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셰라드렌은 묵묵히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고집에는 결국 마담 지르젤도 두 손을 들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요. 이외에도 가르칠 내용이 많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저를 향한 왕자의 시선을 피했다. 회초리를 내려놓는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시간도 벌써 이렇게나 되었군요. 저는 내일 다시,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뵙겠습니다.”
“…마담 지르젤은, 앞으로 매일, 나를 가르치러, 올 거야?”
아셰라드렌이 거의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더듬지 않고 물었다. 단어 사이사이를 뚝뚝 끊어 대는 탓에 말투가 조금 어색하게 들리긴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기묘한 위엄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내일은 왕자님께서 제대로 예절에 맞게 식사를 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지 확인할 예정입니다.”
“제대로, 할 줄 알아.”
“그건 제가 내일 보고 판단하지요.”
오늘의 수업으로 아셰라드렌은 대체 무엇을 배웠을까. 마침내 우리를 바라보는 세간의 일반적인 시선에 대해 깨닫게 되었을까.
아니면 그가 그토록 우상화했던 내가 실은 볼 것도 없는 존재라는 걸 드디어 깨닫게 되었을까.
마담 지르젤이 시녀들을 데리고 나간 뒤에도 나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비참했다. 나라고 뭐, 원해서 고아 평민으로 태어났나?
아셰라드렌과 엮이지 않았더라면 굳이 겪지 않아도 되었을 모욕이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후회가 되지 않았다.
매번 그의 어리광을 끝내 들어주고 말았던 내 불찰이 가장 컸다.
괴로웠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해서, 차라리 상상하지 않으려 했던 날을 하루아침에 맞닥뜨린 것이.
“…다프네.”
“…….”
“다프네!”
“아, 네.”
복잡하게 뒤섞인 상념 속을 허우적대느라 나를 부르는 아셰라드렌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그가 신은 연한 갈색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허둥지둥 고개를 들었다.
“나, 아, 아파.”
울상을 한 그가 칭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는 술술 잘도 말씀하시더니….”
“노력, 하고 있으니까. 하, 하지만 아직, 어려워. 마담 지르젤한테…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시다니, 놀랐어요. 어디 손 좀 봐요.”
새하얀 손바닥에 세로줄이 두 개, 꽤나 깊이 파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걸 어떡하면 좋지.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잠시만요, 제 방에 구급상자가 있으니까….”
“가지 마.”
“네? 하지만.”
“같이, 있고 싶어. 지금 나, 너무 힘이 없어서, 화가 나.”
“이렇게 세게 제 옷을 잡고 계시면서요?”
그는 양손으로 내 소맷자락을 잡고 있었다. 붉은 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화가 난다는 게 농담은 아니었는지, 그는 조금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담이… 다프네를 욕하는데, 난 아무것도 못 하고, 듣기만 해서. 그래서 화가 나.”
지난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여전히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러나 그런 그를 위해 나는 나서지도 못했다.
이 세상에 아셰라드렌만큼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멋대로 아래로 내려가는 입꼬리에 힘을 주려고 했다.
눈시울이 뜨겁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앞의 아셰라드렌이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하면… 그 계집이, 다프네를, 욕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계집이라는 말은 그냥 나쁜 말이에요. 저는 부디 아셰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다프네가 원한다면야.”
마담 지르젤에 대한 인상이 나쁜 건 피차일반이라, 나는 그가 껄끄럽게 대답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직 나약했다. 왕성에서의 나날은 오늘보다도 더 험난할 것이 뻔했다. 고작 이런 경험으로 좌절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나는 벌써부터 지쳐 가고 있었다. 레티스가 죽은 후로 무엇 하나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었다.
똑똑.
“헉, 깜짝이야.”
“아니죠, 아셰. 이럴 땐 ‘누구지?’ 하고 물으셔야 해요. 아까의 그 위엄은 어디로 갔냐구요.”
“아… 알겠어.”
아셰라드렌의 품에 거의 안겨 있다시피 가까이 붙어 있던 나는 그의 한쪽 어깨를 잡아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누, 누구지?”
“승마 수업 시간입니다, 왕자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싫은데.”
“네?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셰라드렌이 조그맣게 웅얼거리자 문밖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는 별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너무나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문가를 향해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오늘부로 왕자님께 말을 타는 법을 가르쳐 드릴 바키아 남작입니다.”
그러고는 문을 여는데, 아셰라드렌을 보자마자 상대가 춤을 추듯 한쪽 팔을 접으며 허리를 숙여 그는 튀어 오를 듯 놀라고 말았다.
