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60)화 (60/123)

60화

“다프네 양은 여기 남아 주십시오. 누님은 왕자님과의 독대를 원하십니다.”

참고로 벙쪄 있던 인원들 중 하나는 시르시안이었다. 그가 내게 양해를 구하는 듯 말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 알고 있어요. 처음부터 그러려던 참이었고요.”

프리지어가 내걸었던 조건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아셰라드렌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건 여간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늑대로 변한 그가 미친 듯이 날뛰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셰라드렌을 가까이하겠다는 건….

“다, 다녀올게. 금방이면 될 거야.”

그는 별로 내켜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철없이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지금은 예니체 경에 비하면 프리지어가 훨씬 더 큰 호감을 사고 있다는 건가. 응접실 내부로 사라지는 아셰라드렌의 뒷모습을 보는 기분이 미묘했다.

프리지어는 마담 지르젤이 내세운 기준에 완벽히 들어맞는 신붓감이었다.

…아셰라드렌과 프리지어라.

“그렇게까지 금방은 아닐 겁니다. 누님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분인지라.”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시르시안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기사 제복이 아닌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오늘은 예니체 경이 호위를 서나 봐요.”

“우선 이번 주는 낮 시간을 예니체 경이, 밤 시간을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예니체 경도 당분간 밤에는 푹 쉬어야죠. 저 눈 아래 그늘진 것 좀 보십시오.”

시르시안의 길쭉한 손가락이 예니체 경의 눈가를 향했다. 그러나 내 시선이 닿기도 전에 검은 머리 기사가 큼직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볼 만한 꼴이 아닙니다. 우스테 경은 날이 갈수록 짓궂어지시는군요.”

“뭐 어때서 그래요? 예니체 경은 살이 빠져도 미남이시네요. 좀 무섭긴 하지만.”

“…그 무섭다는 말은 전부터 하지 않았습니까, 다프네 양.”

그야 이름 없는 성같이 어두운 데서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 까무러치기 딱 좋은 인상이니까. 그에 반해 시르시안은 오히려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이다. 웬만해서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는 그를 보면 덩달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보다 예니체 경, 간밤에 푹 주무셨을까요?”

“네, 다프네 양 덕분에.”

“정말 다행이네요. 경이라도 좋은 낯을 하고 계시니.”

정작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을 하나 만들었는데. 밤에 다시 자려고 누우면 무조건 생각나겠지. 벌써부터 괴로웠다.

“그런데 다프네 양은 아예 왕성에 눌러앉은 겁니까? 어제 봤을 때도 주방에 있었잖습니까.”

어제도 예니체 경을 만나긴 했다만 그때는 서로의 안부를 물을 겨를도 없었다. 마침내 아셰라드렌을 벽 사이에 두고 한자리에 모이게 된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려 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다프네 양은 누님의 배려로 왕성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하지만 시르시안이 어쩐지 초조한 얼굴로 끼어들어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니체 경 또한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랬던가요. 계속 비몽사몽이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나 봅니다.”

“미안합니다, 예니체 경. 다프네 양이 반가우신 건 알지만 지금은 제가 빌려 가야 하겠습니다.”

“다프네 양을 말입니까? 하나, 왕자님께서 아시면….”

“이쪽 사정이야말로 금방이면 됩니다. 자, 가실까요.”

시르시안이 말하는 사정이 뭔지 몰랐다면 나도 예니체 경과 남아 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나도 하루빨리 그에게 맡긴 금화들을 금고에 넣어 두고 싶었다.

나 또한 예니체 경에게는 미안했지만, 오늘 아침과 같은 일을 겪고 나니 전보다 더 돈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내 신분의 본분도.

여차해서 이상한 누명이라도 뒤집어쓰는 날에는 금화를 모두 챙겨 조용히 달아날 것이다. 아셰라드렌마저 모르게.

…….

응, 아셰라드렌마저 모르게.

“일부러 오늘은 마차를 타고 입궁했습니다. 괜히 얼굴이 알려져 봤자 좋을 거 없잖아요?”

우리는 예니체 경을 남겨 두고 층계를 내려갔다. 시르시안은 미리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다며 나를 안내했다.

우스테 가문에서 오래 일해 왔어도 그 마차를 타 본 적은 없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혹시 몰라 보는 이가 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시르시안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이내 시르시안이 맞은편에 앉자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나는 체면도 잊고 고풍스러운 문양이 찍힌 창틀이며 푹신한 격자무늬의 천으로 만들어진 천장을 구경했다.

“다프네 양. 지금 꼭, 제가 처음 마차를 탔을 때랑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네요.”

“…네? 어머, 부끄럽게. 죄송해요. 솔직히 너무 신기하고 비싸 보여요.”

“이 마차 말입니까? 저도 딱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시르시안은 창턱에 팔꿈치를 댔다. 그러고는 여유롭게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 커튼에 달린 금실은 진짜 금으로 만들어졌을까, 이런 마차를 타고 다니는 인생은 대체 얼마나 행복할까.”

“맨날 비싸고 좋은 음식만 먹겠지. 걸레를 빤다든지 무릎을 굽혀 일해 본 적 따위는 한 번도 없을 거야…?”

