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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62)화 (62/123)

62화

어색한 분위기, 긴장이 되는 시선 교환. 그러나 고작 몇 초 뒤에 들려오는 마부의 목소리에 시르시안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왕성 앞입니다.”

“…수고했네. 이 길로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

그러고는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급해 보이길래 도와주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가끔 보면 시르시안 님은 친절이 너무 과하신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하지만 이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등이 파인 드레스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시르시안이 나와 아셰라드렌을 떨어뜨려 놓은 원흉이라고 한들, 이제 우리는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죄책감을 덜겠답시고 그가 베풀어 주었던 배려들은 분에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그러니 더 이상은 그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째선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시르시안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것만 도와드리지요. 다프네 양을 위해 하려고 했던 일들이… 오히려 다프네 양을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하네요.”

“아니에요, 그런 건 절대로 아니에요. 다만 제가 이렇게까지 극진한 에스코트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꼭 이런 말을 하게 만들어야 했나. 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걷으며 시르시안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서 장난기를 담아 그를 희번득 노려보았다.

“다프네 양도 귀족으로 태어났더라면 이런 일상이 당연했을 텐데요.”

시르시안은 과장되게 놀란 시늉을 하며 웃었다. 이제 신데렐라 놀이 시간은 끝이 났다. 아셰라드렌에게 이 차림을 들키기 전에 서둘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했다.

“시르시안 님은 밤부터 근무하신다고 하셨죠?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

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열심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중간에 발을 헛디뎌 휘청하기는 했지만 용케 넘어지지 않고 아셰라드렌의 침실이 있는 층까지 도착했다.

그러고는 모퉁이를 돌아 침실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려는데, 어디선가 우뚝 솟아난 새까만 벽이 나를 가로막았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드신 듯한데, 여기서부터는 아셰라드렌 왕자님의 개인적인 공간….”

“예니체 경, 혹시 시력이 나쁘세요? 왜 저를 못 알아봐요. 멀리서 봐도 다프네잖아요.”

나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니체 경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새까만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뜨기만 하며 동상처럼 굳어 있다 이내 입을 열었다.

“평소에 하는 머리와 전혀 달라서… 잠시 누군가 했습니다.”

“예니체 경은 여태까지 저를 머리 모양으로 알아보셨군요…. 그보다 저, 옷을 갈아입어야 해요.”

나는 어서 비켜 달라며 그를 향해 손짓했다. 곰같이 단단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기사가 뭔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어물쩍거렸다.

“아, 다프네 양. 그런데 지금은.”

“어서요. 왕자님께 들키기 전에 가야 한다고요.”

최대한 서두르고 서둘렀던 나의 외출 시간은 총 한 시간하고도 40분가량 정도였다. 나는 이름 없는 성의 문양이 박힌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예니체 경을 닦달했다.

이 정도면 귀족들이 흔히 가지는 티타임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대개 두어 잔씩 차를 마시며 길고 긴 수다를 즐기고는 했으니까.

다만 아셰라드렌이 그런 귀족들의 문화에 벌써부터 적응을 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강단이 있는 프리지어라면 아셰라드렌을 최대한 길게 붙잡아 주지 않았을까.

제발 그래 주었어야 할 텐데. 나는 예니체 경이 비켜 주지 않으면 그를 밀어내고서라도 지나갈 기세로 그의 어깨 너머를 흘끔거렸다.

“왕자님은 아직 응접실이 계신가요? 제가 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하시겠지만 설명은 나중에 해 드릴게요.”

“네, 응접실에 계시기는 합니다만… 아까부터 10분에 한 번씩 다프네 양을 찾으셨습니다.”

“아까라면 언제요?”

“한 시간쯤 전부터였을까요. 아무튼, 어서 가십시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그가 왕자의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반색하며 기사에게 고개를 숙인 후 방문을 닫고 구두를 벗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상관없겠지. 나는 스타킹만 신은 발로 운동장처럼 넓은 방을 가로질렀다.

그런 다음 침실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 드레스를 침대에 대충 벗어 던지고 옷을 갈아입었다.

가격만 들어도 턱이 덜덜 떨리는 값비싼 드레스를 아무렇게나 내버려 둬야만 하는 심정이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얼굴의 화장기를 닦아 낸 뒤 마지막으로 컬을 넣어 한쪽으로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어휴, 힘들어 죽겠… 아악! 깜짝이야!”