바키아 남작은 곱슬기가 아주 심한 검은 머리와 공을 들여 기른 턱수염을 가지고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셰라드렌은 안으로 들어오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바키아 남작이 싱글싱글 웃으며 왕자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오, 아닙니다. 제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왕자님이 나오셔야 합니다. 승마를 응접실에서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말을… 내가, 탈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요. 저는 올해로 벌써 12년째 왕족들의 승마 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바키아 남작은 자부심이 넘쳤고, 나를 보고도 별다른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고나 할까. 마담 지르젤을 겪고 뒤로 새로운 귀족 출신 교사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말타기는 실전입니다! 저희는 이 길로 곧장 마구간으로 갈 겁니다.”
바키아 남작은 마구간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무는 법이 없었다. 그는 벌써 왕자에게 어울리는 백마를 골라 놨다며, 틀림없이 왕자께서도 그놈에게 반할 것이라 장담했다.
“물론, 첫날부터 바로 안장에 앉히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시지요. 오늘의 수업은 켈런과의 교감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가능할지, 나는 잘.”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남작이 아셰라드렌만 데리고 마구간 안쪽으로 들어가기에, 나는 마침 근처에 있던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기로 했다. 이것도 수업이니까 시간이 좀 걸릴 테지. 그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야겠다. 내게는 홀로 생각을 정리할 거리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마구간의 뒤로 보이는 푸른 들판을 구경도 하기 전에, 바키아 남작은 사색이 되어 뛰쳐나왔다.
그러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제 뒤를 따라오는 아셰라드렌을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째서 켈런이 저렇게 날뛰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아주 순한 놈이라 일부러 왕자님을 위해 데려온 것을.”
“동물들은, 나를 무서워해. 그러니까… 계속, 말했잖아. 말은 아마 모, 못 탈 거라고.”
그에게는 지극히 익숙하고 당연한 사실이라, 아셰라드렌은 멋쩍어하며 목뒤를 긁적였다. 나는 마구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키아 남작의 태도는 마구간에 들어가기 전과 후가 확연하게 달랐다.
“음, 서, 설마 왕자님께서 타고나신 그….”
“괴물?”
“…그렇게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면, 우선은 그렇다고 하지요. 혹시 그 괴물 때문에 켈런이 저리 기겁한 것인지….”
“아마도. 애초에, 굳이 말을 타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어차피 아셰라드렌이 늑대로 변하면 말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덩치부터가 엇비슷하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늑대로 변해서 날 태워 준다고 했었는데, 이러다간 영원히 못 타게 생겼다.
“그,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저.”
바키아 남작의 비굴한 미소를 본 아셰라드렌이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남작에게 손짓했다.
“수업은, 여기서 끝난 걸로, 아, 알면 되겠지?”
“네, 아마 다음부터는 다른 수업을 받으시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 저는 이만 켈런의 상태를 살펴보러….”
남작은 문장을 다 맺기도 전에 부리나케 마구간으로 도망쳤다. 승마 수업을 10년이 넘게 했다면서, 말이 날뛰는 걸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의아해진 나는 치맛자락에 묻은 풀을 털어 내고 일어나 아셰라드렌에게 다가갔다.
“케, 켈런이, 나를 보자마자 눈을 까뒤집었어. 입에서 거품도, 막 보글보글.”
“아하.”
그랬더니 곧바로 해답을 알 수 있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아셰라드렌은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배가 고파. 여태까지 아무것도 못 먹고.”
“그렇네요. 벌써 해가 중천인데… 그만 돌아가요.”
왕성에서는 아셰라드렌이 원하면 언제든 식사를 할 수 있겠지. 정신없이 아침나절을 보내느라 나도 우리가 쫄쫄 굶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점심으로 먹고 싶은 메뉴를 이야기하며 모처럼 즐겁게 산책을 했다.
고작 마구간에서 왕성까지의 짧은 거리기도 했고, 중간에 한 번 귀족 무리를 만나 잔뜩 긴장하기도 했지만 역시 둘만 있는 시간은 소중했다.
“아, 이제야 오셨군요. 응접실에 프리지어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머무는 층까지 올라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예니체 경이 산통을 깨는 소리를 내뱉어 아셰라드렌의 심기를 건드렸다.
왕자는 예니체 경을 보자마자 대번 인상을 썼다.
“쯧.”
그러고는 혀를 차 복도에 있던 모든 인원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아니, 왕성에 혼자 끌려왔을 땐 예니체 경이라도 곁에 두고 싶어 했다더니만.