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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67)화 (67/123)

67화

“섞는다는 게, 그러니까.”

아셰라드렌은 머뭇거렸다. 훤히 드러난 목뒤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망설이는 그를 본 대공이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왕자께서는 아직 여인을 모르시는가 보군. 그래서 메이드에게 그런… 음, 알 만해.”

그런, 이라고 말하면서 대공은 내 쪽을 쳐다봤다.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인 그가 아셰라드렌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나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이제껏 왕자에게 저렇게 스스럼없이 구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왕자와 대공은 오늘 처음 본 사이가 아니던가? 그것도 고작 몇 시간쯤 전에.

“…….”

대공은 기꺼이 커다란 몸을 숙여, 아셰라드렌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었기도 하고, 그가 몇 번씩이나 내 쪽을 흘깃거리기도 해서,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었다.

아셰라드렌은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추어 대공에게 뭔가를 물었다. 그러면서 열이 한껏 오른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두 신사분께서 즐거워 보이시니 저는 이만 자리를 비울까 싶습니다. 아셰라드렌 왕자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점심시간에 돌아오도록 하지요.”

그들의 대화가 점차 길어지자 나보다도 더 소외감을 느꼈을 마담 지르젤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제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완벽히 감춘 채 우아하게 치마를 들고 인사했다.

“응.”

그리고 아셰라드렌은 순순히 답했다. 마담 지르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며 혼란스러워했다.

일부러 급하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의외로 내가 없이도 타인과의 교류를 해내고 있었다.

“화, 확실해? 그렇게 하면….”

“뻔한 수법이지만, 먹히지 않은 적은 건국왕 기르시 이래로 없어.”

마침내 왕자에게서 몸을 떼어 낸 대공이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는 왕자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린 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나도 슬슬 가 봐야겠는데.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

그러더니 약간 흐트러진 옷깃을 매만졌다. 대공은 창가로 돌아가 술잔에 남은 브랜디를 마셨다.

“앞으로는 마담 지르젤을 난감하게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어. 말했다시피 왕자께서 그렇게 굴 때마다 불똥이 튀는 건 저쪽이니까.”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셰라드렌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왕자는 따스한 눈빛을 하며 웃었지만, 나는 그와 같은 반응을 돌려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윽고 아셰라드렌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모르기니아로 돌아가기 전까지 가끔 놀러 와도 되겠지? 따로 있을 만한 곳이 없어서 말이야.”

“상관, 없어.”

둘이 나이 차이가 꽤 날 것 같은데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서로에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대공은 마지막으로 내게 능숙하게 윙크를 날린 후 응접실을 나갔다.

“다프네.”

둘만 남기가 무섭게 아셰라드렌이 나를 불렀다. 그는 아예 내 쪽으로 돌아앉아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었다.

“네, 아셰.”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고는 그 즉시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나가신 분은….”

“렌시어스, 라고 한대. 이름이 기니까, 렌시라고 부르라더라.”

“대공님을 전에 만나 뵌 적 있으세요?”

“아니.”

역시나 초면이었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나는 허망하게 아셰라드렌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을 깜빡이던 그가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다프네도 없는데, 마담 지르젤이 자꾸, 수업을 하자고 하잖아. 난 다프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기 시, 싫은데.”

그리고 마담 지르젤도 싫고. 그가 덧붙였다.

“그래서… 제가 왔잖아요. 하지만 제가 없어도 괜찮으신 것 같던데요.”

“그, 렇지 않아. 나중에 렌시가 와서, 나보고, 자기랑 좀 놀아 달라길래.”

“놀아요?”

“응. 나,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봐서, 대체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왕자는 꽤나 기쁜 듯 보였다. 자신만의 세상으로도 벅찬 어린 소년.

나는 차마 그에게 유일하게 왕성에 남아 있던 친구가 죽었음을, 그래서 답답하고, 울적하고, 지금 당장이라도 왕성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프네는, 또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요즘 나를 두고, 혼자 다녀.”

어제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어제는 불같이 화를 내더니, 오늘은 섭섭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미는 게 전부였다.

아셰라드렌이 나를 떠나가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어미 새에게 의지하는 아기 새가 아니었다.

초조했다. 나는 대뜸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보랏빛 눈을 마주하며 입술을 떼었다.

“아셰.”

“응, 다프네.”

“저랑 왕성을 나가지 않을래요?”

“…어?”

이름 없는 성에 살 적에도 은근히 그의 반응을 떠보면서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예니체 경과 함께 사는 건 별로라고 투덜거렸었지.

