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예니체 경에게 전해 듣고 왔습니다. 마침 근무 시간도 끝날 즈음이라.”
몸을 일으킬 힘도 없어, 눈만 도로록 굴려 시르시안을 쳐다봤다. 왕성은 원래 이렇게 죽음이 많은 곳인가요? 나는 묻고 싶었다.
도저히 이런 곳에는 적응할 수가 없다. 자꾸만 내 주위에서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실비아는 어째서 목을 매고 죽었나? 그녀는 시르시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었지.
프리지어가 레티스를 싫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고 했었다. 소설과는 달리.
그야 그렇겠지, 레티스는 레티스이자 레티스가 아니었다. 프리지어는 겉모습을 제외한 모든 것이 변해 버린 레티스를 받아들이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이 두 남매가 레티스를 죽였나? 그리고 어쩌면 그 장면을 목격한 실비아마저….
“푹 쉬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다프네 양의 부재로 인해 왕자님이 수업을 거부하고 계십니다.”
시르시안은 한숨을 쉬며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나를 일으켜 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는데, 나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조, 조금만, 있다 갈게요. 조금만….”
차마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하 호호 웃으며 신데렐라 놀이를 함께 즐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번 그가 레티스의 죽음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시르시안을 이전처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안 됩니다.”
“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웅얼거리다 되물었다. 어쩐 일로 시르시안이 단호하게 굴고 있었다.
“상심이 큰 건 알겠지만, 다프네 양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만큼은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전 방금.”
유일하게 왕성에 남아 있던 친구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물론 내가 아셰라드렌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했다지만, 잠깐 정도는 실비아를 그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이건 뭔가 잘못됐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시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린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그렇지만 내게 선택지랄 게 있을까. 별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 침대에는 누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하녀들이 여럿 보였다.
젤라는 그들 중 하나였다. 유독 모질게 실비아에게 화를 냈던 그녀는 아예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어서 가시죠.”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 한마디 걸어 보지도 못하고 의무실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서로의 슬픔을 공유하고 위로해 준다면, 그나마 우리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뒤따라 나온 시르시안이 문을 닫았다. 뻐근한지 어깨를 한 번 돌린 그가 복도를 향해 눈짓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고작 이틀째부터 이 난리를 피우게 만들다니요.”
“…무슨 말씀을?”
“…가 보면 알 겁니다. 왕자님은 마담 지르젤을 완전히 무시하고 계시고, 누님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다프네 양에게 단단히 화가 나셔서.”
헛웃음을 지은 시르시안이 먼저 발걸음을 내디뎠다. 쫓기듯 그를 따라 걷기 시작한 나는 쏟아지는 햇살을 통해 뒤늦게 그의 얼굴에서 자그마한 손톱자국을 발견했다.
“뺨을 맞으셨나요?”
그제야 그의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였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붉고 얇게 그어진 상처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시르시안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제 걱정보다는 다프네 양 걱정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지금 모든 화살이 당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습니까?”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왕성은 저랑 맞지 않는 곳인가 봐요….”
나는 참담하게 중얼거렸다. 왕자와 내가 왕성에 오게 되면서부터, 회귀 전에는 경험한 적 없던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누군가 실비아의 입을 막으려고 한 거야. 그녀가 실제로 레티스를 죽인 사람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렇게 풀 죽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러면 이제 나 역시도 언제 목숨이 노려질지 모르는 거 아닌가? 범인이 누군지 확실하게 들은 건 아니지만, 레티스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다만 나는 이 이상 레티스와 관련해 입을 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듣고 있습니까, 다프네 양?”
바닥을 내려다보며 층계를 오르는 것에만 집중할 때였다. 시르시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공중으로 튀어 오르다시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금빛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런…. 그러다 다치겠어요.”
그의 말마따나 여기서는 살짝 휘청거리기만 해도 계단을 데굴데굴 구르기 십상일 것 같았다. 운이 나쁘면 리카처럼 뼈가 부러져 죽을 수도 있겠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듯했다. 시르시안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줘 나를 밀기라도 한다면….
“와, 왕자님께 가 봐야 한다면서요.”
나는 의식적으로 그를 지나쳐 계단 위쪽을 바라보곤 서둘러야겠다며 자연스럽게 먼저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길게 숨을 내쉰 시르시안이 나를 따라왔다.
