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 남자요?!”
누구를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잘못을 추궁하는 듯한 저런 말투를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의아했을 뿐이다.
아까부터 자꾸만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급히 치마를 끌어 내렸다. 아셰라드렌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다프네는, 프리지어 같은 냄새만 풍기는 게 아니야. …수컷 냄새.”
그는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며 중얼거렸다. 나만큼은 그를 짐승으로 보고 싶지 않았건만, 지금의 아셰라드렌은 야만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당혹스러워진 나는 몸을 뒤로 내빼려 했다. 그러나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등을 제 손으로 받쳐, 오히려 나를 앞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는 건 새파란 핏줄이 돋아난 목덜미였다. 아셰라드렌은 나를 제 목에 기대게 한 뒤, 내가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단단히 붙어 앉았다.
“…나, 이 남자를 알아. 전에 이름 없는 성에 왔던… 프리지어와, 비슷한.”
“프리지어 님이랑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시도 때도 없이 말씀하시네요.”
“…그러는, 다프네야말로, 어, 얼마나 붙어 있었던 거야. 이 남자랑!”
요동치는 맥박이 뺨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우선 그와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셰라드렌은 아예 내 쇄골에 코를 파묻었다. 그러고는 쉬지 않고 숨을 들이마시며 분노했다.
마르고 각진 어깨가 달달 떨리고, 이를 얼마나 세게 악물었는지 까드득 하는 소리까지 이따금씩 들려왔다.
“가, 가까이 있으니까, 나, 남자 냄새가 더 많이, 나…. 기분 나빠. 이, 이런 적,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진정해요, 아셰. 왜 이렇게 흥분을… 안 되겠다. 저 씻고 올게요. 그러니까 놔주세요.”
“싫어.”
“왜요. 기분 나쁘시다면서요.”
나는 완전히 쩔쩔매고 있었다. 나야말로 아셰라드렌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리가 없지 않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어떻게 하면 화를 푸실 거예요?!”
“난 화, 화가 난 게, 아니야. 다프네는 내 메이드인데… 웬 역겨운, 냄새를 묻히고 있으니까.”
“그게 화가 난 거잖아요. 지금 제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싫어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응, 싫어. 너무너무, 싫어.”
쇄골 위에서 웅얼대는 입술이 나를 긴장케 만들었다. 괜히 허리를 바짝 세우게 되고, 땀을 흘려 끈적해진 몸이 신경 쓰였다.
나는 어떻게든 아셰라드렌의 품에서 벗어나려 조심스레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긴장한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하얀 셔츠 소매 아래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이 역겨운 냄새가 싫은데, 너무 싫은데… 다프네랑 떨어지는 건, 더 싫어. 어, 어떻게 하지.”
내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목덜미의 근육이 뺨을 툭 건드렸다.
떨어지는 건 싫다더니, 아셰라드렌은 내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옮겨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는 나를 제게서 살짝 떨어뜨린 뒤 무언가를 망설였다.
“그,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내가, 다프네를 씻겨 줄게.”
“네?!”
“다프네도 전에 나를….”
“아뇨, 아뇨. 그거랑 이건 얘기가 다르죠.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대체 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조악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런 결론이 나온 걸까? 나는 좀처럼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의 순수하고 해맑았던 미소년은 어디로 가고, 겉만 하얗지 속은 시꺼먼 늑대 같은 남자만 남아 버렸단 말인가.
“우, 우린 전처럼,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없게 됐잖아. 티타임도 그렇고, 같은 침대에서, 잘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씻자는 건 좀….”
“같이 씻는 게, 아니야. 내가 다프네를 씻겨 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좀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결국에는 참았지만, 대신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절대로 안 돼요.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없다는 건, 서로를 씻겨 주는 것도 안 된다는 뜻이라고요.”
“…그, 그럼 내가 보는 앞에서, 씻어. 자기 전까지, 계속 붙어 있고 싶으니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셰라드렌이 유난히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면 내 입장만 더 곤란해지는데….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셰라드렌에게 말하지 않고 외간 남자랑 외출했을 때부터?
“예니체 경이… 아셰가 계속 저를 찾았다고 했어요. 티타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티타임은, 차를 마시는 시간이잖아. 난 한참도 전에, 차를 다 마셨어. 그런데 프리지어가… 한 잔, 두 잔, 자꾸 더 마시라고 잔을 채우니까.”
그야 프리지어가 원한 것은 정말로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문자 그대로 차를 원샷 해 버리고 도망가려는 아셰라드렌과 그를 돌려세우는 프리지어를 상상하며 쓰게 웃음 지었다.
시르시안은 그녀를 야망이 있는 여자라 칭했고, 최근 들어 우스테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이 그에게 아주 깍듯해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
후작가의 새로운 주인이 될 예정인 프리지어가 어째서 매일같이 아셰라드렌과 시간을 보내려 하고 있는지.