그렇다면 만약 우리 둘만의 도피를 약속하면 어떨까? 나는 벌써 왕성에서의 생활에 싫증이 났다.

왕이라는 거, 어차피 되지도 못할 거잖아. 멸망할 왕국에 시간을 끌어 가며 지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레티스가 죽었고, 잔느가 도망쳤고, 다시 실비아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구의 차례인가? 나는 불행을 겪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나?

“어, 언제. 지금?”

아셰라드렌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되물었다. 곧바로 긍정적인 반응이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래요, 지금. 갑작스럽다는 건 알지만….”

계속 언젠가는, 1년이 지나기 전에는, 하고 미루기만 해서는 안 된다. 왕성을 나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순간, 곧바로 실천에 옮겨야만 했다.

물론 지금은 밖에 예니체 경도 있고, 운 좋게 그를 피한다고 해도 삼엄한 왕성의 경비를 뚫어야 한다는 위험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 하지만 좀 있으면, 마담 지르젤이, 돌아올 거야. 렌시도, 또 나를 보러, 오겠다고 했는데….”

아셰라드렌은 느릿느릿, 그러나 차근차근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고작 며칠 만에 그의 마음은 변했다. 이름 없는 성에 있을 때만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따를 것처럼 말하고는 했는데….

“싫으시구나.”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저랑 둘이서 떠나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그렇죠?”

나는 알고 있었다. 멋대로 감정에 휘둘려 이렇게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러면 이제껏 쌓아 왔던 내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릴 텐데. 아셰라드렌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서 그를 설득해야 하는데.

“왕성에 오게 되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테니까… 분명 아셰가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걸 실제로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씁쓸하네요.”

“아, 아니라니까. 다프네랑, 떠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 다음은 뭔데? 나는 불안하지 않은 척 덜덜 떨리는 턱을 감추며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끙끙대며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어요. 저도… 아셰가 원하지 않는 걸 강요할 생각은 없고요. 그런데 마담 지르젤과의 수업에는 빠져 있어도 될까요?”

“다프네… 화났어?”

왕자인 그가 메이드인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의 나날들은 그저 한여름의 꿈이었을까. 나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실은 저, 몸이 별로 좋지 않아요. 머리도 아프고.”

아까 보니까 대공이랑도 얘기를 잘만 하던데. 마담 지르젤한테도 대답을 척척 잘해 주고. 굳이 내가 왕자의 곁에 있을 필요가 있나?

아셰라드렌은 고작 하루 만에 엄청난 발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이제 나와 예니체 경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왜? 열이 나?”

의자에서 급히 일어난 그가 큼지막한 손을 내 이마에 대고 다른 손으로는 내 목뒤를 받쳤다. 바닥에 쓰러진 의자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으며.

“아… 확실히, 뜨거운 것, 같기는 한데.”

짜증 나게 이 와중에도 잘생기고 난리야. 나는 보석 같은 눈동자 사이로 보이는 신비로운 은빛 속눈썹에 감탄하는 것과 동시에 분통을 터뜨렸다.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셰라드렌은 저보다 한참은 작은 나를 살펴보겠답시고 상체를 구부린 채 조각 같은 얼굴을 내게 바짝 들이밀고 있었다.

“예, 예니체 경한테 말해서, 의원을, 불러오는 게….”

“왕자님을 진찰하는 줄 알고 왔다가 저를 봐야 한다는 걸 알면 굴욕스러워할걸요. 괜찮아요. 조금만 쉬면 될 거예요.”

나는 나를 향한 귀족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마담 지르젤의 매서운 눈빛, 모르기니아 대공의 한껏 업신여기는 듯한 눈빛, 시르시안의….

너무하네, 진짜. 언제는 내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면서? 그래 놓고 아까는,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제아무리 사생아라지만 자기도 엄연한 귀족이다 이건가? 고작 메이드 하나 때문에 누나에게 뺨을 맞은 것이 그렇게도 화가 났나?

“어디 멀리 가지 않을게요. 방에서 누워 있을 테니까.”

“가, 같이 가자. 다프네가 눕는 걸 보고, 다시 여기로 올래.”

그래도 아프다고 했더니 고집을 부리지는 않네. 나는 혼자 가겠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아셰라드렌이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만큼 나도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나와 함께 있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아 할지도 몰라.

속이 쓰렸다. 지금 내 앞의 아셰라드렌은 회귀 전의 그와 너무도 달랐다. 그리고 그를 이렇게 만든 건, 틀림없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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