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65)화 (65/123)

65화

“우, 울지 마. 아, 안 만질게. 내가 만져서, 내가 다프네를 무섭게 해서….”

아셰라드렌은 내 얼굴을 확인하려 애썼다. 나를 앉힌 왼쪽 허벅다리를 고쳐 앉은 그가 나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나 좀 봐. 응? 내가 시, 싫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징그러워서, 그런 거지…. 소변 볼 때나, 쓰는 곳이 이렇게 커져서.”

“아니라니까요. 남자들은 원래 다 그래요.”

그런데 아셰라드렌이 남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여전히 와닿지 않는다. 그는 남자라기보다 요정? 천사?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알지만 나한테는 그런 느낌이었단 말이야.

“그걸, 다프네가 어떻게 알아?”

나를 달래 주던 그가 내 손을 억지로 잡아 내리며 물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눈빛이 왠지 사나워 보였다.

낯설다, 낯설어. 이 남자가 정말로 나의 작고 귀여운 하얀 강아지 아셰라드렌이 맞는지? 나는 손가락 사이로 그를 힐끔 쳐다보며 웅얼거렸다.

“굳이 제가 아니라도 이 나이쯤 되면 세상 사람 모두가 알아요. 내일 마담 지르젤한테 물어보세요.”

“…알겠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

“아무튼 문제는 저예요. 매번 아셰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니까, 오늘도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하면서 왜 아셰라드렌의 앞에서만 물러 터져서는.

나는 긴 한숨을 토해 내며 얼굴에 묻은 눈물 자국을 훔쳤다. 그러면서 슬쩍 아래를 내다봤더니, 내 눈물을 보고도 아셰라드렌은 진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크기가 비범하다 못해 흉물스럽다. 늑대일 적의 꼬리가 저기에 달려 있는가? 한 번 눈에 담으면 좀처럼 고개를 돌리기가 힘들었다.

“으….”

“방금 아셰가 움직인 거예요?”

“아, 아냐. 멋대로.”

“멋대로라니, 아셰의 몸이잖아요.”

“다프네가 자꾸, 좋은 냄새를 풍기니까, 그렇잖아.”

이렇게 되면 다시 원점이다. 하루가 끝날 때까지 욕실에 쪼그려 앉아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눈을 들어 아셰라드렌을 마주 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보랏빛 눈을 내리깐 채 개처럼 입가에 고인 침을 훑고 있었다.

“하, 핫초코보다 달콤한 냄새를, 자꾸, 만들어 내니까….”

“저 그런 적 없어요. 제 냄새 그만 맡으세요.”

팔을 들고 코를 박아 봐도 비누 향밖에 나지 않았다. 아셰라드렌이 말하는 냄새라는 건 이런 게 아니란 걸 눈치껏 알아차렸지만.

민망해진 나는 치마로 다리를 감쌌다.

“보는 것도 그만하세요. 이러다간 끝이 없겠어요.”

“치, 아무것도 하지 말래.”

“우선 나가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요.”

그나저나 프리지어는 알아서 돌아갔나. 예니체 경은 밖으로 나오질 않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욕실을 나서며 회중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슬슬 예니체 경과 시르시안이 교대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 드셔야죠. …아셰?”

나를 따라 일어서는 줄 알았던 왕자가 한쪽 다리만 세운 채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제 바지춤을 잡아 늘이며 난감해했다.

“그, 금방 가. 먼저 가 있어.”

혼자 있으려고 하는 법이 없던 그가 나를 보내려고 하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욕실에 홀로 남으려고 하는 이유를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 봤자 우리 사이의 거리감만 깊어질 뿐이었다.

“방에 가서 쉬고 있을게요.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주인이 없는 침실에 덜렁 대기하고 있기도 그렇고, 오늘따라 유난히 길었던 하루가 나를 지치게 만들기도 해서, 나는 도망치듯 내 방으로 뛰어갔다.

작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안락한 공간이 그렇게도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사실 장소 덕분이기보다는 마침내 숨을 돌릴 만한 틈이 생긴 덕분이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나오려나. 아셰라드렌은 욕실에서….

“…아, 미치겠네. 왜 이렇게 덥지.”

하루아침에 내가 모르는 남자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로 머리를 가렸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아셰라드렌은 마냥 순진하기만 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남들보다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그 역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였고….

“악!”

나는 소리가 죽도록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아예 다른 생각을 해 보자며 스스로를 닦달하다 아마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이름 없는 성에서의 따분하면서도 평화로운 일상과는 다른, 왕성에서의 하루에 지쳐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셰라드렌은 왜 나를 깨우지 않았을까? 배 속이 꼬르륵 요동을 쳐 대는 바람에 하늘이 새파랗게 물든 새벽에 잠을 깬 나는 산발이 된 머리를 빗어 내리며 왕자의 침실을 찾았다.