살인 현장을 몰래 벗어나는 범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온 나는 그 길로 복도로 나가려다 까무러쳤다.

어느새 거대한 그림자가 진 듯 불을 켜기에는 밝으나 그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애매한 어둠 속에서,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는 하얀 대리석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곳에 있는 존재가 무생물 따위일 리는 없었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나를 보고 있는 아셰라드렌이었다.

저런 얼굴을 할 줄도 알았던가, 싶을 정도로 그는 내게 낯선 기분을 선사했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년의 투명한 눈동자는 약간의 움직임조차 없었다.

“노, 놀랐잖아요…. 아, 아셰? 살아 있는 거 맞죠?”

무서울 정도로 정적인 그가 신경이 쓰여 조심스레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예쁜 유리알 같은 눈만 도로록, 굴러가 내 움직임을 좇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좀 뭐하지만 사탄의 인형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저 미모를 생각하면 사탄이 아니라 천사이긴 한데.

하지만 그가 자아내는 비현실적인 분위기, 널따란 어깨를 뒤로 살짝 기울인 채 앉아 턱을 치켜들고 있는 자세는 이제까지 내가 알던 아셰라드렌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어디, 갔다 와?”

내가 제 앞까지 가까워진 뒤에야 그는 굳게 다물린 입술을 떼었다. 꽉 잠긴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들려왔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화가 난 아셰라드렌은 본 적이 없었는데.

“…어디, 갔다 오냐고.”

내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그가 다시금 물었다.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지는 고개가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다.

이상했다. 그가 나를 해칠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의 위압감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셰가 주셨던 제 보물들을 안전한 곳에 넣고 왔어요.”

“…보물?”

그제야 아셰라드렌이 표정을 풀고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침대를 짚고 있느라 뼈가 불거진 손등이 느릿하게 이불을 쓸고 내려왔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손을 허벅지에 올려놓은 채 침묵했다. 그러다 내 쪽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안전한 곳이… 어딘데? 그, 그보다 다프네한테서, 프리지어 같은 냄새가 나.”

“싫으신가요? 그게, 어쩌다 보니.”

“싫진 않지만… 모르겠어. 다른 사람, 같아.”

강아지로 변신할 줄 알아서 사람일 때도 개코를 가지고 있는 건가. 나는 팔을 들어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부티크에서 나올 때 향수를 뿌린 기억이 났다. 내게 화장을 해 주었던 직원이 잠시만 있어 보라며 가져다주었었지.

“이, 이리 와, 다프네. 응?”

아셰라드렌이 상체를 기울여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힘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간단히 끌려가도 되는 건지.

나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덜렁 들려 그의 옆에 앉혀졌다. 처음으로 앉아 보는 왕자의 침대는 그 푹신함이나 안락함이 남달랐다.

“와, 이 침대… 굉장하네요. 어쩜 이런 곳을 두고 제 방에서 주무셨을까?”

“…그러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침대를 꾹꾹 눌러 보다 말고 또박또박 책을 읽듯 끊어 말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같은 일은 다시는 벌어져서는 안 되니까, 이제는 진짜로 따로 자야 한다는 걸 나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 납득하는 것과 아셰라드렌의 입에서 저런 소리를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르게 충격이 컸다. 차마 아셰라드렌을 볼 수가 없어진 나는 조용히 그의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프리지어 님과의 티타임은, 즐거우셨나요?”

그러고는 울적하게 물었다. 역시 왕성에 온 뒤로부터 아셰라드렌은 내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한 미래였지만 막상 닥쳐 보니 섭섭했다. 이름 없는 성에서의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그도 나도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오지 않았던가.

“…아니, 별로.”

뒤늦게 튀어나온 퉁명스러운 대답이 은근히 나를 기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다시금 아셰라드렌을 쳐다보았다.

“재미없었어. 내가 모르는, 소리나 계속 늘어놓고.”

그러고 보니 머리가 조금 자란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은빛 머리칼이 눈썹 아래까지 내려와 그의 크고 예쁜 눈을 가리는 듯했다.

넘겨 주는 편이 좋을까? 나는 짧게 고민하다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다프네는, 그 남자랑, 즐거웠어?”

아셰라드렌이 내 손을 잡아 내리며 물었다. 큼직한 손등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향한 곳은 침대에 걸터앉느라 말려 올라간 내 치맛자락이었다.

정확히는 치마 아래로 비져 나온 종아리와, 그것을 감싼 메이드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실크 스타킹에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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