“제가 말을 너무 딱딱하게 하는 바람에, 다프네 양의 기분이 상했나 보네요.”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충분히 그러실 만했고.”
언젠가 날 더러 제게 화풀이를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딱 그 반대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리지어한테 맞아 놓고 성질은 내게 부리다니. 이 남자는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새벽에 내가 아셰라드렌의 침실에서 나왔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실비아의 목을 매달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의무실의 의사는 실비아의 사인이 자살이라고 보는 듯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볼게요. 시르시안 님도 그만 퇴근하세요.”
아셰라드렌의 응접실에 다다른 나는 그를 보지 않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검은 부츠를 신은 발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으나, 일부러 보지 못한 체하고 문을 두드렸다.
“다프네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안쪽에서의 대답은 없었다. 대신, 때마침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중에는 분명 아셰라드렌의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아셰라드렌이 저렇게 웃고 있다고? 나는 설명하기도 민망한 충격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등진 채 앉아 있는 아셰라드렌과, 창가에 서서 시가를 물고 있는 낯선 신사를 발견했다.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귀족들의 풍경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마담 지르젤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다가 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쯧.”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낸 그녀가 창가의 신사를 향해 미소 지었다. 피부색이 어둡고, 밤색 머리와 밝은 오렌지빛 눈동자를 가진 키가 훌쩍 큰 남자….
생각났다. 그는 모르기니아의 대공이었다.
“레르베 라예트에서는 어딜 가나 주목을 받는군. 내 얼굴이 그리도 신기하게 생겼나?”
남자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고, 유쾌하게 입꼬리를 올릴 때면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나는 파드득 시선을 내리며 치맛자락을 쥐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저를 부르셨다 들어서….”
“누가? 대체 누가, 발에 챌 정도로 많은 메이드 중 굳이 너를 골라 불렀지?”
모르기니아의 대공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크게 웃으며 물었다. 그 말 한마디로 내 안에서 대공에 대한 인상이 정해졌다. 재수 없는 놈.
“나… 내가, 다프네를 불렀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속으로는 대공을 마구 욕해 주면서도 겉으로는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나를 보고 있던 아셰라드렌이 입을 뗐다. 그는 시르시안이 내게 전해 준 말과는 다르게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니 될 거야 없겠지만, 왕족으로서 메이드 하나만 편애하는 건 아무래도 좀 곤란하지. 공평하게 모두에게 사랑을 주면 또 모를까.”
대공은 시가를 한 모금 뿜어내며 농담을 던졌다. 그 방에 모인 모두가 킥킥대는 와중에, 농담이 농담인 줄 모르는 아셰라드렌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펴, 편애.”
“누구 하나만을 좋아한다는 뜻이랍니다, 왕자님.”
마담 지르젤은 어제와는 다르게 상냥한 어조와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작게 턱을 끄덕였다.
“맞아, 난 다프네를… 편애해. 다프네만, 좋아해.”
“어이쿠, 우리 늑대 왕자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되겠구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내가 발에 차이게 생겼어.”
그보다는 아침부터 브랜디를 마시는 모범적이지 못한 모습부터 보여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슬그머니 그들의 눈치를 보다 옆으로 빠져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아셰라드렌은 잠깐 내게 시선을 두는가 싶더니 금세 대공에게 집중했다. 대체 뭘까, 이 감정. 순간적으로 심장이 아프게 조여 왔다.
나는 의자에 감싸인 아셰라드렌의 등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내가 방금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따위, 저 해맑은 왕자는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아, 아까 하던 얘기, 계속 해 줘. 대공. 그래서 건국왕은, 어떻게 됐어?”
아셰라드렌은 아예 대공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전설을 듣는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조바심을 내며 다음 내용을 기다렸다.
“망국 하랄브의 첫째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서로의 혀를 섞고 나니 깨닫게 되었거든요. 그녀가 바로 자신의 반려라는 걸.”
대체 애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던 거야? 나는 짜게 식은 눈을 하고 대공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설마 아셰라드렌의 성교육 담당으로 저 남자를 부른 건가? 대공은 장난스레 웃으며 왕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왕자께서는 혀를 섞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