“끼이잉….”

그러나 왕자는 없었고 강아지만 한 마리 있었다. 이름 없는 성에 있었을 때보다 눈에 띄게 자라난, 그러나 성인 남자 세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법한 넓은 침대 위에서는 너무나 자그마해 보이는 강아지.

그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꼬물꼬물 옷자락에서 기어 나와 잠에 들었는지 새하얀 뒷발 하나를 옷자락에 걸쳐 두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귀여운 존재가 다 있지? 그리고 어쩐지 굉장히 쓸쓸해 보인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간간이 앓는 소리를 내기도 하는 강아지를 지켜보며, 나는 슬그머니 침실을 나섰다.

“아무도 없네.”

문을 열자마자 당연히 시르시안과 마주칠 것이라 예상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층계를 내려갔다.

어디서 땡땡이라도 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때마침 화장실이라도 들른 건지. 시르시안은 보이지 않았다.

뭐, 열두 시간 내내 문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여기도 아무도 없잖아?”

배도 채울 겸, 젤라와 실비아도 보러 갈 겸 나는 주방에 들렀다. 아침이 빠른 이곳이라면 분명 벌써부터 왁자지껄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주방 내부는 한산했다.

간간이 포대 자루를 이고 가는 짐꾼이 보이기는 했으나,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하고는 하던 마담 린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오늘 아침은 무언가 달라졌다는 직감을 느꼈다.

“실례합니다, 마담 린다는 아직 오지 않으셨나요?”

마침 근처에 짐꾼 하나가 생선이 가득 든 상자를 내려놓았다. 주방에서 며칠 일하는 동안 오고 가며 안면을 익힌 이였다.

그는 나를 보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은 뒤 어깨를 으쓱였다.

“좀 전에 국자를 휘두르면서 성깔을 부리시던 걸 본 것 같은데. 글쎄다,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네.”

“그럼 키친 메이드들은요?”

“젤라는 봤는데. 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젤라가 와서 마담 린다를 데려갔어.”

그러니까 어디로. 그렇게 물으려는 찰나였다. 꺄아아아악! 저만치서 출근하고 있던 메이드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름도 모르는 짐꾼과 나는 메이드가 나동그라진 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낯빛으로 나와 짐꾼 사이를 손가락질했다.

“저, 저기! 저기 나무에…!”

주방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방향이었다. 나는 메이드가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메이드들이 한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마담 린다의 모습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한 것은 부러 나무 아래에 흔들리는 새하얀 발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욱! 우욱!”

“얘, 칼레나야! 젤라를 의무실로 데려가거라!”

몇몇 메이드들이 고개를 바닥으로 숙인 채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마담 린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메이드들을 어떻게든 통솔하려 애썼고, 나는 멀거니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비아?”

시체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저 빛바랜 금빛 머리칼이며 부릅뜬 눈동자는 틀림없이 실비아의 것이었다.

초췌한 얼굴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나는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녀의 발아래로 알 수 없는 액체가 뚝뚝 떨어져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우우욱!”

다른 메이드들이 왜 속을 게워 냈는지 이제야 나도 알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 내 몸을 지탱할만한 것을 찾아 손을 휘저었다. 무릎에 힘이 풀려 몸이 멋대로 휘청거렸다.

“다프네 양? 괜찮습니까? 다프네 양!”

누군가 내 팔꿈치를 붙들어 강제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일그러지기 시작한 시야에 인상을 쓴 예니체 경이 들어왔다.

그가 대체 왜 여기에? 어쩐 일이냐 물어야 한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다프네 양? 다프네, 정신 차려!”

나를 잡은 예니체 경의 손이 뜨겁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뜰 때까지 기아처럼 비쩍 말라 볼이 움푹 파인 실비아의 얼굴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나를 쫓아오는 악몽을 꾸었다.

⋆★⋆

“일어났습니까? 다행히도 금방 눈을 떴네요.”

실비아가 죽었다. 레티스도 죽었고, 리카도 죽었다. 최근 내 주변에는 죽음이 많았다. 이름 없는 성을 나간 후로 잔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살아 있나?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새로 배정받은 내 침실이 아니었다. 주변의 소음이며 코를 따갑게 하는 약 냄새가 그것을 증명했다.

“윽, 흑. 실비아….”

아는 사람의 죽음만큼 충격적인 것도 없다. 심지어 고작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 있었던 실비아. 홀로 알 수 없는 괴로움을 안은 채 말라 가던 그녀.

나는 겨우 반나절 사이에 그녀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친한 메이드였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도 만났었다면서요.”

내가 누워 있는 침대의 옆에는 시르시안이 앉아 있었다. 그는 왕실 기사단 소속의 검은 제복을 입은 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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