“소름 끼치네요.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똑같은 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매끈하게 올리며 웃었다.

시르시안도 우스테 가문에 입적되기 전까지는 나와 같은 고용인 생활을 했었다고 했지. 그래서 우리는 비교적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차림으로는 은행에 가기 애매하네요. 그 많은 금화를 보관하겠다고 했다가는 의심을 살 겁니다.”

“네? 진작에 말씀하시지. 사복을 입었을 텐데요.”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려던 찰나였다. 시르시안이 대뜸 내 옷차림을 지적했다.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별말 안 하길래 이대로 가도 되나 보다 했지.

이제 와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입술을 뚱하게 내밀었다. 똑같은 신분에서 혼자 계급이 상승되었답시고 저러는 건가 싶어 좀 얄미웠다.

“아뇨, 사복을 입어 봤자….”

“너무하시네요. 지금 저 가난하다고 놀리시는 거 맞죠.”

“그럴 리가요. 잠시만요.”

시르시안이 마차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말이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무슨 일이 있냐는 마부의 물음이 들려왔다.

“행선지를 바꾸어야겠다. 먼저 헤난 시에라에 들려.”

“예, 도련님!”

마부의 확답을 들은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헤난 시에라가 뭔데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는 한데.

그런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시르시안이 금갈색 눈을 반짝였다. 장난기 어린 미소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 잘생기긴 잘생겼다. 물론 우리 아셰라드렌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 지금의 아셰라드렌을 두고 내가 과연 우리,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맞을까? 그는 이제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여깁니다. 내리세요.”

헤난 시에라는 우스테 저택처럼 왕성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듯했다. 마차가 방향을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르시안은 문을 열고 내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 헤난 시에라는 부티크였군요. 솔직히 약간은 예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날개옷을 걸친답시고 내가 천사가 될 수 있을까. 귀족 아가씨보다 거친 손등이라던가 비딱한 자세 같은 건 고쳐지지 않을 텐데.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 무조건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내게도 벌어졌다. 물론 시르시안은 나의 남주인공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아셰라드렌이 남주인공인 건 아니었다. 그는 어쩌면 프리지어와….

“표정 좀 푸십시오. 누가 보면 제가 지옥에 데려온 줄 알겠습니다.”

이런 고급 부티크에 메이드를 데려왔다 망측한 소문이 나진 않을까 걱정은 안 되는 건가. 나는 아예 대놓고 내게 팔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해 주는 시르시안을 의심쩍게 쳐다봤다.

이 정도의 친절은 관심 있는 여자가 아니면 베풀지 않을 텐데. 하지만 굳이 왜? 주변에 예쁜 여자들 다 제쳐 두고 굳이 왜?

“신분을 속인다고 해서 굳이 이런 곳에 올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네요….”

나는 가게 문부터가 거의 왕성급으로 화려한 부티크에 벌써부터 질려 버렸다. 남들처럼 예쁘고 비싼 드레스를 좋아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별로 어울릴 것 같지는 않은걸.

“은행 건을 핑계 삼아 제가 오고 싶었습니다. 프리지어 누님이 헤난 시에라의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어째서 내 어머니는 저렇게 고운 옷 한 벌 입지 못하고 가셨나 싶어서.”

“…어머니 얘기를 꺼내시는 건 반칙이에요. 그러면 저도 여기서 드레스 하나만 살게요. 대금은 시르시안 님이 보관하고 계시는 금화로 치르고요.”

걱정했던 것과 달리 헤난 시에라는 하루 종일 울적했던 기분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장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정말로 레티스 같은 공주나 입을 법한 턱없이 비싸 보이는 드레스들이 즐비해 있었다.

프리지어가 즐겨 입는 드레스를 파는 가게면 유명세가 대단할 텐데, 어째서 내가 갔을 때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는지.

이때의 나는 거기까지 궁금해하진 않았다.

시르시안이 헤난 시에라를 하루 동안 통째로 빌렸었다는 사실은 진주 가루를 뿌린 크림색 드레스와 같은 색깔의 레이스 장갑을 끼고 마차에 돌아왔을 때나 알게 되었다.

“제가 보기엔 아까 그 황금빛 장미가 달린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요.”

나는 왕성에 가기 전에 입어야 할 메이드복을 따로 챙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시르시안은 왠지 모르게 불만이 있어 보였다.

“아, 그거요. 저도 그런 것 같긴 했는데, 말도 못 하게 비싼 가격표를 보게 되는 바람에.”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도 고작 한 벌 가격이 내 3년 치 연봉이긴 했다만. 금고를 빌리겠답시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뼛속까지 자리 잡은 서민 근성이 울컥 튀어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시르시안이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어차피 제가 사 주려고 했었는데요, 뭐. 나 참, 다프네 양은 그런 소시민적인 모습까지 저희 어머니를 닮았네요.”

“…시르시안 님, 저는 당신 같은 아들을 둔 적 없답니다.”

그러니 나를 얼굴도 모르는 고인과 비교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말하자 그는 영문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