어째서 다른 가문의 사생아들과는 달리 시르시안만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것도 예전과는 다르게.
“프리지어 님은, 왕자비가 되고 싶어 하시네요.”
그리고 뒤에서 이미 가문의 사람들과 결정을 내렸다. 애초에 아셰라드렌을 이름 없는 성 밖으로 꺼낸 귀족들의 주축은 우스테 후작가였다.
선택지가 따로 없었다고 해도 국왕이 반대하는 폐왕자를 왕성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분명 큰 결단이 필요했으리라.
“다프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셰라드렌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나는 설마, 하고 물었다.
“프리지어 님이 대놓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차를 계속계속 마시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나가려는데, 프리지어가 그랬어.”
“굉장하신 분이네요. 그렇게 솔직하기 쉽지 않은데.”
“난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다프네한테 가 봐야 한다고, 그랬지만.”
아셰라드렌은 마마보이도 아니고 다프네보이였다. 과연 내게 의존적인 모습이 프리지어에게 매력적으로 비쳤을지는 의문이었다.
하긴 그녀가 원하는 건 왕자비 자리지, 아셰라드렌의 사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프리지어가 그의 배필이 된다면, 아셰라드렌의 운명의 반려는 어떻게 되는가?
프리지어가 그 반려일 확률은 얼마나 되지? 그전에 아셰라드렌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그의 수명에 관한 신탁을 기억하고 있나?
“하, 하루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대. 내가 괴물이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그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티타임을 가지기로 한 첫날부터 대화의 수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셰라드렌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안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더욱 절박하게 나를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없고, 드디어 돌아왔나 싶었더니 낯선 남자의 냄새를 풍기고.
“아… 화가 날 만하네요. 이건 확실히 자리를 비운 제 잘못이에요.”
마침내 나는 납득했다. 우리 왕자님은 아직 미성년자라고요.
물론 열두세 살만 돼도 약혼자가 생기고,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결혼해 후계를 낳는 귀족들도 더러 있는 판에 미성년자 운운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그런데, 프리지어 님이 그렇게 어른의 요구를 당당하게 하셨다고 해서 아셰까지 한순간에 성인 남자가 되어 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씻겨 주겠다니, 그런 말씀을 대체.”
“무, 무슨 말이야. 내가 더러우면, 다프네가 나를 씻겨 줬잖아. 난 그래서….”
아셰라드렌은 어른의 요구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침묵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루 빨리 성교육이 시급했다. 마담 지르젤이 과연 그런 부분까지 가르쳐 줄 것인가? 생각해 보면 아셰라드렌은 성에 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다. 성인에 가까운 그와 매일같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자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을 정도니까.
다만 아까 나의 종아리를 보던 그의 시선, 빈틈없이 나를 껴안고서 낯선 남자의 냄새를 잔뜩 경계하던 그 행동은….
이제까지 내가 알던 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쯤 되니 나는 궁금해졌다. 아셰라드렌은 정말로 그런 부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것인가.
“씻는 건 제가 해요. 같이 있고 싶으시면 제가 씻는 동안 문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하지만 역시 그를 분노케 한 원인부터 없애 버리는 게 먼저겠지. 예니체 경한테만 유난인 줄 알았더니 그냥 내 주위에 있는 남자들이 다 싫은 건가 보구나.
수컷이 어쩌고 했던 것도 그렇고, 혹시 본능적인 번식 욕구라도 느꼈을까? 확실한 점은 아셰라드렌의 정신 연령이 예전처럼 유아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같이 있는 게 아니잖아.”
이제 그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심술을 부리는 어린애가 되어 있었다. 콧잔등을 살짝 찡그린 그가 내게서 지독한 냄새라도 난다는 양 대번 인상을 썼다.
어찌 됐든 시르시안의 냄새가 사라져야 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나는 별의별 상상을 해 보다 반쯤 포기하고 물었다.
“…저랑 한 공간에 있고 싶으신 거예요?”
“응.”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그럼… 눈을 가리고 계셔야 해요. 뒤로 돌아 계시는 건 이제 못 믿겠어.”
몇 번의 고민 끝에 나는 결국 나는 말했다. 그가 마냥 순진하기만 한 소년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별다른 의문도 없이 응, 하고 다시금 고갯짓을 했다.
“진심이세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같이 있으시겠다니.”
“오늘부터 우린, 따로 자야 하잖아. 하루에 반나절밖에, 다프네랑 있지 못해.”
사실 그 정도도 충분히 길기는 했다. 가족 사이라고 해도 우리처럼 오래 붙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먹히지도 않을 대꾸를 하는 대신 손을 들어 드레스 룸을 가리켰다.
“크라바트를 가져와서 아셰의 눈가에 묶을 거예요. 같이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