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존재였다.

나는 새로운 배움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를 마냥 좋게만 보질 못하는 내 스스로의 유치함에 당황했다. 이렇게 어둡고 음습한 감정으로, 나는 그를 독차지하려 하고 있었던가.

“아직은 잘하지, 못 하지만 다프네한테 보여 주고 싶었어.”

“네, 기대가 되네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나불대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울적하다고 해도 나는 그의 메이드였다. 내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됐다. 나는 왕자의 연인이 아니라, 그의 메이드였다.

“식사를 먼저 하실 건가요? 아니면, 옷을?”

“식사부터 할래. 그전에 잠시만.”

이쯤에서 나는 왕성을 나가자는 말은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셰라드렌이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왕성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포기하면 그는 왕국과 함께 사라질 텐데. 그랬다간 이제까지 내가 한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아셰라드렌과 같이 살아남고 싶었다. 그것만이 새로운 인생을 얻게 된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나 쉽게 포기하려 하고 있다니.

“뭔가요?”

정신 차려, 다프네. 이 왕자가 네게 얼마나 소중한지 어째서 깨닫질 못하는지. 어떻게든 생각을 고쳐 보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뜨고 물었다.

내 턱을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륵 내려가 허리를 감쌌다. 그가 나를 제 품에 밀어 넣었다.

“잠시만 이러고 있을래. 나는 다프네가, 너무 좋아.”

“…….”

“다프네는, 어, 어때?”

아셰라드렌의 몸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쿵쿵 뛰는 심장이 머릿속의 상념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나는 쉬이 대답하질 못하고 있었다.

레티스와 실비아의 피눈물이 천장에서 툭 떨어져 내 뺨을 적신 탓이다. 나는 어깨를 바르르 떨며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무력하고 한심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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